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3.30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코요아칸에 있는 트로츠키 박물관. 박물관은 프리다 칼로의 집이자 프리다 칼로 박물관인 ',카사 아술',으로부터 불과 몇 블럭 거리에 있던 트로츠키의 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왼쪽부터 트.png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코요아칸에 있는 트로츠키 박물관.  왼쪽부터 트로츠키,  그의 아내 나탈리아, 디에고 리베라(사진 맨 아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그들의 강령을 공포하여 전당이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당 중앙은 이 강령을 받은 후, 그것은 반당적인 강령이라고 간주하고 공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나중에 발표 거부와 관련하여 중앙이 이 강령 발표를 반대한 이유로 다음 3가지를 들었다. (1)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의 파벌조직을 합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럴 권리도 없다. (2) 만약 중앙에서 반대파의 정강을 발표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해산하기는커녕 오히려 파벌과 집단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 (3) 반대파 정강에는 당에 대한 모독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모독이 발표되면 당과 국가에 무한한 손해를 가져다주게 된다. (<스탈린 전집> 제10권, 155-156쪽)


당 중앙이 '반대파 강령' 발표를 거부하자 트로츠키의 옹호자였던 믈라치코프스키가 이끄는 인쇄소에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이 직접 인쇄했다. 며칠 뒤 게페우*는 '프랑겔 장교'*를 고용했다는 이유로 이 인쇄소를 차압하고 직원 몇 명을 체포했다(나중에 이 '프랑겔 장교'가 실제로 게페우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믈라치코프스키(Mrachkovsky)와 그의 측근들은 즉시 당에서 제명되었다.

 

*게페우(GPU)ㅡ체카(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는 내전이 끝난 1922년 러시아  내무인민위원부에 소속된 국가정치국(ГПУ: 게페우)으로 개편되었다

*프랑겔ㅡ내전과 외국 무장간섭 시기 백위군 우두머리 중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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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겔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ensky)와 세레브라코프(Serebryakov) 등은 당 중앙에 편지를 보내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며,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면서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지노비예프도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 중앙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오브라진스키와 세레브라코프를 출당시키기로 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들과 함께 모스크바 국영 인쇄소 경영자도 쫓겨났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인쇄소에서 반대파 문헌을 인쇄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코민테른 내부에서도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에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7년 9월 27일,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10월 21~23일, 소련공산당은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가 연석한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 전원회의는 주로 ‘15차 당대회’의 의사일정,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반대파 문제의 해결에 관해 토론하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회의장에서는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고, 중앙위원회가 레닌의 '유언'을 숨기고 레닌의 뜻을 집행할 의지가 없다는 뜻의 메모를 회의 의장단에 전했다.


승리를 거머쥔 스탈린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 반대파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트로츠키 반대파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1904년 이후 트로츠키의 모든 죄를 관습적으로 회고했다. 스탈린은 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에 대해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으며 거듭 증명되었다.  누구도 숨긴 것이 없다. 레닌의 '유언'은 13차 당대회에 보낸 것이고, 이 ‘유언’은 이미 당대회에서 낭독됐다. 당대회는 만장일치로 그것을 공표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 이유 중 하나가 레닌 본인이 원하지 않았고 발표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듯 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는 13차 당대회 대표단에서만 낭독되고 전체 대표자회의(당대회)에서는 낭독되지 않았다. 총회가 편지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도 사실은 당시 정치국의 트로이카(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결정이었다. 이어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1925년 7월에 쓴 <이스트먼의 ‘레닌 사후’에 관하여>라는 논평 기사를 인용하면서, 트로츠키가 스스로 자기 뺨을 때리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쓴 것은 트로츠키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무엇을 근거로 당과 중앙이 레닌의 유언장을 '숨겼다'고 우길 것인가?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분수를 알아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스탈린의 '난폭함' 때문에 레닌 동지가  '유언'에서 다른 동지가 스탈린의 총서기 자리를 대신하는 문제를 당대회가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고 말한다. 매우 좋다. 그렇다, 동지들, 나는 당을 난폭하고 음흉하게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사람들에 대해 난폭하게 대한다. 이 점은, 나는 예나 지금이나 숨긴 적이 없다. 아마도 분열 분자를 대하는데 있어 어떤 온화한 태도를 가져야 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주목할 것은, 유언에는 스탈린의 잘못을 암시하는 글자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스탈린이 거칠다고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폭함이 스탈린의 정치 노선이나 관점에서의 결점일 수는 없다."(<스타린전집>제10권, 149-153쪽)

 

스탈린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반박했다. 


"반대파는 개인적 요인, 예를 들어 스탈린의 난폭함, 부하린과 리코프의 고집 등으로 자신의 실패 원인을 '설명'하려 한다. 이는 얼마나 값싼 설명인가! 이것은 무당이나 하는 허튼소리이지 해석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1904년부터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왔다. 트로츠키는 1904년부터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멘셰비키 주위를 맴돌며 레닌이 이끄는 당에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이 시기 레닌의 당은 트로츠키를 일련의 패배로 몰아넣었다. 왜? 이 또한 스탈린의 난폭함 탓인가? 그런데 스탈린은 그때 아직 중앙위원회 서기가 아니었다……이것이 스탈린의 난폭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트로츠키는 일찍이 멘셰비키인 악셀로드에게 바친 책 <우리의 정치적 임무>에서 “친애하는 스승 파벨 폴리소비치 악셀로드에게 바친다.”라고 적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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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폴리소비치 악셀로드

 

스탈린은 이를 포착하고 연설에서 마지막으로 "그래, 이왕이면 '친애하는 선생님 파벨 폴리소비치 악셀로드'에게로 가라! 꺼져라! 하지만 빨리 꺼져라. 존경할 만한 트로츠키, '파벨 폴리소비치'는 이미 노쇠해서 곧 죽을 수도 있다. 그때는 '선생님'을 만날 겨를이 없을 것이다." (<스탈린전집>제10권, 167~177쪽)

 

전원회의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고 그들에 관한 자료를 제15차 당대회에 제출하여 심사키로 결정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회원들은 이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전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트로츠키는"조타륜(배의 키-주)을 붙들고 계속 전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 중앙을 공격하는가 하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지에서 반공개·반비밀 집회를 조직하여 중앙과 맞서기 위한 실제 행동에 들어갔다. 트로츠키 자신에 따르면 그는 하루에도 두세 번, 때로는 네 번이나 이런 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1927년 11월 4일, 그들은 모스크바 고등기술대학에서 2천명이상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트로츠키와 카메네프는 여기서 약 2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


10월 혁명 10주년을 맞아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성대한 퍼레이드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11월 7일, 반대파는 자신들의 플랭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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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10주년 기념행사에서 소련의 지도자들이 붉은 광장의 관람대에 서있다. 왼쪽부터 구비셰프, 칼리닌, 스탈린, 오르드니키제

 

모스크바에서 반대파는 모스크바의 높은 건물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의 초상화를 내걸고 초상화 아래에는 "세계혁명지도자"라는 글자를 썼다. 시위대는 "총구를 오른쪽으로 돌려라ㅡ 부농 반대, 네프만 반대, 관료 반대","레닌의 유언을 단호히 집행하라","기회주의 반대, 분열 반대ㅡ 레닌당의 단결을 수호하자"등의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갔다.  군중들 사이에서"트로츠키 만세!" "지노비예프 만세!"라는 구호 소리가 수시로 울렸다.

 

트로츠키, 카메네프, 스미르가, 플레오브라진스키가 시위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반대파가 시위할 때 그들의 피켓은 빼앗겨 갈가리 찢겼으며 피켓을 멘 사람들은 심한 구타를 당했다. "한 경찰은 공포탄을 쏘는 척하면서 공공연히 내 차를 향해 발포했다.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 목표를 가리켰다.술에 취한 한 소방관은 더러운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으며 내 차의 페달에 뛰어올라 유리창을 깼다"라고 말했다.* 띄엄띄엄 이어진 이 대열은 곧 공식 퍼레이드에서 사라졌다.

 

* <트로츠키 자서전>, 국제문화출판사 1996년판, 4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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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개인 상업을 없애라! " 등의 구호를 내걸며 행진하고 있다(1927년)

 

지노비예프, 라딕은 특별히 레닌그라드에서 시위대를 이끌었지만 참가한 사람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 한 반대파 요원은 "우리 행진에 참가하는 인원이 너무 적다. 여러분은 아내와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모시고 가도록 하라. 아내가 없으면 애인을 데리고 가라"고 말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그들의 행진 역시 마찬가지로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반대파가 길거리로 나와 공개적으로 시위를 조직하자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들은 이득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욱 수동적이게 되었다. 11월 1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키로 결정했다. 카메네프, 스미르가, 예브도키모프 등은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11월 16일, 소련의 저명한 외교가이자 트로츠키의 친한 친구인 위페가 자살했다. 위페는 자살하기 전에 트로츠키에게 유서를 써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트로츠키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은 이 기회를 이용해 다시 한번 노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다. 위페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많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각각 장례식에서 연설을 했다. 누군가가 대열에 선 병사를 향해 전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인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우라(만세)!"라고 외치자고 호소했을 때, 병사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마침내 자신의 시대가 지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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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전의 위페

 

당에서 제명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트로츠키에게 자신들과 함께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인정하자고 권유했다. 트로츠키는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투쟁할 의지를 밝혔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그리고 그 옹호자들은 단독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파벌 활동과 제2당의 설립을 초래할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도 포기하겠다는 뜻을 표시했지만, 당 중앙은 이 성명을 거부했다.


1927년 12월 2일~19일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를 소집하고 주재하였다. 대회 의사일정은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 중앙검사위원회의 총결보고, 중앙감찰위원회-노농감찰원의 총결보고, 코민테른 주재 당 대표단 총결보고, 국민경제발전 5개년계획 제정에 관한 지시, 농촌사업, 중앙기관의 선거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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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소련공산당 15차 당대회에서 그루지야 대표단과 함께 있다. 앞줄 왼쪽부터 샤 주 엘리아바, 스탈린, 미츠하카야, 보로실로프

 

스탈린은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보고를 했다. 스탈린은 보고에서 소련의 일국사회주의 건설 관점을 다시 논증했다. 소련의 공업은 발전 속도로 볼 때 이미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고 추월했으며, 소련은 공업국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유 공업은 마땅히  또한 반드시 발전을 가속해야 한다"는 것이 당의 임무라면서, "이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고 추월하는 데 필요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공업과 비교할 때 농업의 발전 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 농업의 출로는 어디인가?  "출로는 분산된 소농을 공공경작제에 기초한 연합한 대농장으로, 고도의 신기술에 기초한 집단경작제로 전환하는 데 있다…… 다른 출로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농촌에서 당의 당면 임무는 "분산된 농가를 점차 연합된 대농장의 궤도로 전환시키고, 집약경작과 농업기계화를 기초로한 공공집체경작제 궤도로 전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발전 노선은 농업 발전 속도를 가속화하며, 농촌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스탈린전집> 제10권, 257-265쪽)

 

스탈린은 보고에서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기본적인 이견을 다음 일곱 가지 측면에서 요약했다: (1) 소련의 사회주의 승리 건설 가능성에 관한 문제; (2)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 문제; (3) 노동자계급과 중농의 동맹에 관한 문제; (4) 소련 혁명의 성격에 관한 문제; (5) 식민지 혁명을 이끄는 레닌의 방침에 관한 문제; (6) 세계노동운동 중의 통일전선 전략에 관한 문제 (7) 레닌식의 당성,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내부의 레닌식의 통일문제. 

 

스탈린은 "반대파는 이 모든 문제에서 멘셰비키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반대파는 고립되었는데, 이는 "반대파 지도집단이 원래 실생활에서 이탈하고, 혁명과 당에서 이탈하고, 노동자계급에서 이탈한 소부르주아계급 지식인들로 구성된 때문이다."라고 했다. (<스탈린전집>제10권, 288-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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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15차 당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하는 스탈린

 

대회는 농업집단화에 총력을 기울일 데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현 시기에 개인소농경제를 연합하여 대규모 집체경제로 개조하는 임무를 농촌에서의 당의 기본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이행은 농민의 동의하에서만 진행할 수 있으며, 진일보한 합작화의 기초에서 진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절박한 임무는 농민에게 점차 대규모로 이행하는 공유화 농업경제의 좋은 점과 필요성을 널리 선전하고, 여러 가지 실제적 방법으로 농촌에서 현저하게 성장하고 있는 대규모 집체경제 성분을 권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회는 또한  국민경제 5개년 계획 수립에 관한 지침도 통과시켰다.

 

*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의 집성>제3분책, 402쪽.


그후 대회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 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하였다.


스탈린 노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 반대파를 강력히 규탄하고, 중앙위원회에 강경한 조치를 취해 그들을 당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했다. 반대파 대표인 예브도키모프는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이번 대회에서 노동자들이 우리를 당에서 제명하라고 요구한다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옹호했다. "노동자중에서 당의 지도자인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가 노동자계급당과 소비에트 정권의 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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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중앙), 리코프 (왼쪽에서 첫번째), 부할린 (오른쪽에서 첫번째) 이 함께하고 있다 (1927년 12월)

 

카메네프는 아직 당내에 남아 있었기에, 당 대회에서 발언이 허용됐다. 그는 자신이 발언한 목적 중 하나는 "반대파와 당이 화해하는 길을 찾는 것"이라면서, '제2의 당'을 만드는 길로 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발언할 때 어쩔 수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들이 "당에 완전하고 철저하게 복종"하는 길밖에 달리 없다고 했다.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설령 우리에게는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라도, 당대회의 모든 결정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분명히 반대파의 올바름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는 반대파의 "많은 문제에 관한 관점은 이미 생활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당은 많은 경우 이러한 관점을 정도가 다르지만 채택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카메네프의 발언이 다른 반대파들과 비교할 때 "가장 터무니없고, 가장 위선적이며, 가장 교활하고, 가장 거짓스런 발언"이라면서 못마땅해 했다. 그는 반대파가 "당에서 스스로 자멸하는 것은 두려울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으며, 이상할 것도 없다"고 총결했다. 역사의 전환기에 항상 일부는 당의 수레에서 떨어져, 새로운 인물에게 양보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파는 사상적으로만이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완전하고 철저히 무장을 해제시켜야 한다." 이제 "반대파의 종말이 왔다."*고 선언했다.

 

* <스탈린전집>제10권, 307-318쪽;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 속기록>제1권, 90쪽.


대회는 11월 14일 연석회의에서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제명하는 결정을 비준했다. 또 카메네프, 예브도키모프, 라셰비치, 스미르가, 피다코프, 라디크 등 반대파 활동가 75명과 사프로노프그룹 23명을 제명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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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15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정치국원들: 1열 왼쪽부터 부하린, 보로실로프, 톰스키, 2열 왼쪽부터 리코프, 스탈린, 칼리닌, 3열 왼쪽부터 루주타크, 쿠비셰프, 몰로토프.

 

1928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예브도키모프 등은 참회를 표시한 후 당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그 일부 지지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여러 차례 트로츠키에게 "레프 다비도비치, 우리는 이제 패배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1928년 1월, 그는 알마티로 유배됐다. 출발해야 하는 당일, 그는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집행하러 온 게페우 요원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게페우 요원은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트로츠키에게 가죽옷을 입혔다. 모자를 씌운 뒤 강제로 차에 떠밀어 기차역까지 데려간 후, 알마티로 가는 차에 태워서 떠나게 했다.

 

그는 알마티에 도착 뒤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집필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과도 자주 연락했다. 1929년 1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에는 소련 국적을 박탈했다. 그는 터키 프린키보 섬으로 처음 망명해서 <반대파 공보>를 출판했다. 이어서  <나의 생애> <영구혁명> <러시아 혁명사> <배신당한 혁명> 등 저서를 썼다. 1936년 12월 마침내 멕시코에 정착한 후 제4 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숙소에서 자객에게 습격받아 이튿날 사망하였다.

 

스탈린에게서 추방당해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오른쪽 두번째)와 멕시코의 아이콘 프리다 칼로(오른쪽 세번째), 그리고 트로츠키의 아내 나칼리아 세도바(맨 왼쪽).jpeg
스탈린에게서 추방당해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오른쪽 두번째)와 멕시코의 아이콘 프리다 칼로(오른쪽 세번째), 그리고 트로츠키의 아내 나칼리아 세도바(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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