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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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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지시를 맹종하다가 중국혁명에 큰 피해를 입힌 왕명  (오른쪽 세번째)

 

ㅡ 소문과 진실

 

스탈린과 부할린이 소련공산당 내에서 국내 식량위기와 경제정책에 대한 논쟁을 격렬하게 전개할 때, 마침 코민테른 제6차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부할린은 1926년 지노비예프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직에서 해임될 때부터 줄곧 코민테른 정치서기처 서기를 맡아 국제 업무를 주관했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부할린은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관한 요강 초안을 기초할 것을 위임받았다.


부하린은 곧 요강 초안을 완성하여 1928년 7월 14일 코민테른 주재 소련공산당 대표단에게 전달하여 대회 개막 전에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 부하린, 리코프, 몰로토프, 로조프스키, 마누일스키, 피아트니츠키는 16일 코민테른 주재 소련공산당 대표단의 요강 초안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에 참여했다.  회의는 “요강을 채택한다.  회의에서 제기된 의견에 따라 수정을 한다”라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 개막일인 17일 소련공산당 대표단회의는 다시 "7월 18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소련공산당을 대표하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들은 국제정세와 코민테른의 임무에 관한 부하린의 요강을 대표자회에서 통과할 요강의 기초로 삼을 것을 제안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나중에 부하린이 소련공산당 대표단의 검토를 거치지 않고 요강을 배포했다는 비난**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부하린ㅡ 사람, 정치가, 학자>, 동방출판사 1992년, 141쪽

** <스탈린전집>12권, 19-20쪽.


부하린은 요강에서 현재 자본주의의 안정을 동요시키는 어떠한 새로운 현상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자본주의는 어떤 개혁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상당히 견고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본주의의 안정은 공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고할 수 없다. 세계 자본주의 위기의 첨예화로 인해 이러한 안정은 사태의 흐름에 흔들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스탈린 전집> 12권, 20쪽.


사회민주당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부하린도 사회민주당과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스탈린은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사회민주당의 ‘좌익’과 투쟁해야 한다,  ‘좌익’ 사회민주당원을 분쇄하지 않으면 사회민주당 전체를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부하린의 요강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부할린은 사회민주당을 파시스트와 동일시해서는 안되며, 상황을 분석하고 공산당의 전략을 세울 때 이렇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 <스탈린전집> 12권, 21쪽.


스탈린은 당내 성향과 당 규율과 관련해서 부하린 요강에서는 우경과 싸우겠다는 말만 했을 뿐, 우경과의 조화로운 태도와 싸우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부하린 요강에서 공산당 내에서 반드시 철의 규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7월 24일 소련공산당 대표단의 상무위원회 회의와 7월 25일 대표단 전체회의에서 부하린의 요강을 다시 토론하고 20여 곳의 중대한 수정을 하였다.


부하린의 요강에 대한 중대한 수정은 회의에 참석한 각 대표단 사이에서 소련공산당 지도부 내에 의견 불일치가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게 하여 부할린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부하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에 각 대표단 단장 회의에 정치국 위원 사이에 이견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치국은 스탈린과 부하린에게 이 성명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위탁하였다. 7월 30일 성명문이 인준을 받았으며 스탈린, 부하린, 보로실로프, 루주타크, 몰로토프, 리코프, 톰스키, 가리닌, 고비설프가 모두 성명에 서명하였다. 성명은 소련공산당 정치국 위원 사이에  어떤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유언비어를 반박했다. 그들은 시종 일치된 정치노선 선상에 있으며, 이런 소문을 가지고  어떤 투기적 행위도 하지 말 것을 일깨울 책임이 있다, 이런 투기적 행위는 정치적으로 해롭고 공산당원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7월 31일, 이 성명은 각 대표단 단장회의에 통보됨과 함께 대회 전체 대표들에게 통보하기로 결정했다.*

 

* <부하린ㅡ 사람, 정치가, 학자>, 동방출판사 1992년, 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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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오른팔 역할을 한 몰로토프


하지만 소문에 대한 반박은 반박이고, 소련공산당 내에는 실제로 이견이 존재했다. 스탈린 등에 의해 수정된 요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를  세 시기로 구분했다. 즉 심각한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접 혁명을 진행하는 시기, 자본주의 제도가 점차 안정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부흥하는 시기, 그리고 자본주의 총체적 위기가 날로 첨예해지고 새로운 혁명이 고조되는 시기가 그것이다. 자본주의 안정이 끝나가고 새로운 혁명의 고조기인 제3시기가 곧 다가오고 있으며, 이 기간 자본주의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모든 국가의 공산당이 충분한 준비를 할 것을 요구했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는 스탈린의 사상노선을 관철하였다. 대회의 결의는 "노동자계급 대중의 좌선회, 계급투쟁의 첨예화"와 "계급역량의 재결합"이 현재 자본주의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우경 기회주의는 현재 각국 공산당의 주요한 위험"이기에, 반우경 및 우경에 대한 타협적 태도와의 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철의 규율을 강화하고 당의 통일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민주당 특히 ‘좌익 사회민주당’은 "최대의 반혁명세력"이고 ‘파시즘 성향’을 보이기에 각국 당은 반드시 그들과의 단호한 투쟁을 벌여야 하며, 그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코민테른 '제6차 대회'는 부하린의 주재로 열리고, 부하린은 이 자리에서 정치서기처 서기로 재선임됐지만, 이후  코민테른 본부에서 배제된 채 사실상  그 정책결정층에서 밀려났다. 새로 선출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스탈린 노선을 집행하는 힘을 눈에 띄게 강화했다. 이후 스탈린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확립하였으며, 코민테른의  종파적이고 교조주의적 경향을 강화하여 각국의 혁명사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중국공산당 내에서 이후 나타난 두 차례의 '좌경'노선 (이립삼노선과 왕명노선)은 코민테른 '6차 대회'가 제정한 방침 및 제3시기 이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1927년 중국대혁명이 실패한 후 혁명적 정세는 뚜렷이 퇴조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과 코민테른 기타 지도자들은 혁명 정세가 여전히 계속 고조될 것이며, 혁명은 더욱 높은 단계로 진입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코민테른 ‘6차 대회’ 전에 중국공산당 내에서는 구추백(瞿秋白)의 ‘좌경 맹동주의' 오류를 비판하고, 구추백 자신도 그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이런 이치대로라면 중국 혁명은 정확한 궤도로 나아갈 것이지만, 지금이 혁명 고조기라는  '제3시기 이론'에 입각한 지도는 중국공산당으로 하여금 기존 ‘좌경’ 노선의 잘못을 바로잡을 틈이 없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진일보한 발전을 위한 조건을 제공했다. 1929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6기 2차 전원회의는 제3시기 이론에 입각하여 "세계혁명은 이미 제3시기에 들어섰다", "전세계 혁명의 화산이 모두 불을 뿜고, 연기를 내뿜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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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추백(瞿秋白)


코민테른은 1929년 중국공산당에 4통의 편지를 잇달아 보내 ‘반우경화’를 강조하면서, 중국은 현재 심각한 전국적인 위기 상황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이제 지주 부르주아 연맹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형태의 노-농 독재를 수립하여 계급투쟁에 의한 혁명방식을 적극 전개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대중을 준비시켜야 한다고 단언했다. 곧이어 이립삼이 주재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국제적으로 올바른 노선을 단호하게 보장하는 방식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1930년 6월까지 이립삼은 후베이성 우한을 중심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무장봉기와 전국 홍군을 집중시켜 중심 도시를 공격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창사(후난성의 성도)와 우창을 점령하고, 우한을 공격하여 양쯔강의 물을 마실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 같은 좌편향 맹동주의는 1930년 6월부터 9월까지 불과 3개월여 동안만 당내를 지배하였지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국민당 통치구역 내에 있는 많은 지방 당 조직은 폭동을 조직하는데 급급해 원래의 제한된 세력의 모습을 드러냈다. 11개 성 당 위원회의 기관이 차례로 파괴되었으며 우한, 난징 등지 당조직은 거의 와해되었고, 홍군은 대도시를 공격할 때 큰 손실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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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 성립 후 천안문 사열대의 이립삼(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코민테른은 또 1930년 10월에 중공 중앙에 편지를 보내 이립삼 노선이 바로 국제주의 정치노선이라고 비판했다. 이립삼의 오류를 ‘좌경’의 공허한 말로 위장한 기회주의적 소극적 심리, 즉 실질적으로 우경화를 은폐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스탈린은 또 미프를 직접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 혁명을 지도하고 모스크바에서 갓 중국에 귀국한 왕명(王明)의 당권 장악을 지지했다.


왕명은 집권 후 이립삼 노선의 잘못을 '좌경'이 아닌 '우경'이라고 비난하며, “현재 당내의 우경화 위험성”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현재 "전 중국의 직접적 혁명적 정세는 없지만, 전국적인 혁명운동의 새로운 고조가 날로 성장하고 불균형적으로 발전하는 조건 하에서, 직접적 혁명적인 정세는 최근 먼저 하나 또는 몇 개 주요 성을 포함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진정으로 한 성 또는 몇 개 성의 우선적인 승리를 실현하고, 나아가 전국적 범위의 승리를 추진하여 쟁취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왕명 등은 사민주의 등 중간 진영을 계속 공격할 것을 요구하면서 '공격 노선'을 추진할 것을 강조했다. 왕명은 일찍이 중국공산당 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후 중앙의 "코민테른 총노선에 대한 100% 충실"을 스스로 표방한 바 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왕명 등의 주장은 이립삼이 범한 오류보다 더욱 ‘좌경’적이고 더욱 이론적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므로, 그 기세 또한 강하여 해악이 더욱 컸다. 그가 전체 당을 지도한 4년 동안 홍군 역량은 90% 를 상실했으며, 백색 지역에서는 거의 100%를 상실했다. 당 중앙은 부득불 강서성-퓨젠성 일대의 중앙 혁명근거지를 포기하고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의 길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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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은 죽은 후 모스크바의 유명한 신성녀 공동묘지에서 후루시쵸프 옆에 묻혔다


이것은 스탈린과 코민테른 ‘6차 대회’가 정한 방침과 제3시기 이론의 산물이었으며, 또한 그 종파적 교조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ㅡ하나의 무기:  '우경화' 딱지 붙이기

 

비록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중앙 지도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스탈린파와 부하린파의 견해차는 계속해서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코민테른  '6차 대회'를 마치고, 부하린은 9월 30일 [프라우다]에 <한 경제학자의 편지>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부하린은 먼저 신경제정책 시행 이후 국민경제의 발전에 대해 논함과 동시에,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와는 다른 '독특한 위기'를 일으켰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생산과잉 즉 공급이 수요보다 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요가 공급보다 큰 상품 부족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이 너무 많이 축전된 때문이 아니라, 자금이 부족한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위기는 또한 경제 균형의 여러 조건이 무너졌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부하린은 국가 경제의 모든 부서 간의 '동적인 경제 균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필요한 경제 비율을 파괴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내의 정치적 균형 또한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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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스탈린은 소련이 낙후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금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최대한 뽑아내면 공업의 최대 발전 속도를 보장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파의 경제 이론을 과녁으로 삼았다.  이는 트로츠키주의 사상가의 천진난만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공업화의 빠른 속도는 반드시 농업이 신속하고 진정한 축적을 이룰 수 있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공업은 왕성하게 발전하고는 있지만, 식량 생산량이 이에 조응하여 증가하지 않고 있다. 식량수매 위기는 결코 공산품이 부족한 가운데 나타난 식량 과잉의 표현이 아니라, 불합리한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식량 문제는 반드시 개인 경제를 발전시키는 기초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하린은 특히 당시 인프라 건설에 대한 투자가 너무 크고 예비담보가 부족하여 끈을 너무 팽팽히 당겼다고 하면서, 이는 "모험주의적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부하린은 현재 공산품이 부족한 원인에 대해 공업이 농촌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을 만큼 농업에 뒤처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업이 그 자신에 뒤떨어져”있기 때문이며, 공업 자체 발전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경제발전에 있어서 조화와 상응하는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부하린 문선> 중권, 270-299쪽 참조)


부하린의 글이 발표된 후 스탈린의 강한 불만을 샀다. 10월 8일 스탈린, 몰로토프, 칼리닌, 리코프는 9명의 정치국 위원 중 5명(부하린 포함)이 부재한 가운데 부할린 문제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부하린의 기고문에서 논쟁적인 쟁점이 있는 점을 감안하여 [프라우다]가 중앙정치국에 알리지 않은채 그것을 발표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얼마 후 [프라우다] 편집부 직원 B.C.포포프 두보프스키는 프라우다에 근무하는 아스트로프, 스테프코프, 체이트린 및 부하린의 다른  지지자들이 중앙위원회에 반대하는 파벌 활동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밀고장을 몰로토프에게 보냈다. 스탈린은 [프라우다] 진지를 노렸다. 이 밀고장은 [프라우다] 편집위원회와 편집부의 부하린 옹호자들을 경질하는 구실이 됐다.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해임되었으며 클루민이 부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부하린은 클루민과 새로운 편집자 그룹의 참여로 인해서 비록 [프라우다] 편집장을 여전히 맡고 있었지만 더 이상 편집 방침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10월 18~19일, 모스크바위원회와 모스크바감찰위원회가 연석한 전원회의를 가졌다. 모스크바시 당위원회 서기는 우그라노프이었는데, 그는 부할린의 단호한 지지자였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위원회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일찍이 1928년 초, 스탈린은 모스크바 조직 상황을 제때에 파악하기 위해 몰로토프, 보만을 그곳에 파견하여 모스크바 위원회 회의에 참가하게 한 적이 있었다. 3~4월 사이에도 스탈린은 모스크바 지도자들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공업화 속도, 경공업과 중공업 관계, 농민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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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업화


이번 모스크바에서 조직된 10월 전원회의에 스탈린도 참여하여 회의에서 <소련공산당 내의 우경화 위험에 대해 논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당내 우경화의 여러 가지 '현상'을 열거했다. 예를 들어,   당을 제15차 대회의 결정에서 후퇴시켜 농촌 자본주의자에 대한 공격 필요성을 부인하기  공업 축소를 요구하면서, 지금과 같은 공업의 급속한 발전이 국가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주장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을 지원하는 적절성을 부인하면서, 이런 지원은 돈낭비라는 주장   자아비판에 기초한 반관료주의 투쟁의 적절성을 부인하고, 자아비판이 우리 당 기관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생각   대외무역독점제의 완화를 요구하는 것 등이다.  스탈린은 "우리 당내에서 우경화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자본주의 성분이 크게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회복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성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스탈린전집> 11권, 195쪽.)


‘우경’이라는 표현은 많은 당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우경분자나 화해분자가 누구인지 지적해 달라, 우리가 처벌할 수 있도록 그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답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닌 당내 우경화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다." (<스탈린전집> 11권, 193쪽)


분명 스탈린은 아직 최후의 결판을 낼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경 분자를 지방의 당 기관으로 한정시켰다. "우리 정치국에는 우파도, 좌파도, 이들을 화해시키려는 사람도 없다."라고 하면서 그는 모스크바 조직에  발견된 오류가 있으며 "망설임과 동요가 있고, 불안정한 요소가 있다"고 간주했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스탈린전접> 11권, 203, 205쪽)


우그라노프는 자신의 발언을 통해 모스크바 당 조직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우경향의 오류에 대해선 부인했다. 심지어는 지금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정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분위기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전원회의에서 우그라노프를 지지한 폴 몰로즈 모스크바위원회 상임위원, 만젤리슈탐 등 일부 지역위원회 지도자들이 해임됐다. 11월 27일 우그라노프 자신도 해임되고, 바우만이 그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시 당서기가 되었다.


1928년 11월 16일부터 24일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28~1929년도 국민경제 통제 수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전체 회의를 개최했다. 전원회의 결의안을 작성키 위해 스탈린, 부하린, 리코프, 오르제니키제, 구비셰프, 미코얀, 케르주자노프스키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했다. 회의에서 특히 농업 문제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는 회의에 총사퇴서를 제출했다. 오르제니키제의 중재로 일단 사표를 철회했지만, 하루 뒤에 스탈린에게 16개 항의 요구 성명을 전달했다.  즉 반우경 운동을 중단할 것, 공산당원들 간에 당 정책에 관해 논의할 때 '경향' 딱지를 붙이지 말 것, 소위 '우경'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조직의 조치를 남용하지 말 것, 해임된 [프라우다] 요원을 복직시킬 것, 모스크바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중단할 것 등이다.  그중 일부는 요구가 충족되었다. (정이범, <부하린 논고>, 371쪽 참조)


스탈린은 회의에서 <국가 공업화와 공산당 내 우경화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공업발전의 고속 추진 필요성을 강조하고, 공업에 대한 기본투자를 최대한 늘릴 것을 주장했다. 우파에 대해 스탈린은 기회주의가 형성되지 않은 시정 가능한 성향이라면서, 우파들이 아직 파벌 조직을 구성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스탈린전집>  11권, 244,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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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업화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우경화를 비판하면서도, 부하린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고 프롬킨에게 직접적인 칼을 들이댔다. 프롬킨은 6월 정치국에 편지를 보낸 데 이어 11월 중앙위원회에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소련의 농업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부농 경제의 생산을 방해해선 안 되며, 동시에 그것의 노예적인 착취와도 싸워야 한다”고 제안하고, 기초 투자를 축소할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우경화의 첫 번째 좌석에 프롬킨을 앉혀야 한다"면서 그의 편지 두 통에 대해 모두 비판했다.(<스탈린전집> 11권, 232-237쪽)


전원회의는 격렬한 논쟁 끝에 <1928~1929년도 국민경제 통제 수치에 관하여> 라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인프라 건설 투자를 16억 5000만루블로 결정하여 전년도보다 3억 2000만루블 증가시켰으며, 그중 3분의 2를 중공업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회의에서 말한 "신속한 공업발전"의 방침, 즉 "공업의 기본투자를 최대한 증가"한다는 결정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결의는 집체농장의 발전을 권장하고 지지한다고 천명하면서도 또한 "빈농과 중농 대중에 대한 경제적 동기를 최대한 강화한다"고 강조했다. "개인 농민경제의 발전을 자극한다는 면에서 볼 때, 그간 당과 소비에트기관은 기본 농민경제의 대폭적 제고를 보장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했다.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중앙위 전원회의 결의 집성> 제3분권, 462-479쪽)


이처럼 ‘우경화’라는  모자를 씌움으로써 스탈린은 상대를 격파할 무기를  발견했다. 그러나 부하린, 리코프 등은 이에 대해서 너무 느리게 반응했다. 그들은 우경화가 존재하는 것을 당당하게 부정하지 않고 이런 표현에 동의하면서, 단지 그 함의를 축소하거나 완화시키려고만 했다.  예컨대 11월 30일, 리코프는 레닌그라드 당조직 열성분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11월 전원회의의 총결산>에 관한 보고를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말하는 당내 경향은 이렇듯 미세한 차이가 있는 다른 어떤 의견을 가리킨다. 이런 의견은 기본 원칙 문제에서 같은 당, 당의 강령, 당의 결의가 일치하며, 당성 입장에서 당의 규율을 준수한다. (다만) 현재 처한 이 시기 이런 혹은 다른 문제에 있어 그들의 견해는 당의 기본 노선을 벗어났으며, 주로 우리나라 사회주의 건설과 개인 자본주의 성분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서 과소평가했다. 우경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현 단계에서 사상투쟁을 통해서 극복해야 하는 그런 당내 경향일 뿐이다". (<리코프 문선>, 인민출판사 1986년, 404쪽)2

 

그들은 ‘우경화’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에 대한 판결문을 쓰는 것과 같다는 점을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스탈린은 그들이 '우경화'의 존재를 인정한 이상 자신은 이미 무기를 장악한 것과 같다는 것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부하린 등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직적 조치가 필요했다. 그는 그들이 주관하는 부서에 중앙 대표를 파견하여 그들의 역할을 제한시켰다. 인민위원회 위원장 리코프에게는 오르조니키제를 파견하고, 부하린의 <프라우다>에는 사빌리예프 (후에 메헬리스), 코민테른에는 미누일스키, 톰스키의 노동조합에는 카가노비치를 파견했다.  위의 부서의 모든 지시에는 앞으로  중앙 대표의 연서명이 있어야 유효하도록 했으며, 중앙대표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부하린은 이것을 "정치위원제를 만들었다"라고 표현했다.

 

2차 대전 기간 중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공장에서 일하는 소련 여성들.png.jpg
2차 대전 기간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공장에서 일하는 소련 여성들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 소련 노동조합 제11차 대표자 대회가 개최됐다. 대회는 루주타크, 오르조니키제, 구비셰프, 카가노비치, 지다노프를 새로운 노동조합 중앙이사회 성원으로 선출했다. 이는 톰스키의 노조 이사회 의장 권한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톰스키는 카가노비치 중앙서기의 이사회 진출로 인해 노조 내에 ‘두 개의 중심’이 형성되어 더 이상 노조를 이끌 수 없게 됐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그는 12월 23일 또 다시 사표를 냈다.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이사회에 대한 업무 참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모든 것에 직면해 부할린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느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밝혀야 겠다고 결심했다. 연말부터 1929년 초까지 그는 <현 정세와 우리 신문 및 간행물의 임무>, <사회주의 건설에서 레닌과 과학의 임무>, <레닌의 정치유언> 세 편의 글을 연속 발표했다. 그는 글에서 고속으로 공업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미친 사람의 정책"이라고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단절 위험은 소련의 가장 주요한 내부 위험이며, 그 모든 불행의 근원은 소비에트 사업 일군이 관료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레닌이 만년에 쓴 5편의 글을 하나의 완전한 사상체계, 하나의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계획으로 삼으면서 레닌이 남긴 정치유언을 집행할것인지, 레닌의 미완성사업을 계승할 것인지 하는 각도에서 재차 스탈린의 방침과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부할린 문선> 중권, 300-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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