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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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지도자들

 

레닌의 건강은 1922년 초부터 그다지 좋지 않았다. 5월 말에 병세가 악화되어 첫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다. 10월 2일까지 휴양하고 나서야 고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15일 늦은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또다시 발병해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상태가 약간 호전된 후 레닌은 12월 23일 의사에게 하루에 5분씩 구술하고 속기 기록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방해하는 문제가 있어서 잠을 잘 수 없을까 두렵다고 했다. 허락을 받은 후 레닌은 비서 볼로디체바를 불러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고 싶은데, 기록하세요!"라고 말했다. 이어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첫 부분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레닌은 계속 구술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의사가 반대했다. 그러자 레닌은 매일 짧은 시간이라도 그의 <일기>(레닌은 자신의 차기*를 이렇게 불렀다)를 구술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치료를 거절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차기(箚記)ㅡ 책이나 글을 읽고 난 뒤 소감을 적는 일 혹은 그 기록

 

그날 아침 스탈린, 카메네프, 부하린은 의사와 함께 레닌의 요청을 연구했다. 보건데 그들은 레닌을 완전히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하루에 5-10분씩 구술할 수 있지만, 서로 통신하는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된다. 이 메모들에 대해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답변을 기다리지 말아야 하며, 면회는 금지한다. 둘째, 친구든 가족이든 정치생활의 어떤 일도 블라디미르 일리치에게 보고하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 소재를 제공하여 늘상 문제를 생각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볼코고노프, <승리와 비극>1권 155쪽)

 

레닌은 12월 24일, 25일, 26일, 29일과 1월 4일에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띄엄띄엄 구술하기 시작했다. 1923년 3월 초까지 레닌은 <협동조합에 관하여>, < 우리나라 혁명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노농감찰원을 개편할 것인가>, <차라리 적을지언정, 조금은 좋아야 한다> 등 일련의 글과 서신을 연속으로 구술했다. 그 중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레닌의 '유언'으로 불린다.

 

  ‘유언’에서 레닌은 어떻게 중앙위원회의 지도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당의 감찰제도를 보완하여 당의 분열을 방지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를 위해 레닌은 곧 소집될 당대회에서 정치제도에 대한 일련의 변동을 할 것을 제안했다.


첫째, 중앙위원 수를 늘려 수십 명, 심지어는 100명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늘어난 수십 명은 "주로 오랫동안 소비에트 업무를 해 온 사람들"(이들은 이미 일부 관료주의적 전통과 선입견에 물들었기 때문에)이 아닌 고난을 통해 단련된 노동자와 농민들이다. 이렇게 하면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기관을 더 잘 감찰하고, 개선하고 개조할 수 있다". "중앙위원이 많을수록 중앙에서 업무 단련을 받은 사람이 많아지고, 어떤 부주의로  분열을 초래할 위험성은 더욱 작아진다." 또한 대중과의 연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중앙위원회의 위신을 높이고, 중앙위원회 소수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둘째, 새로 발탁된 중앙위원들과 감찰 업무를 맡은 중앙감찰원 전문가들이 서로 협조하여,  전자가 이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국가 관리 과제를 끊임없이 배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최대 400∼500명을 넘지 않도록 노농감찰원을 개편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선 레닌은 <어떻게 노농감찰원을 개편할 것인가 ( 제12차 당대회에 제기하는 건의)>에서 진일보 발전시켜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레닌은 노농감찰원이 당의 중앙감찰위원회와 합병시켜 노동자와 농민 중에서 75~100명의 새로운 중앙감찰위원을 선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들은 일반 중앙위원처럼 중앙위원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정치국의 각종 문건을 수시로 점검하고, 일정 인원이 정치국 회의에 매번 참석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마땅히 ‘체면을 봐줘선 안 되고’,  총서기 혹은 어떤 다른 중앙위원의 위풍이든 그들이 질문 또는 자료를 검사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적으로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각종 업무가 엄격하게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게끔 해야 한다.”(레닌전집 2판 43권 343, 374-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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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의 레닌

 

레닌은 또한 중앙위원회의 안정이 주로 노농동맹의 안정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음을 강조했다. "우리 당은 두 개의 계급에 의존하고 있기에, 이 두 계급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당이 불안정해질 수 있고 그 붕괴는 불가피하다. 일단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어떠한 조치를 취하든, 우리 중앙위원회의 안정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하든 소용이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그 어떠한 조치도 분열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레닌은 이런 분열이 아직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에, 우선 그것은 개의치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보다 지금 절실한 것은 “가까운 시기에 (당내-주)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관건은 중앙위원회 주요 지도자들 간의 관계 및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이다.

 

레닌은 병상에 누워 주요 지도자들의 장단점을  한명씩 논평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안정성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스탈린과 트로츠키 같은 중앙위원회 성원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분열 위험의 태반은 그들 사이의 관계로 구성되는데,  하지만 이런 류의 분열은 피할 수 있다. 내 생각엔 중앙위원 수를 50명, 100명으로 늘리는 것이 분열을 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되면서 무한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이 권력을 영원히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다른 한편, 트로츠키 동지는 교통인민위원회 문제에서 중앙위원회에 반대한 투쟁이 증명한 바처럼 걸출한 재능을 갖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개인은 아마도 현재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며, 일에 있어 순수하게 행정적 측면에 지나치게 열중한다.

 

현재 중앙의 이들 두 걸출한 지도자의 두 가지 특징은 의외로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만약 우리 당이 조치를 취해 방지하지 않는다면, 분열은 갑자기 도래할 것이다.

 

레닌은 이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당내 안정에 있어 관건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 특성에 대해선 레닌은 당의 안정에 진정한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고 보았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른 중앙위원들의 개인적 특징을 더 이상 상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1917년-주)10월에 한 일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하지만 트로츠키의 비볼셰비즘을 탓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젊은 중앙위원들 중에 부하린과 피다코프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 싶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가장 걸출한 역량 (가장 젊은 세대 중에서)이다. 그들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측면에 주의해야 한다. 부하린은 당의 가장 귀중하고 훌륭한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당연히 전체 당이 좋아하는 인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적 관점은 완전히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그중에는 어떤 번거로운 철학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변증법을 배운 적이 없으며, 나는 그가 변증법을 완전히 이해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 <레닌전집> 2판 43권, 338-339쪽)

 

이상은 레닌이 12월 24일 구술한 내용이다. 구술이 끝난 뒤 레닌은 "어제(12월 23일)와 오늘 (12월 24일) 구술한 것은 극비"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가 구술한 모든 것을 극비 문서로 분류하여 전담자가 있는 전문적인 장소에 보관해 줄 것을 요청했다.

 

12월 25일, 레닌은 구술을 계속했다.

 

그 다음은 피다코프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한 의지와 걸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행정 수단과 일의 행정적 측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중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그를 의지할 수는 없다.
물론 내가 두 사람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현재 상황만을 놓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두 걸출하고 충성스러운 사업 일군이 자신의 지식을 충실히 하고 자신의 일면성을 극복할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가정하에서이다. (위, 339-340쪽)

 

1923년 1월 4일, 레닌은  12월 24일 구술한 내용에 대해 중요한 보충을 하였다.

 

스탈린은 너무 거칠다. 이 결점은 우리와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는 완전히 용인될 수 있지만, 총서기 직책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이 자리에서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하기를 제안한다.

 

이 사람은 모든 다른 방면 중 오직 한 가지 측면에서 스탈린 동지보다 조금  나으면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비교적 인내심이 강하고, 공손하며, 예의 바르고, 다른 동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며,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 등이면 된다. 이 점은 아마도 보잘것없는 작은 일로 보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열을 방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내가 앞서 언급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상호 관계로 보면,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또는 이것은 결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은 일이라 생각한다.(<레닌전집> 2판 43권, 340쪽)

 

레닌의 뜻에 따라서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는 극비문서로 분류하여 5부만 인쇄하고 1부는 레닌에게, 3부는 크루프스카야에게, 1부는 레닌 비서처에 제공했다. 볼로디체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고는 내가 불태웠다. 레닌의 뜻에 따라 서류 사본을 봉인한 편지봉투에는 밀랍 인장이 직혀졌다. 그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자신만이 그것을 열 수 있도록 요청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나제즈다 콘스탄티노프나(Na Djesta Konstantinovna, 크루프스카야-주)만이 봉투를 열 수 있다고 명기해 주길 부탁했다. '그가 죽은 후'라는 몇 글자를 나는 편지 봉투에 적지 않았다. 레닌에게 남겨진 것은 단단한 종이와 끈으로 책같이 묶어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했다."(<레닌전집> 2판 43권, 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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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의 크루프스카야

 

그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서신, 메모 그리고 사무등기본 교부>에 따르면, 레닌이 12월 23일 구술한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의 첫 부분(중앙위원회 인원 증가 문제를 주로 다룸)은 이날 포디에바가 스탈린에게 보냈다. 소련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레닌이 12월 29일 이전 구술한 모든 메모는 포디에바가 스탈린과 다른 몇 명의 정치국 위원들에게 알려주었다.

 

심지어 일부 중앙위원들은 12월 29일 전에도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다. 1923년 상반기 이전에 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전체 내용 (1월 4일 구술한 내용을 포함)을 아는 사람은 부할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오르드니키제, 트로츠키뿐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1월 4일자 내용을 알지 못했다. ‘유언장’의 전체 내용은 레닌이 사망한 후에 크루프스카야가 1924년 5월 18일, 즉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대회가 개막되기 며칠 전에 정식으로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바로 정치국 위원과 일부 중앙위원들이 레닌의 ‘유언’ 중 일부 내용을 알게 되었기에, 1923년 2월 말 열린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의 중앙기관 업무를 개편하고 개진하는 것에 관한 요강 중 곧 열릴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정원을 늘리기로 결정했다(기존 27명에서 40명으로 확대). 이 요강은 명의상 레닌의 <우리는 어떻게 노농감찰원을 개편할 것인가>*를 기초로 했지만, 여기서 주로 말하는 바는 중앙위원회 인원수를 늘리는 문제가 아닌 중앙감독위원회를 확대할 필요성에 관해서 였다. 따라서 비록 요강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기록에서 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메모가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는 분명 레닌의 제안에 대한 화답이라 볼 수 있다.

 

* 레닌의 이 차기는 1923년 1월 23일에 구수가 끝난 후 반복적으로 수정하고 삭제한 끝에 1월 25일에 [프라우다]에 발표되었다. 1월 27일 스탈린, 트로츠키, 부하린, 몰로토프, 리코프, 톰스키, 구비설프, 안드레예프는 또 전문적으로 각 성 당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서명했다. 이 글은 레닌의 병상일기 중의 몇페지로서 그가 머리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그가 쓰는것을 허락했다고 말했다.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는 다시 독창적으로 중앙위원회 위원수를 증가하면 중앙위원회가 "필요한 고정성과 견고성"을 잃게 되며, 결국 "중앙위원회 사업의 정확성에 대단히 큰 손해를 입힐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20~30명의 당 평의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중앙위원회에 지시를 내리고 그의 사업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사실상 트로츠키의 주장은 당내에서 '이중 권력','두 개의 중심'을 실행하자는 것이었다. 전원회의는 아무런 토론도 없이 그의 제안을 부결시켰다.

 

1923년 4월에 열린 러시아공산당 제12차 대회에서 스탈린은 <당과 국가 건설 중 민족문제에 관한 보고> 외에도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 보고> 및 <중앙위원회 조직 보고에 관한 결론>을 발표했다. 그는 개인 명의로 중앙위원회 정원을 증가해 원래의 27명에서 적어도 40명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당대회는 중앙위원 40명, 후보 중앙위원 17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하지만 늘어난 중앙위원은 레닌이 권고한 일반 노동자와 농민이 아닌 중앙과 지방 출신 간부들이었다. 

 

대회는 또한 레닌의 의견에 따라 노농감찰원을 개편하여 당과 국가의 감찰기관을 중앙감찰위원회 격인 노농감찰원으로 통합했다. 레닌은 개편된 감찰기관이 강화되길 바랐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로 독립성은 오히려 약화됐다. 당대회에서 채택된 <조직문제에 관하여> 결의에서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 성원만이 중앙위원급에 해당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3 명의 고정대표만이 정치국과 조직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대신 후보중앙위원은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을 겸임할 수 있었으며, 중앙위원회는 발언권이 있는 대표를 파견해서 중앙감찰위원회 전원회의에 참가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

 

러시아공산당 12차 당대회 직후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조직국 위원으로 재선출되었고,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승인받았다. 이때 스탈린은 서기장으로서 이미 레닌이 말한 바대로 "무한한 권력을 장악했다". 이는 당의 일부 주요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중앙 서기국을 개편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1923년 7~8월 사이에 지노비예프, 부하린, 예브도키모프(Yevdokimov), 라셰비치, 보로실로프와 기타 일부 당정 요인들은 코카서스 휴양지인 키슬로보 지크(Kislovo Zick)에서 요양하며 휴가를 보냈다. 한번은 어떤 동굴에 모여 중앙기관의 상태에 대해서 반쯤 비밀리에 논의했다.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은 정치국을 철폐하고 중앙서기처를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중앙 업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지노비예프, 트로츠키를 서기처에 진입시키자고 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 보로실로프만이 반대 의견을 보였다.

 

1923년 7월 29일,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은 연명으로 스탈린과 당시 모스크바에 있어 휴가를 보내지 않고 있던 카메네프에게 편지를 썼다. 마침 모스크바에 가려던 오르제니키제에게 그것을 가져가게 했는데,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이튿날, 지노비예프는 또 카메네프에게 별도의 편지를 써서 키슬로보츠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지도자들과 상의도 없이 스탈린이 반대 노선을 지닌 아훈도프와 이브라지모프를 코카서스 민족사무를 처리하는 중앙특파원으로 임명하고, 부할린 등이 없을 때 자의로 [프라우다] 편집위원회 인원을 교체하고, 흑해해협 협약 체결*을 비준한 것 등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열린 로잔 회의는 흑해해협 협약 체결 문제를 논의했다. 협약 초안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다니르 해협 지역을 비무장화하고 세계 어느 나라의 상선이나 군선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흑해 연안 국가의 처지를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923년 7월 19일 스탈린, 카메네프, 톰스키, 칼리닌, 몰로토프, 루주타크, 라디크, 소콜리니코프가 참석한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는 해협협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에게 편지를 써서 중앙의 이 결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분개하면서 편지에 "이게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니고 무언가. 만약 스탈린이 휴가를 떠났을 때 우리가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와 상의도 없이 새로운 중앙서기처나 민족사무인민위원회부의 부무위원회를 임명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면서 "우리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당이 스탈린의 전제 통치 시기를 겪을 운명이라면 (아마도 매우 짧은 시간일 것이다.)그렇다면 내버려 두라.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덮어두고 싶지 않다.

 

모든 강령에서 '트로이카'*에 대해 언급했지만, 나는 그중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트로이카'는 전혀 없고, 있는 것은 스탈린의 독재뿐이다. 일리치(레닌-주)의 말은 매우 확실하다. 분명히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투쟁 시기를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연구> 1933년 1집 7-8, 10-14쪽)

* '트로이카'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을 가르킨다.

 

8월 3일,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에게 답장을 써서 그들의 처사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것은 그들이 "정말 결렬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러면서 "만약 당신들이 힘을 합쳐 함께 일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러시아의 누군가가 반드시 이 모든 것에 대해 평가할 것이며, 유죄자에 대해 심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편지를 다 쓰고나서 여전히 미진한 것 같아 스탈린은 다시 몇 마디를 덧붙였다.

 

"부언: 당신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한가하고 할 일이 없으면 헛된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현실에 맞지 않는 궁리를 한다, 등등. 그러나 나는 여기서 끝도 없이 일만한다. 마치 사슬에 묶인 개처럼, 매우 고심하면서 말이지. 그러면서도 '죄 있는 사람'이 되고 있다. 누구도 이런 방식으로는 고통이 극에 달할 것이다. 당신들은 매우 배가 부르다, 나의 친구들이여."  (위책, 19-20쪽)

 

레닌의 뒤를 잇는 4명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맨 왼쪽이 스탈린이고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카메네프, 맨 오른쪽이 지노비예프.jpeg
레닌의 뒤를 잇는 4명의 볼셰비키 지도자들. 맨 왼쪽이 스탈린이고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카메네프, 맨 오른쪽이 지노비예프

 

8월 7일, 스탈린은 지노비예프에게 단독으로 편지를 쓰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 둘(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을 가리킴)은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지 않고, 그것을 에워싸고 빙빙 돌려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팀('트로이카'-주)이 확실히 존재하고 최소한의 신뢰가 있다면, 왜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 말 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모르는 일리치가 서기 문제를 언급한 편지를 굳이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내가 결코 지위를 중시하지 않고, 무슨 편지 따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단 말인가?" 스탈린은 서한에서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의 "서기가 독단적으로 문제를 결정한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위책, 21-24쪽)

 

8월 10일,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은 키스로보츠크에서 스탈린에게 답장을 보냈다.

 

"일리치의 편지, 그렇소, 일리치의 편지가 있소. 그는 편지에서 (제12차 당대회에 보내는) 당신을 서기로 뽑지 말라고 건의했소. 우리 (부하린, 카메네프 그리고 나)는 잠시 당신에게 이 편지를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했소. 그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소: 당신은 일리치와의 불일치에 대해 대단히 편견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짜증나게 하고 싶지 않았소."

 

그들 두 사람은 편지에서 스탈린의 해명에 대해서 일일이 반박했다. 문제는 이미 매우 첨예하게 제기된 것 같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리치가 없다는 점이오. 따라서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험악한 뜻은 제쳐두고) 중앙서기처가 이미 어떠한 성의 당위원회 서기처도 하고 있는 그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요. 즉 그것은 사실상 (형식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오...지금의 제도하에서는, '소조'가 진정으로 존재해야 하고(허깨비가 아니라), 평등하게 협력하고 책임 지는 것은 불가능하오."라고 말했다. (위책, 25-28쪽)

 

8월 15일, 스탈린도 키스로와츠크에 휴가를 와서 그들 간의 토론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쌍방은 의견일치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휴가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스탈린의 조언에 따라 조직국에 지노비예프, 트로츠키, 부하린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9월 25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지노비예프, 트로츠키를 조직국 위원으로 선출하고, 부하린과 코스트코프를 조직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국의 업무에 익숙치 않아 사실상 조직국의 어떤 회의에도 참석치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조직국에 진입시킨 것은 단순히 타협일 뿐이었다. 스탈린의 지위는 약화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에 따른 일정한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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