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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용하던 버스 정류장에 못 보던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다거나, 횡단보도를 지나는 어떤 사람에게 날개가 달렸다면 이목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낯설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개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낯선 것은 새롭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익숙한 것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 빅토르 시클롭스키가 개념화한 예술적 기법으로 ‘낯설게하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시문학에서는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표현한 사례가 풍부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시인은 이를 낯설게 표현하고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탈쟈의 손수건, 바람에 나부끼는 순정, 백로처럼 날개를 편 애수,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등이 모두 깃발의 다른 표현들이다. 이 시는 1936년에 발표되었는데 80년을 훌쩍 넘기도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자주 인용된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흔한 표현이었다면 관심이 덜했을 것이다.

 

김광균 시인은 낙엽을 일컬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길을 일컬어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추일서정」). 80년이 더 지난 지금 보아도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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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시인은 새로 돋아나는 잎을 보고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터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강철 새잎」)이라고 읊었다.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애송되고 있는 것은 뻔한 것(새잎)을 낯설게 보는(강철) 점이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일일이 다 낯설게 보고 낯설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낯설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가 되지 않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같은 대상이라도 새롭고 낯설다면 아무래도 거기에 눈길이 가게 마련이고 더 오래 기억되게 마련이다. 낯설게 한 표현은 독자에게는 그만큼 높은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작가라면 노력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보여 주려면 내가 먼저 낯설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남들이 보는 대로 보지 말고 순전히 나만의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늘 마주하는 것들도 새로운 눈으로 보면 느낌과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해, 달, 별, 바다와 같은 자연환경도 그렇고 버스, 가로수, 도로와 같은 주변 환경도 그렇고, 밥그릇, 수저, 찻잔과 같은 식생활 용품도 그렇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새롭고 실감 나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기형도, 「엄마 걱정」)에는 해가 시들었다는 낯선 표현이 나온다. 해를 식물처럼 묘사한 점이 기발하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더 간절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절묘한 표현이다.

 

때로는 현미경적 시각으로 미세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망원경적 시각으로 먼 것을 당겨서 바라본다. ‘손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숲 속을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박후식, 「손금」)에서는 현미경적 시선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잠든 사이/ 얼마나 많은 별들이 어둠을 긁고 있었는지’(지창영, 「긁음에 대하여」)에는 망원경적 시각이 나타나 있다.

 

때로는 주객을 전도시켜 대상의 역할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무심코 사용하는 신발도 낯설게 보면 사뭇 다른 모습이 보인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마경덕, 「신발론」)에서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신발이 주인으로 그려져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쁜 일상에 끌려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표현이다.

 

낯설게 보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대상을 거꾸로 보기도 하고 뒷면이나 옆면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해해 보기도 한다. 대상에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이나 개념을 대입해 보기도 하고 시공간적으로 다른 곳에 두어 보기도 한다.

 

낯설게 보는 일은 대상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물이나 환경뿐만 아니라 사람도 낯설게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참모습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가 지닌 가치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자신 또한 낯설게 보면 색다른 면모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새롭게 보인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들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고 했다. 낯설게 볼 때 가능한 일이다. 

 

시를 쓰지 않더라도 낯설게 보는 연습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낯설게 보기를 통하여 발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매사가 흥미로워지고 시간이 의미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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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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