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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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10년만에 유럽이 수백년에 걸쳐 완성한 공업화를 달성했다.

 

소련은 전면적인 집단화를 실시하는 동시에 기세 높게 공업화 운동도 전개했다.


일찍이 14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사회주의 공업화 노선을 제출하였으며,  소련을 "농업국에서 자력으로 필요한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공업국"으로 변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어떤 공업을 발전시킨다고 해서 공업화는 아니다. 공업화의 핵심이자 기초는 중공업(연료, 금속 등)의 발전이며, 궁극적으로 생산수단에 대한 생산을 발전시키고 자국의 기계제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소련의 공업화는 자본주의의 공업화와 같이 경공업에서부터 시작할 수 없고, 반드시 중공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공업만이 모든 공업, 운송업, 농업을 개조하고 부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만 국민경제에서 공업의 비중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고, 자본주의국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스탈린전집> 8권 112~113쪽, 13권 160쪽; <스탈린선집>하권 496쪽)


국가 경제의 급속한 발전을 위해 국가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소련 국가계획위원회는 5개년 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계획을 수립함에 있어 위원회는 최소 계획(일반 계획 및 초보 계획)과 최고 계획(최우수 계획)의 두 가지 계획을 수립했다. 국가 경제의 구체적인 발전 목표 및 성장률에 있어 전자는 후자보다 약 20% 가량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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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생산된 소련의 최초의 지프차 가스-61(GAZ-61).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 소련은 100만대의 자동차 생산수준으로 올라섰다.

 

1928년 말 5개년 계획의 초안 준비가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1929년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와 노동국방위원회에서, 4월 말에 열린 당 제16차 대표자회의*에서 이 초안을 논의했다. 부하린, 리코프 등이 '최소안'에 찬성하는 등 논란이 뜨거웠지만, 당시 부하린의 '우경 기회주의'에 반대하는 당내 투쟁이 공식화하고 백열화되던 시기여서, 사람들은 '최소안'을 비판하고 우경 기회주의 주장으로 폭로하는 발언이 많았다. 당 제16차 대표자회의는 최종적으로 ‘최고 계획’을 5개년 계획의 공식 문서로 채택키로 결정했다. 5월에 국가 최고권력기관이자 입법기관인 제5차 소비에트 전국대표대회는 심의와 토론을 거쳐 제1차 5개년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이리하여 제1차 5개년 계획은 법률형식으로 확정되었다.

 

* '당 대표자회의'와 '당 대회(당 대표자대회)'는 구별된다.

 

이 5개년 계획에서 국민경제의 기본 투자, 공업과 농업의 성장률과 발전소 건설, 야금업, 기계제조업, 운송업, 석탄업, 화학공업 등에 대한 상세한 '통제 수치'와 발전 목표가 설정되었다. 5년 동안 전체 국가 경제의 기본 투자는 646억 루블이며, 그중 농업 투자는 82억 루블, 공업투자는 164억 루블이다. 중공업 우선 발전 방침에 따라 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는 주로 생산수단의 공업 부문에 사용되도록 했다. 

 

이들 부문에 대한 투자는 해마다 증가하여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전체 공업투자의 78%, 1932년부터 1933년까지 87.6%를 차지했다. 공업은 5년 이내에 180% 성장해야 했다. 그중 생산수단 부문은 230%, 공업의 노동생산성은 110%, 국민소득은 103%, 농업은 55%  성장하도록 했다. 또 5년 안에 국민경제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단계적으로 배제하고, 사회주의 요소의 비중을 강화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사회주의 성분이 기여하는 몫은 전체 공업생산량의 92%, 농업의 15%, 소매 상품 유통량의 91%를 차지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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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중인 드네프르강 수력발전소(1931년)


5개년 계획이 통과된 후 소련의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는 전국적으로 활발히 진행되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대해 소련공산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전선 대공세'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제16차 당 대회는 바로 이 같은 구호 아래 개최되었다. 스탈린은 당 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통해 소련공산당 제16차 당 대회는 “사회주의 전 전선에 걸친 전면적인 진공의 시기이자 공업과 농업의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라고 밝히면서, 이번 당 대회는 “사회주의가 전 전선에서 대규모 진공을 개시하여, 부농계급을 소멸시키고 전면적인 집단화를 실현하는 당 대회”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스탈린은 보고에서 속도를 높이고 5개년 계획의 기한을 단축하며, 이 정신에 따라 5개년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런 다음 그는 당 중앙의 이름으로 5개년 계획의 일부 지표를 수정하였다.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가 될 무렵 생철 생산량을 5개년 계획에 명시된 1,000만 톤에서 1,700만 톤으로 늘렸다. 트랙터 생산량은 5만 5,000대에서 17만대로 늘리고, 자동차 생산량은 10만 대(트럭과 경차)에서 20만 대로 늘렸다. 콤바인 수확기(원래 5개년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음) 생산량 40,000대, 비철금속 및 농기계 제조업 생산량은  원래 5개년 계획의 두 배 이상으로 늘렸다. (<스탈린전집>12권, 298~301쪽)


대회는 “1700만 톤의 선철 생산을 위해 분투하자”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1931년 초,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5개년 계획을 3년 내 완성' 목표를 제기하고, 이를 위해 이 해의공업생산량을 45% 증가하는 높은 지표를 내놓았다. 이는 분명 객관적인 현실에 맞지 않는 맹목적이며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1932년 1월에 열린 공산당 제17차 당 대회에서 “1931년 연간 계획은 품질 지표와 수량 지표 모두에서 달성되지 않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당 대회에서 “1700만 톤의 선철을 위해 분투한다”는 구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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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공업화 선전 포스터


1932년 말, 소련 정부는 '1차 5개년 계획'을 4년 3개월 만에 조기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5개년 계획(1933-1937)을 수립하고 시행에 착수했다. 1937년 4월 1일까지 소련 정부는 4년 3개월 만에 계획 달성을 선언했다.

 

공업화를 실시하는 과정에 소련공산당과 정부는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련 인민들도 간고한 노동을 바쳐 그 성과는 두드러졌다.


공업화 후 소련은 항공기, 자동차, 트랙터 제조, 화학 산업, 계기 제조, 전력 산업, 중형 및 경기계 제조 등 다양한 산업을 포함하여 수많은 대규모 공업기업들을 설립했다. 이 두 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11,000개 이상의 대형 국유기업이 새로 건설되거나 재건되었다.  또 공업 배치를 조정했다. 10월 혁명 이전의 러시아는 공업생산량의 4분의 3 이상과 노동자의 거의 3분의 2가 모스크바, 이바노보, 페테르부르크,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의 유럽 부분 중에서 중부, 남부, 북서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의 동부 및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에서는 공업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했지만, 기본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2차 5개년 계획'에서는 우랄, 서시베리아, 동시베리아, 극동,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 등 동부 지역에 새로운 공업 기지를 건설하였으며, 자본 건설 투자 총액의 거의 절반을 동부 지역의 중공업 건설 프로젝트에 사용했다. 제2차 5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 동부 지역의 철강 생산량은 전국 철강 생산량의 30.5%, 석탄 생산량은 17%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소련 서부 지역의 공업 기업이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 지역에서 신속히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공업 배치의 조정 덕분이 크다.

 

공업화를 통해서 소련의 공업은 실제로 빠르게 성장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생산은 100% 증가했으며, 1937년에는 1932년에 비해 120% 증가했다. 1937년까지 소련의 공업 총생산량은 독일, 영국, 프랑스를 추월하여 유럽 1위를 차지하였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가 되었다. 공업-농업 비중에 있어서는 공업이 77.4%를 차지했다. 이리하여 소련은 이미 세계의 강력한 공업국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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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군수품 생산 공장


또 외국의 선진 기계, 장비, 기술 및 인재를 대량으로 도입하였다.  사람 파견을 통해 해외 검사, 실습 및 훈련을 습득하고 소련 공업의 기술혁신을 가속화 하는 한편, 소련을 위해 선진기술을 이해하는 인재들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5개년 계획의 시행을 통해서 소련 인민들의 생활은 확실히 향상되었다. 경공업과 중공업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경공업과 농업에서 일정한 성장을 달성했다. 경공업은 계획에 명시된 연간 성장률 18.5%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4.8% 성장했으며 농업 총생산량도 54% 증가했다. 국민소득도 증가하고 인민의 물질적 복지와 생활 수준 역시 그에 따라 향상되고, 특히 노동자와 직원의 임금이 약 2배 증가했다. 1929년부터 시행된 식품 및 일용공산품 배급제는 1935년 초부터 잇따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추진한 이 같은 공업화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중공업의 발전을 우선시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소홀히 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투자의 대부분은 중공업 분야에 투자되었으며,  그 결과 5년 동안 중공업 생산이 1.7배 증가한 반면, 소비재는 56% 증가에 그쳤다. ‘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경공업, 중공업 및 농업의 발전 비율을 조정하여 경공업의 연간 성장률이 18.5%, 농업 14.9%, 중공업 14.5%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2차 5개년 계획'이 완성될 무렵 중공업의 연간 성장률은 19%인데 반해 경공업은 14.8%에 불과했으며, 농업 생산량은 1932년에 비해 5.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련의 이러한 농업과 경제의 불균형 비율은 국민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오랜동안 소련의 중공업, 특히 군수공업은 매우 발달했지만, 민간공업과 농업의 발전은 심각하게 뒤처졌다. 이 문제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으며, 그 후유증은 오늘날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 다른 국가에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군수품 생산.png
소련의 군수품 생산 


둘째, 고도로 집중된 명령지시형 계획경제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계획을 중앙정부에서 일률적으로 준비하고, 거시와 미시의 의사결정은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계획 지표를 위에서 아래로, 지역 또는 부서별로 단계별로 하달하였다. 계획 지표, 자금 출처, 재료 공급, 임금 총액 및 등급, 기업이 생산하는 수량, 품종, 판매, 제품가격 등이 모두 계획에 자세히 규정되어 있었으며, 심지어는 집단농장이나 국유 농장이 무엇을 심고 무엇을 심지 말아야 하는지까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필수적이었으며 '계획은 법령'이었기에 모든 산업, 지역 및 기업들이 시행해야 했다. 또한 각 기업의 지도자와 집단농장 지도자는 상급에서 임명하였으며, 기업 직원과 집단농장원은 관여할 권리가 없었다.


이러한 고도로 집중된 경제체제에서 수립된 계획은 종종 너무 이상적이어서, 객관적인 현실과 동떨어져 잘 실현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스탈린과 지도부가 선택한 최고 계획에 따르면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은 180% 성장해야 했다. 그중 생산재는 230%, 산업 노동생산성은 110%, 국민소득은 103%, 농업은 55%가 증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행 결과 공업의 성장은 180%가 아닌 100%였으며, 산업 노동생산성은 110%가 아닌 38%에 불과했고, 농업은 55% 성장에 도달하기는커녕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졌다.

 

농업 총생산량은 1927년~1928년 166억 루블에서 1932년~1933년 258억 루블까지 증가할 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131억 루블로 감소했다. 절대 수치로 볼 때 '1차 5개년 계획' 중의 많은 중요 지표가 완료되지 못했다.  예컨데 선철 계획 지표 1000만 톤 중 실제 완료는 620만 톤이었다. 전력 지표 220억 킬로와트 중 실제 135억 킬로와트가 완료되었다. 비료 생산 계획은 800만 톤이었는데, 실제로는 90만 톤만 생산되었다, 등등. 석탄, 철, 전기 등과 같은 '2차 5개년 계획' 의 일부 중요 지표는 1950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1928년부터 1941년까지 경제발전의 몇 가지 주요 지표의 달성은 원래 계획과는 크게 달랐다. 국민소득은 4.5배가 아닌 50% 증가했으며, 사회적 노동생산성은 3.5배가 아닌 36% 증가에 그쳤다. (<신세계>1988년 5기, 176~177쪽; <부하린 논고> ,412~413쪽 참고)

 

공장안의 소련 노동자.png
공장에서 작업중인 소련 노동자


셋째, 시장과 가치법칙의 역할을 배제하고 '협상가격차'와 '초과세'를 이용하여 농민으로부터 공업화 자금을 무자비하게 조달했다. 공산품이든 농산물이든 국가가 균일하게 가격을 책정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금지함에 따라 생산물의 '상품화'는 개인 소비재로 제한되었다. 농민들은 곡물을 국가가 지정한 가격으로 국가에 판매해야 하였는데, 국가의 지정가격이 매우 낮아  어떤 것은 생산 비용에도 미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33년부터 1934년까지 곡물 산지에서의 밀 구매 가격은 3.2-9.4 코페이카/kg이었다. 하지만 밀가루 1kg(가루 추출율 85%)당 소매가격은 정부가 발행한 '곡물 카드'를 사용하여 구매 시에 35-60 코페이카/kg이었고, 곡물 카드 없이 구매 시의 시장가격은 4~5루블에 달했다.* 감자 1kg당 정부의 구매 가격은 3-4 코페이카였지만, 구매 카드에 의한 소매가격은 20~30코페이카이고, 구매 카드 없는 시장가격은 1.2~2루블이었다.

 

*1루블=100코페이카

 

1936년 11월 25일 스탈린은 제8차 전소비에트 비상대표대회에서 <소련 헌법 초안에 관하여> 보고를 통해 "우리 소련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가 공산주의의 제1 단계 또는 낮은 단계 제도라 부르는 제도를 실현했다. 즉, 우리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의 첫 단계인 사회주의를 실현했다." (<스탈린문선>상권, 90쪽) 라고 선언했다. 바로 이 대회에서 소련의 새 헌법이 채택되어 소련이 사회주의를 건설했음을 전 세계에 법적 형식으로 선포했다.

 

모스크바 운하를 시찰하는 스탈린(1937년).png
모스크바 운하를 시찰하는 스탈린(1937년)


소유제 구조만을 놓고 본다면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이 인식하는 사회주의가 실현됐다고 볼 수 있다. 1937년경 소련의 공업과 상업 분야에서 민간경제는 소멸되었다. 1937년에 사회주의경제 성분은 전국의 생산 고정 기금에 있어 99%, 공업 총생산량의 99.8%, 상업 기업과 소매 상품 유통의 100%를 차지했다. 농촌 지역에서는 전반적인 집단화가 기본적으로 완료되어 부농 경제가 소멸되었으며, 사회주의경제 성분은 전체 농업 생산량의 98.5%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전체 물질적 생활 수준은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었다. 1938년 소련의 국민소득 총액은 1000억 루블에 육박했지만, 인구로 따지자면 1인당 국민소득은 약 500루블에 불과했다. GNP(국민총생산)의 대부분은 첫 번째 범주 즉 생산수단 부문의 생산 가치에 속했으며,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생필품은 여전히 풍부하지도 않고 다양성도  적어 소비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옛 소련과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의 이런 사회주의를 '조잡한 사회주의', '병영적 사회주의'라고 부르면서 맑스 엥겔스가 구상한 사회주의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

 

* 이종우 주필, <국외 학자가 스탈린모델을 논하다>(상하권), 중앙편역출판사 1995년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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