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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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제국의 불행한 패전이 있은 지 이십유여 년. 그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의 정세도 크게 바뀌었거니와 특히나 제국의 아시아에 있어서의 자리는 어둡고 몸서리쳐지던 패전의 그 무렵에 우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전개되어 오고 있습니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1936~2018년)의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 서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최인훈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한국인 식민지 피해자 개인이 일본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을 길이 사라지고 문화재를 돌려받을 길도 없어진 것에 실망해, 67년부터 76년까지 내리 4편의 연작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당시 작가가 느꼈을 분노와 실망이 얼마나 컸던가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35년 동안의 가혹한 일제의 식민 지배에 관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는커녕 경협 자금 명목으로 5억 달러(무상 3억, 유상 2억)를 받는 걸로 퉁쳤으니,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기가 차고 속상했겠습니까.

 

ㅡ 소설 속 총독의 일 대신해 주는 윤석열 정권

 

이 소설은,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한 뒤에도 조선 총독이 한국에 계속 남아 ‘조선총독부 지하부’를 이끌며 호시탐탐 한국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엿보고 있는 가상 상황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총독이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운영하는 유령 방송을 통해 외세에 굴종하고 주체적이지 못한 반도인(한국인)을 조롱하고 비꼬며, 한국의 재식민화를 위해 지하 항쟁을 벌이고 있는 ‘제국 군인과 경찰, 밀정과 낭인’을 격려·고무하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앞으로 한국 사람들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더욱 주체적·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를 하려는 게 작가의 의도였을 겁니다.

 

최근 한일 문제와 관련해 윤석열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서 지금 작가 최인훈이 생존해 있다면 <총독의 소리>에 나오는 상황 설정과 줄거리를 전면 개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총독이 굳이 한국 땅에 남아 밀정들과 함께 한국의 재식민화를 위한 ‘고난의 지하 투쟁’을 한다는, 그런 기상천외의 발상이 전혀 불필요할 테니까요. 바로 윤 정권이 소설에서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하려고 하는 일을 백주대낮에 대놓고 자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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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의 소설  <총독의 소리>

 

돌이켜보면, 윤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일제 강점기 강제노동 피해자 해법으로 내놓은 ‘제3자 변제’가 ‘윤 정권의 조선총독부화’의 첫걸음이었습니다. 한국의 피해자보다 일본 정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법률 해석과 집행에서 최고의 권위와 힘을 지닌 대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했습니다. 대법원이 일본의 전범 기업에 정신적 위자료를 내라고 명령했는데, 윤 대통령은 삼권분립과 대법원판결을 무시하고 한국 사람의 돈으로 대신 갚아주기로 ‘결단’했습니다.

 

ㅡ 위법적인 ‘제3자 변제’ 해법 이후 친일·종일 폭주 가속

 

대한민국 헌법 제65조는 대통령 등의 탄핵 사유로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는 대통령의 탄핵 사유들 가운데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한 이 조치보다 명확한 탄핵 사유는 없을 겁니다. 여하튼 자국 피해자의 요구와 대법원의 판결을 짓밟고 일본에 백기 투항한 이 반민족적인 조치를 신호로 윤 정권은 친일·종일의 길로 일로매진 내달려왔습니다. 육사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 동상 들어내기, 외교·국방 백서에서 일본 비판 내용 없애기, 독도 영유권 흐리기, 자위대와 협력 강화 등등 이전 정권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무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급기야 최근엔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친일 부역자를 옹호하는 김형석이라는 자를 독립기념관장에 앉혔습니다. 그는 삼일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원으로 삼자고 하는 역사 날조 집단의 일원입니다. 독립기념관장이 아니라 식민지기념관장에나 어울리는 자입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얼을 보존하고 계발하는 일을 하는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원장에는 일본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떠벌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주자 김낙년을 임명했습니다. 그는 이영훈과 함께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 식민 지배를 긍정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쓴 공동 저자의 한 명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이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와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민의 역사 인식과 정신에 큰 영향을 주는 국책기관의 장에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미화하는 부류를 차곡차곡 내리꽂아 왔습니다.

 

<총독의 소리>에서 총독이 하고자 했던 것처럼, 반도인의 정신 구조를 외세 지향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더 나아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찬양하고 미화하도록 뜯어고쳐 한국을 일본의 영구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사 만행입니다. 이종찬 광복회 회장이 김형석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두고 “용산 어느 곳에 일제 때 밀정과 같은 존재의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닌가?”라고 분개한 뜻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대통령실이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사령부, 즉 ‘부활한 조선총독부’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사도광산 외교 참사는 일본의 역사세탁 도운 의도적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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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모형

 

윤 정권의 ‘사도광산 외교 참사’도 ‘대통령실의 조선총독부화’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록 과정에서 윤 정부가 저지른 비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마는, 이 참사도 강제노동의 참상을 돈으로 바꿔치기한 ‘제3자 변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일본이 싫어하는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않은 채 일본의 폭압을 감춰주고 승인해 준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광산 외교 참사’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의도적인 사기극이기 때문입니다. ‘참사’라는 단어 속에는 의도하지 않은 비참한 결과도 포함되는데, 이번 사도광산 사건은 내막을 알면서도 앞장서 일본의 역사 고쳐쓰기를 도와준, 그것도 강제 노동자의 피와 땀을 희생하며 일본의 역사세탁을 지원해 준 공범 행위입니다. 이 또한 용산 대통령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조선총독부임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오호, 통재라!

 

“반도의 영유는 제국의 비밀이었습니다. 영혼의 꿈이었습니다. <중략> 오늘날 제국은 이 비밀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인과 본인의 휘하에 있는 전원의 비원도 이곳에 목표가 있습니다. 실지 회복, 반도의 재영유, 이것이 제국의 꿈입니다.”

 

이 소설의 중간에 나오는 총독의 말입니다.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더욱 끔찍한 건 소설의 꿈이 현실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친일 본색’ 윤 정권의 등장에 용기를 얻은 소설 속의 총독이 지하 운동을 청산하고 지상으로 뛰쳐나와 윤 정권과 손잡고 그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 한창 이루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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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본 기사는 저자의 양해 하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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