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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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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트로츠키

 

레닌이 병때문에 일을 볼 수 없게 되고, 또 그가 서거한 후에 스탈린은 점차 당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스탈린을 위시한 중앙위원회 다수파와 이견이 생기기 전에 지노비예프와 스탈린 및 러시아공산당 다른 지도자들의 코민테른에서 입장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1924년 6~7월, 지노비예프는 러시아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볼셰비키화의 방침을 제기하였다. 즉 러시아공산당의 경험을 코민테른에 활용한 것인데, 동시에 각 나라의 구체적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점에 관해서 스탈린도 동의했다.


이와 함께 지노비예프를 지도자로 하는 코민테른을 러시아공산당이 이끄는 '국제중심지'로 변모시킴으로써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권력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가 개정한 <코민테른 규약>은 조문에서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와함께  집행위원회는 각 당의 주요 활동을 '감독·심사'할 권리가 있다, 각 당의 당대회 및 지도기관의 결의를 '취소·개정'할 수 있다, 각 당의 모든 활동에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스탈린도 코민테른이 회원국에 대한 지도와 개입권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25년 3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5차 확대총회에서 "코민테른의 권리와 각국의 당 문제에 대한 개입에 대해 일부 동지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권리 축소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비록 각 당은 내부 자치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코민테른의 영도권을 부인하고 개입권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공산주의 적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탈린 전집 제7권, 57-58쪽)


그러나 당내 투쟁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 스탈린은 각 당의 볼셰비키화를 강조하는 각도에서 다시 변화가 생겼다. '사회민주주의 잔재 숙청', '기회주의자 고립'을 각 당의 볼셰비키화의 중요한 내용으로 간주하였으며, "우파  우두머리의 위신을 훼손하고 새로운 혁명 지도자를 발탁하는 것"을 볼셰비키화를 실현하는 주요한 경로로 여겼다.(스탈린전집 제6권, 254쪽) 그는 '트로츠키주의'를 '공산주의 운동의 우익'이라고 부르며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스탈린 전집 제7권, 54쪽)

 

실제로 지노비예프도 이런 면에서는 크게 뒤지지 않았다. 그가 주재한 코민테른 ‘제5차 대회’는 트로츠키 반대파를 엄중하게 비판하고 폴란드, 프랑스, 독일 당내 일각의 반대파 지지 성향을 러시아공산당 내의 트로츠키 반대파처럼 '당내 우경 기회주의'의 표현이라고 비난했다. 또 트로츠키를 지지하고 프랑스어로 트로츠키의 <새로운 방침>이라는 책을 출판한 프랑스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이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위원인 보 수바린을 프랑스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제명하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소련 당내 투쟁의 요소를 코민테른까지 확대한 것인데, 그후 스탈린이 부할린에 반대하는 투쟁과 대숙청에서 한 일은 더욱 그러하였다.

 

이리하여 소련공산당은 각 당의 볼셰비키화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내 여러 가지 이유로 이견이 있는 지도자들을 숙청하고 코민테른에서 제명하였으며, 모스크바의 명령에 복종하고 독립과 자주를 고집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지도자를 발탁했다. 통계에 따르면 볼셰비키화 과정에서 50여 명의 공산당 지도자가 교체되었으며, 적임자라고 판단되는 인물을 모스크바가 선정해서 당 지도자로 앉힌 것으로 집계됐다. 일부 당에서는 '볼셰비키화 된' 간부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 예컨대 루마니아는 오랫동안 공산당이 외국인을 당 총서기로 임명했다.

 

이것은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소련의 경험을 신성화 • 교조화하고  오랫동안 국제 공산주의운동에서 하나의 당의 모델에 따라 당을 개조토록 하였다. 동시에 모든 당은 소련공산당 정책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기에 모든 당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초반, 코민테른은 왕밍(王明)을 통해 중국공산당을 볼셰비키화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여 중국혁명을 거의 막다른 골목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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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밍(王明, 왼쪽에서 다섯번째)


‘신반대파’ 투쟁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는 일련의 문제에서 매우 격렬한 논쟁을 전개했다. 예컨대 '일국 사회주의 문제'에서 지노비예프 등은 한 나라만으로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은 그것을 부적절하게 격상시켜, 소련 한 나라 사회주의 이익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다른 나라의 이익보다 우선시하였다. 다른 나라 당이 소련의 필요에 맞춰 자신들의 활동을 배치하고 희생을 감수하며, 소련의 사회주의를 최대한 지지하고 그 정책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일국 사회주의’를 소련의 편협한 민족적 이기주의로 변질시켰으며, 코민테른에서 그 중심적 지위를 강화시켰음을 의미한다.


지노비예프가 코민테른의 지도적 직무를 담당할 때 그는 레닌과 스탈린의 코민테른에 관한 노선과 기본적으로 일치하였다. 그렇기에 지노비예프의 해임은 코민테른에서 그가 일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련공산당 10월 전원회의는 비록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주요 인물들을 당 최고 지도부에서 축출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중앙위원으로 남아 있어 스탈린 등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26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계속 비난을 받았다. 스탈린은 <우리 당내의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이들의 동맹을 '원칙 없는 연합' '기회주의적 연합'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을  '일부 거세된 자들의 역량'이라고 조롱했는데,  이는 그들의 삶이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제15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은 각각 발언했다.  트로츠키의 발언은 시간이 길면서 태도가 강경하였다.  자신의 공적을 낱낱이 들추면서 자신을 극력 변호했지만, 그의 발언은 수시로 조소와 비웃음에 의해 중단되었다. 지노비예프는 마음이 좀 두려운 듯 중앙위원회에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며 중앙과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질의와 조소를 받았다. 그들의 발언은 설득력이 없었다. 언변에 능한 것으로 유명한 트로츠키도 자신의 장황한 발언을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견해에 강요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자신들의 머리에 씌워진 눈부신 후광은 이제 빛을 잃은 것으로 보였으며, 당과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는 공론가와 무책임한 저술가로만 비춰졌다.


이 순간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일부 사람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중앙위원회를 지지하면서 다시는 파벌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크루프스카야도 한때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일원이었는데, 이 때문에 스탈린은 그녀를 ‘분열분자’라고 싫어했다. "우리가 당 통합을 유지하려면 분열분자인 그녀를 타격해야 한다."[#주석]고 말했다. 이제 크루프스카야는 반대파가 "너무 멀리 갔다"면서, "동지적 비판을 파벌적 활동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이탈을 선언했다. 이는 분명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에 커다란 타격이었다.

 

1926년 12월 7일 스탈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연설했다.jpg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연설하는 스탈린(1926.12.7)


 

1926년 12월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체회의에서 연설했다.jpg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트로츠키(1926.12)

 

1927년 봄은 소련에게는 다사다난한 가을과 같았다. 영국 정부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을 끌어들여 소련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반소 통일전선을 획책했다. 런던, 바르샤바, 베를린,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소련 대사관이나 상무 대리처가 습격받는 사건이 잇따랐다. 바르샤바 주재 소련 대사인 보이코프가 폴란드계 백인 괴한에게 암살당했으며, 영국은 소련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장졔스는 4·12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 노동자와 중국 공산당원을 대량 학살한 데 이어서, 우한에서 7·15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의 힘찬 대혁명을 실패로 돌아가게끔 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코민테른의 일부 지도자(스탈린 포함)들은 국민당뿐만 아니라 장졔스 본인에게 아주 큰 희망과 신임을 걸었다. 그들은 국민당이 중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끝까지 추진할 수 있는 조직이라고 믿었으며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으로 구성된 '4계급 연합'이라고 인식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국민당을 ‘동정당(同情党)’의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받아들였는데,  이 때문에 장졔스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의 명예위원이 됐다.


중국에서 장졔스의 4·12 쿠데타가 일어나자,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은 기회를 틈타 중국혁명에 관한 탄원서와 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하였다. 이와 함께 스탈린과 부하린 등의 중국혁명 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고, 중국혁명이 좌절된 데 대한 개인적 책임을 묻는 연설을 했다. 트로츠키는 한발 더 나아가 "중국 혁명의 4월 실패는 기회주의 노선의 실패일 뿐 아니라, 관료주의 지도방식의 실패이기도 하다.”라고 공격했다. 이 같은 트로츠키ㅡ지노비예프 동맹의 공격으로 인해 스탈린, 부하린 등이 한때 난처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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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12 쿠테타로 수많은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이 처형됐다


스탈린은 1927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8차 전원회의에서 중국문제가 논의되자 트로츠키 등의 공격에 이렇게 대응했다.

 

나는 가능한 한 개인적 요소는 논쟁에서 배제하겠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의 개별 위원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자신을 영웅시하고 전쟁 위험, 중국혁명 등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트로츠키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트로츠키에 대해 그렇듯 큰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누군가 "맞습니다!”) 더군다나 영웅이라기보다는 배우같은데, 배우와 영웅을 혼동해선 안 된다.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처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확대 전원회의에서 자신들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이 들통난 사람들이 볼셰비키를 호되게 꾸짖는 것은 부하린이나 스탈린에 대한 모욕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반대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형(型)의 半멘셰비키가 나를 칭찬하고 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큰 모욕이 될 것이다. *

 

*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 (1926년 9월 16일)", <스탈린연구> 1994년 제3집, 21쪽.

 

바로 이달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예브도키모프, 스미르가는 공동으로 <성명>을 작성해 83명의 서명을 받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레닌주의 좌파’라고 칭하면서, "우리 당의 총체적 정책은 우경화 방침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라고 주장했다. 국제적으로 중국혁명이 실패한 것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코민테른을 통해서 국민당 비판 금지, 파업 금지, 노동자 무장화 금지, 농민동원 금지라는 잘못된 노선을 집행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26년 5월 영국의 총파업이 실패한 것은 당 중앙이 영국-러시아 위원회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정책을 실행하고, 영국산업연맹 총위원회의 반역자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정책에 있어 당 중앙은 농촌의 계급분화와 부농, 네프만 분자, 관료 분자의 성장을 무시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부농 등-주)강한 농민에게 의존하면서 빈농을 무시하였다고 했다. 대공업을 신속히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노동생산성 향상에 따른 임금 인상을 수행하지 않고 공산품의 가격을 낮추지 않아 노동자 생활을 빈곤하게 만들고, 실업 현상을 심각하게 했다고 공격했다. 당내 민주주의를 말살시켰으며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관료 기구가 '좌파'를 향해 발포했지만, 진정한 우파 계급의 위험에는 큰 편의를 제공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제15차 당대회 개최 두 달 전 각 파벌이 자신의 테제(요강)를 발표하고, 전당적으로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이  <83인 성명>은 이후 3000명 가까운 서명을 받았지만,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발표되지 않았다.


<83인 성명>에 이어서 트로츠키ㅡ지노비예프 동맹과 연계된 사프론노프ㅡ스미르노프 그룹이 <15인 정강>을 발표했다. 이 강령은 더욱 격렬하게 중앙의 관점에 대한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을 뿐 아니라, 파업과 무장봉기가 조직될 때까지 당내에서 광범위한 합법적 정치투쟁을 벌일 것을 강조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에 사프론노프-스미르노프 그룹과 선 긋기를 요구했는데,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6월 중앙위원회는 스미르가(중앙위원)를 극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것은 처벌 성격을 띤 업무 이동이었다. 처음에 스미르가는 가기를 거절했지만, 결국 중앙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출발할 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그리고 수백 명의 군중이 배웅하기 위해 야로슬라프 역으로 갔다. 트로츠키는 역에서 즉흥 연설을 하며 당 중앙 정책을 공격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를 당 중앙에 대한 정치적 시위라고 간주하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의 파벌 활동을 중앙감찰위원회에 회부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6월 하순 열린 중앙감찰위원회 의장단 회의에서 어떤이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주요 인물들은 중앙위원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문서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 자리에서  만약 스미르가가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극동으로 전출됐다면, 우리의 집단 배웅을 중앙위원회에 대한 반대 시위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대파들이 "스탈린정권을 계속해서 비판해야 한다"면서 직접 스탈린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공격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당이 ‘테르미도르화’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면서, 또 이른바 '클레망소식 실험'을 한다고도 말했다. 클레망소(1841~1929)는 프랑스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부르주아 정치가로 프랑스 내무장관, 육군장관, 총리 등을 역임해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이 파리에서 불과 80km 떨어진 곳에 쳐들어왔을 때, 그는 반대파를 지도하여 당시의 프랑스정부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끝에 내각을 교체하고 자신이 집권해 총리가 됐다. 트로츠키가 이때 클레망소를 언급한 것은 소련에서 비슷한 방법을 재현하여 현 지도자를 교체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테르미도르화ㅡ ‘테르미도르 반동’ 은 프랑스대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파 쟈코뱅당을 몰락시킨 온건파에 의한 반혁명 쿠테타를 말한다. 트로츠키가 여기서  '테르미도르화'를 언급한 것은 볼셰비키당의 우경화를 비난한 것이다.

 

노동자 국가의 승리를 위해, 어떤 사람이 무지몽매하고 양심도 없는 거짓된 사람들의 정치노선을 쓰레기처럼 쓸어버리고자 한다면, 그는 결코 ‘패배주의자’가 아니다. 반대로, 이런 구체적 조건에서 그는 혁명 방어의 진정한 대표이다. 왜냐하면 사상적 쓰레기는 승리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메드베테프, <역사를 심판하라>, 100쪽)

 

트로츠키의 이 말은 스탈린 등을 매우 분개시켰다. 몰로토프는 반대파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반군'이라고 비난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영국의 쳄벌린과 통일전선을 결성해 소련과 소련공산당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27년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소집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스탈린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을 향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테르미도르화'에 대한 터무니없는 말과 '클레망소식 실험'이라는 터무니없는 구호를 포기할 것.
(2) 코민테른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포기하고, 코민테른에서 제명된 마슬로프-루트피셔 분열주의 집단과의 모든 연계를 끊고, 코민테른의 모든 결정을 집행할 것.
(3) 소련공산당을 분열시키고 파벌 활동을 하는 모든 정책을 포기하고, 제2당을 건립하거나 소련공산당에 신당을 건립하는 모든 수단을 포기하며,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모든 결정의 집행을 보장할 것.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 당 중앙위원회에 계속 머무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스탈린전집> 제10권, 76-77쪽)


그러나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주요 인물들은 즉각 수용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카메네프는 심지어 정세의 발전이 제2당을 세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시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 같은 압력에 못이겨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13인은 연명으로 <반대파성명>을 발표하여 세가지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대파의 이  같은 성명을 참작하여 스탈린 등은 전원회의에서 그들 두 사람을 제명한다는 결정을 취소하고, 그들에게 엄중 경고 처분만 내리는 선에서 그 결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른 한편 전당에는 이 성명을 "당내에 필요한 평화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증거"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며 경각심을 일깨웠다.(<소련공산당대회, 대표회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의 모음집>, 제3분책, 309쪽)


이번 전원회의는 또한 1927년 12월에 제15차 당대회를 소집키로 결정했다. 그러자 트로츠키ㅡ지노비예프 동맹은 이 기회를 이용해 9월 3일 당 중앙에 <반대파 강령>을 제기했다. 당내 생활에서 논쟁이 있는 모든 문제는 결의가 통과되기 전에 당내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당규약이 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관점을 마음껏 펼치려고 했다. <강령>은 수만 자에 이르렀는데, 총 12장으로 나누어 국내외 정세, 특히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 공업과 농업 방침, 경제 사업, 민족문제, 당과 소비에트 건설, 군대 건설 등의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ㅡ지노비예프 동맹의 견해를 전면 서술했다.

 

좌파 야당의 지도자. 첫 번째 줄 왼쪽 Leon Serebryakov, Radek, Trotsky, M. Boguslavsky, Preobrazhensky, 두 번째 줄 왼쪽 Rakov Sky, Ya Drobnis, Ya.jpg
좌파 반대파 지도자. 첫 번째 줄 왼쪽부터: 레 셰레브리아코프, 라디크, 트로츠키, 미 보구슬라프스키, 프레오브라임스키; 두 번째 줄 왼쪽부터: 라코프스키, 야 드롭니스, 야 벨로보로도프, 레 소스노프스키.

 

내용으로 볼때, 이 강령 역시 앞서 <13인 성명>과 <83인 성명>의 관점을 재천명했을 뿐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중앙의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한다고 밝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기되었기에 문제가 있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파벌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중앙과 분열을 일으키는 정책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제거'할 때가 된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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