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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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봉기에 관한 당내 사상이 대체로 통일되자 볼셰비키당은 긴박하게 봉기 준비에 들어갔다. 10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는 수도 각 위수부대에  60명에 가까운 정치위원을 파견했다. 이는 명의상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반혁명세력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보위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상 군구사령부와 군장교들의 행동을 감시함으로써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의 명령을 관철하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

 

10월 21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3명의 볼셰비키ㅡ 포드보르스키, 안토노프 오버셴코, 사도프스키ㅡ와 2명의 좌파 사회혁명당원 라지미르, 수하네르코프로 구성된 상무국을 선출했다. 트로츠키는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 의장 명의로 노동자들이 총기를 수령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여전히 10만 정의 소총을 표트르 파블로프 요새에 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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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파블로프 요새 (오늘날의 페테르부르크 요새)

 

같은 날 볼셰비키는 수도의 모든 군대 및 함대로 구성된 연대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현재 정세에 관한 보고를 했다. 수도 각 위수부대는 소비에트를 유일한 권력기관으로 인정하였으며,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를 자신의 직속 지휘기관으로 인정하고, 군사혁명위원회가 취하는 모든 조치를 완전히 옹호한다고 밝혔다.

 

10월 22일, 페테르부르크 적위대는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적위대 규약을 통과한 후 지도기관인 중앙사령부를 설립했다. 의장은 유레네프(Yurenev)였다. 봉기 직전까지 수도의 적위대원은 약 2만여 명, 전국적으로는 약 20만 명이 있었다. 같은 날 수도 위수부대의 각 지구 대표회의는 모든 위수부대에 발부한 명령은 반드시 정치위원의 서명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일률적으로 무효라고 결정했다. 10월 23일, 레닌은 군사혁명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보고를 청취한 후, 봉기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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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칸 공장의 적위대

 

그런데 이때 스탈린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스탈린의 이 시기 며칠간의 활동에 관한 기록은 매우 적다. 다만 그가 10월 21일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가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는 회의에서 발언하였는데, 곧 개최될 전 러시아 소비에트 제2차 대회를 위해서 토지, 전쟁, 정권, 노동자감독, 민족 등 5개 주제에 관한 보고와 요지를 당이 준비할 것을 건의했다. 회의는 그의 건의를 통과시키고 이 주제들에 대한 분업을 진행했다. 즉 토지, 전쟁, 정권 문제에 관한 보고는 레닌이 맡았으며, 노동자감독 문제는 밀루틴(Milyutin)이 책임지고, 스탈린은 민족문제, 트로츠키는 정세보고를 맡도록 했다.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또한 소비에트대회가 소집되기 전에 볼셰비키 분파를 한 차례 소집하기 위한  예비회의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 책임자로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밀루틴(Milyutin) 3인을 지명했다. 10월 24일 오후,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제2차 소비에트대회 대표들과 볼셰비키 분파와의 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스탈린은 정치정세에 관한 보고를 했는데, 이 회의와 관련한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했던 미하일 야코프 대표만이 세묜 바실리첸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회의 및 스탈린의 보고에 관한 내용에 대해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상태에 관한 스탈린의 보고서ㅡ 군대가 전선에서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라트비아연대만이 우리를 지지했지만 가로 막혀있다. 임시정부는 머뭇거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 5-6시에 사람을 보내 담판을 벌였다.


[스탈린이 말함]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회가 군사혁명위원회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봉기인가, 아니면 질서 유지인가? 전자라면 자기들 (군사혁명위원회에 유능한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있다) 을 소환하겠다고 했다. 물론 우리의 대답은 질서 유지이며, 자기 방어다. 
따라서 그들은 소환할 사람이 없다. (소비에트를 지지하는-역주) 수병들이 사관생 50명을 체포했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1) 즉시 봉기 (2) 먼저 힘을 모아야 한다는 두 파벌이 대립하고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두 번째 주장에 동조한다.


전함 아프로르호의 대표가 다리를 열기 위해 발포할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발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어차피 모든 다리는 우리 손 안에 있는데, '트로이츠키 다리'는 피터 폴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에서 통제하고 있다.


사관생도와 기갑병 내에서 분열이 일어 나고 있다. 우리는 기갑병을 타격할 수 있는 전문 대포를 보유하고 있다. <노동자의 길>(볼셰비키 기관지-역주)은 조판 중에 있다. 전화는 지금 우리 손안에 없다 (2분이 지나자 임시정부 측이 중앙전화국 앞에 배치한 기갑병들은 볼셰비키이며, 교환원은 이미 소비에트쪽으로 전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체국은 우리 손안에 있다. 2개 연대가 전선에서 우리를 지원하러 오고 있다. 파견된 자전거 부대는 본래 우리를 진압하러 왔었지만, 그들은 전선에서 대표단을 파견했다.  볼셰비키의 결의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를 지원해야할지 아니면 자신들은 전선으로 돌아가야할지에 관해 물어왔다.*

 

* 로버트 슬라세의 <1917년의 스탈린>, 271쪽 참조. 당시 야코프는 돈네츠-크리보로거의 볼셰비키 대표였고, 바실리첸코는 1917년 당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로스토프-나히체반 위원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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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아프로르(오로라)호

 

이로부터 알수 있는 것은 스탈린이 포괄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즉각적 무장봉기"가 아닌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이날 [노동자의 길]에 실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반영됐다. 그는 사설에서  노동자, 병사, 농민, 코사크 및 전체 노동자가 평화, 빵, 토지, 자유를 쟁취할 것을 원한다면, 지금의 지주와 자본가 정부를 새로운 노동자- 농민의 정부로 교체하자고 주장했다. 

 

그럴려면 "여러분은 자신의 힘을 모아 일치단결하고, 회의를 진행하여 대표단을 선출해야만 한다. 그들을 통해 내일 스몰니에서 열릴 소비에트대회에 자신의 요구를 제출해야 한다.” “당신들의 움직임이 더욱 강력하고 조직적이며 강대할수록, 구 정부는 더욱 평화적으로 새 정부에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스탈린전집> 3권 371-372쪽, 인민출판사.

 

그러나 10월 24일의 상황은 즉각적인 무장봉기가 임박했고, 볼셰비키는 봉기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날 아침, 임시정부는 사관생도와 경찰을 파견하여 볼셰비키 기관지인 <노동자의길> 인쇄소를 습격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즉각 리투아니아연대 병사들을 인쇄소에 파견하여 경찰을 몰아내고 봉인을 찢고 인쇄소를 탈환하여 이날 조간 신문이 출간하는 것을 보장했다. 적위대와 병사들은 또 네바강의 모든 다리를 통제하였으며, 중앙전신국과 페테르부르크 전신지국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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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지휘부가 있던  스몰니궁

 

오전에는 봉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트로츠키, 스베르들로프, 카메네프 등 중앙위원 11명이 회의를 열고 군사혁명위원회의 보고를 받았다. 카메네프는 "중앙위원회의 특별한 권고 없이 어떤 중앙위원도 스몰니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즉각 통과됐다. 회의는 봉기 과정에서 중앙위원들의 임무에 관한 구체적 분업을 했다. 

 

부브노프는 철도노동자들과 연계를 유지하고 저린스키는 우체국과 전신국을 책임지며, 밀루틴은 식품공급을 조직한다. 스베르들로프는 임시정부를 감시하며, 로모프와 노겐은 모스크바에다 모든 상황을 통보하고, 카메네프와 베르진은 좌파사회혁명당원들과 담판을 책임지도록 했다. 

 

혁명지휘부가 있는 스몰니 궁전에 대한 반혁명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트로츠키는 피터 폴 요새에 예비 본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채택되었으며 스베르들로프가 요새와의 지속적인 연락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회의가 스탈린에게 특정 임무를 할당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가 봉기 중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담당했는지 확인할 자료가 없다.

 

아울러 이날 오전 군사혁명위원회는 위수부대에 '제1호 명령'을 내렸다.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각 연대는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고 추가 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또한 순양함 오로라호의 무선방송 시설을 사용해서 페테르부르크 외곽을 지키는 모든 부대에게 전투준비를 갖추고 각 기차역의 방위를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임시정부도 봉기에 대한 대비에 박차를 가했다. 10월 24일 오전, 케렌스키는 마리아궁에 가서 예비국회 연설을 통해 볼셰비키가 봉기를 획책하고있으며, 정부가 단호한 행동을 취해 이들의 폭동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예비국회가 이 요구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는 황급히 동궁으로 돌아와 전선사령부에 전화를 걸고 그들에게 수도에 믿을 만한 부대를 차출해달라고 요청했다.

 

페테르부르크 군구 사령관 폴코프니코프는 각 부대에 막사에 남아 있으라며, 총을 휴대하고 거리에 나가서는 안 되며 위반하는 자는 군사법정에 넘겨 처벌하겠다고 명령했다. 다른 한편 사관생도와 코사크 부대에게 동궁으로 가서 정부를 보위하라는 명령을 했다. 그러나 그들중 이런 명령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단지 수만 명의 군대와 장갑차 4대, 대포 6문만이 동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레닌은 민감하게 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왔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10월 24일, 그는 먼저 중앙위원회에  자신이 스몰니궁에 갈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저녁 무렵 다시 당 중앙에 편지를 써서 "어떻게든 오늘 밤, 오늘 밤에 정부 요원을 체포하고 사관생도의 무장을 해제시켜야 한다 (그들이 저항하면 그들을 격파해야 한다)...기다릴 수 없다!!기다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지금이 바로 절체절명의 고비다. 지금 일정에 오른 문제는 결코 회의 혹은 대표대회 (소비에트대회일지라도)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레닌전집>2판 32권 430쪽, 인민출판사.

 

밤 11시, 레닌은 은둔지로부터 스몰니궁으로 와서 직접 무장봉기를 지휘했다. 10월 25일 (양력 11월 7일) 새벽, 혁명가들이 타프리다 궁전, 니콜라 역, 발트해 역, 중앙발전소, 국립은행 및 기타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다. 오전까지 수도 전체는 거의 봉기자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케렌스키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자, 미국대사관 차를 얻어 타고 페테르부르크를 황급히 탈출했다.

 

임시 정부의 본거지인 동궁을 점령할 준비를 하는 군인들.jpg
봉기한 전사들이 임시정부 소재지인 동궁을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오전 10시,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는 레닌이 쓴 <러시아 시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다. 임시정부가 이미 전복되었으며, 정권은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 수중으로 넘어왔다고 선포했다. 오후 1시, 마리아궁은 봉기자들에게 점령당하였으며 예비국회는 해산되었다. 임시정부는 동궁에 틀어박혀 완강하게 저항하려 시도했다. 적의 이 거점을 제거키 위해 봉기자들은 동궁을 포위 공격했다. 저녁 9시 40분, 순양함 오로라호가 동궁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다음날 새벽 2시 동궁이 점령되고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체포됐다.

 

페테르부르크 봉기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동궁공격.jpg
봉기부대가 동궁을 공격하는 모습

 

봉기자들이 동궁을 공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제2차 전 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대회가 개최되었다. 레닌은 평화와 토지 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였으며, 소비에트정권의 첫 법령인 <평화에 관한 법령> <토지 법령>이 통과됐다. 101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가 선출되었으며, 레닌을 위원장으로하는 인민위원회가 설립됐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원래 그가 대회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서 민족사무인민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상의 10월 무장봉기에서 레닌은 모두가 공인하는 지도자였다. 트로츠키의 역할이 레닌에 버금간다는 점은 스탈린의 초기 저서에서도 인정되었다. 1918년 11월 6일,  스탈린은 10월 혁명 승리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라우다]에 발표한 <10월 혁명>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봉기 고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레닌 동지를 위시한 당 중앙위원회였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레닌-역주)는 그때 비밀리에 페테르부르크 비부르크 지구에 살고 있었다. 10월 24일 저녁, 그는 스몰니궁에 가서 봉기를 총지휘하도록 요청받았다. 봉기의 모든 실제 조직 사업은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 의장인 트로츠키 동지의 직접적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위수부대가 신속하게 소비에트 편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트로츠키가 맡은) 군사혁명위원회가 그 일을 아주 잘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트로츠키 동지 덕분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 리현영의 < 트로츠키평전 >,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86년판, 233페지에서 인용.

 

이 글귀는 <스탈린전집> 4권에서는 삭제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약술전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역사에 관한 간결 과정>, <스탈린전집> 및 이후 출판된 다양한 역사 교과서와 백과사전에서는 트로츠키의 역할이 지워졌으며, 그는 항상 박해를 받았다. 그 대신 반복해서 "레닌과 스탈린은 사회주의 10월 대혁명 승리의 주모자이며 조직가",  "회의는 스탈린 동지를 위시한 봉기를 지도할 당 본부를 선출했다. 이 당 본부는 페테르부르크소비에트 소속의 군사혁명위원회 회원이며, 실제 전체 봉기를 이끌었다.",  "10월 24~25일 레닌과 스탈린이 10월 무장봉기를 지도했다"는 식의 글귀로 채워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로 미루어 판단해 보건데, 이런 류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무장봉기에 관한 스탈린의 역할은 크게 과장되었다.

 

첫번째 소비에트 정부.jpg
제1기 소비에트 러시아정부, 위에서 아래로: 첫 번째 줄 왼쪽부터: 리코프, 레닌, 트로츠키;두 번째 줄 왼쪽부터 밀류틴, 니바 크레렌코, 파 예드빈코, 푸아 오브셴코 (안토노프), 비바 노건;세 번째 줄 왼쪽부터: 루나찰스키, 오포코프 (로모프), 슈요프니코프 ;네 번째 줄 왼쪽부터: 테오도로비치, 니바 아빌로프 (그레보프);다섯 번째 줄 왼쪽부터: 스탈린, 스크월조프 (스테파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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