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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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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 조인 현장

 

페테르부르크 무장봉기는 비록 승리했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레닌이 이끄는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소련 정권은 여전히 ​​사회주의 혁명가와 멘셰비키의 도전을 받았다. 전방은 아직도 전쟁을 하고 있어 갓 태어난 소비에트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바빴고 스탈린도 그러했다.

 

스탈린의 첫 번째 임무는 민족사무인민위원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민족사무인민위원부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무실도 없고 간판도 걸 곳이 없었으며, 일손은 더욱 부족하였다. 처음에 스탈린은 페스트코프스키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폴란드의 고참 혁명가로 제정 러시아 시절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자유를 얻어 10월 무장봉기에 참가하였다). 페스트코프스키가 자발적으로 스탈린을 찾아왔다.

 

"스탈린 동지, 당신은 민족사무인민위원입니까?"라고 페스트코프스키가 물었다.
"네."
"그런데 위원회가 있나요?"
"아니요.“
"글쎄요, 당신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뭐 필요한 것 있나요?"
"현재로서는 위임장만 있으면 됩니다."

 

이때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집행사무실로 갔다. 몇 분 후 스탈린은 위임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페스트코프스키는 스몰니궁의 한 사람이 점용한 방에서 빈 탁자를 발견했다. 그는 이 탁자를 가장자리로 밀어 벽에 기대어 놓고 또 의자 두 개를 찾아 그 옆에 놓았다. 벽에 종이 한 장을 붙여 ‘민족사무인민위원회’라고 썼다. 이렇게 해서 민족사무인민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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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스탈린

 

사무실은 최소한의 비용이 필요한데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그때 소비에트 정권은 아직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았다. 페스트코프스키는 "스탈린 동지, 우리 명의로 된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라고 스탈린이 물었다. "시작할 때 1000루블이면 충분합니다." 페스트코프스키가 대답하자 , "그럼 1시간 후에 다시 오십시요."라고 스탈린이 말했다.  페스트코프스키가 1시간 후에 다시 왔을 때 스탈린은 그에게 트로츠키에게 가서 3000루블을 빌리라고 했다. 스탈린은 "그는 돈이 있어요. 그가 전(前) 외교부에서 돈을 찾았어요."라고 말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외교인민위원이었다. 페스트코프스키는 트로츠키에게 가서 3000루블을 빌렸는데, 이는 최초의 사무비용이라 할수 있다.

 

스탈린은 민족사무인민위원으로서 그가 기초한 첫 번째 중요 문건은 <러시아 각 민족 권리 선언>이다. 11월 2일, 그는 레닌과 함께 이 선언에 서명했다. 선언은 러시아 각 민족은 일률적으로 평등하고 주권을 향유하며, 러시아 각 민족은 자유로운 자결권을 가지고 있다. 독립된 국가를 분리하여 구성할 수 있으며, 모든 민족 및 종교적 특권과 차별을 폐지하고, 소수민족과 인종 집단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11월 14일,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특사 자격으로 헬싱키에 가서 핀란드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는 회의 연설에서 핀란드가 민족자결권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18일, 레닌과 함께 핀란드 독립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핀란드가 독립한 후 핀란드 사회민주노동당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정권은 핀란드 자본가계급에게로 넘어갔다. 이 때문에 스탈린이 강력히 수호한 민족자결권 원칙은 소자산계급 민족주의에 굴복한 것이라는 당내 일각의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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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국회

 

여러 가지 압력에 직면한 스탈린은 1918년 1월 10~18일 소집된 전러시아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대회에서 민족문제에 관한 보고를 할 때 민족자결권 원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자결의 원칙은 부르주아지의 자결권이 아니라 그 민족 근로대중의 자결권으로 해석해야 한다"면서 "자결 원칙은 사회주의를 쟁취하는 수단이어야 하며, 사회주의 원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회는 또한 러시아 연방기관에 관한 스탈린이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 <스탈린 전집> 4권,  29쪽, 인민출판사.

 

민족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로서 각 민족 간의 관계를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지는 국가 건설과 안정에 관계되는 대사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문제가 시종 잘 처리되지 않아 대러시아주의의 경향이 심각하다. 이 점은 스탈린에게서도 드러난다. 그가 우크라이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러하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17년 12월 12일에 성립되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자본가계급과 소부르주아 정당 및 단체의 연합기관인 센트럴 라다(Central Rada)가 있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는 중앙 라다와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1918년 4월 3일, 레닌이 주재한 인민위원회 회의는 우크라이나 인민서기처 (즉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노농정부) 특별대표단의 성명에 관한 결의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독립 공화국으로 선포할 것에 관한 전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제2차 대표대회의 결정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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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주변 국가들

 

결의는 우크라이나 근로인민과 피압박 대중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대해 찬사와 동정을 표시하면서, 그들은 현재 세계 사회혁명의 선진부대라고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4월 4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더 이상 정부와 공화국 놀이를 하지 말라. 이미 충분하다. 이런 게임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이 전보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정부 지도자들을 분개하게 했다. 4월 6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 스크렙니크는 스탈린의 행동에 항의하는 전보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는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스탈린 인민위원의 처사에 대해 단호한 항의를 표시한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인민서기처가 러시아 연방이나 그 인민위원의 우리에 대한 태도를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노동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며, 이 의지는 이미 제2차 전우크라이나 소비에트대회의 결의안에서 구체화 되었다. 스탈린 인민위원의 성명처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권을 약화시켰고……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적들을 직접적으로 도왔다.*

 

*  <레닌전집> 2판 34권, 649쪽, 인민출판사 참고; 메드베데프, <역사를 심판하라> (상) 29~30쪽.

 

그러나 이 시기 스탈린은 공무가 너무 많아 민족 사무는 그의 아주 적은 시간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이 일을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레닌이 나중에 말했듯이 '기회'는 그가 3년 반 동안 사실상 노농검사인민위원직을 맡지 못하고, 민족사무인민위원직도 수행하지 못하게끔 했다. 이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1919년 국가감찰인민위원(1920년부터 노동자농민감독인민위원으로 명칭이 변경됨)을 겸임했지만, 스탈린은 당시 노농검사원의 일을 처리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당시 조페는 이 권위 있는 자리를 얻고 싶어 트로츠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그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사업을 위해서라면 스탈린을 노농검사원 인민위원직에서 사직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유용한 사람이지만 노농검사원에서는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치체린을 외교인민위원직에서 사직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곳에서도 그 일만큼 더 유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볼코고노프, <승리와 비극>1권 101쪽.

 

조페는 또한 레닌에게 편지를 써서 당 중앙이 그의 풍부한 정치사업, 특히 외교 업무에 대한 그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 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주 옮기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레닌은 그에게 "기회가 나쁘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는 의미심장한 답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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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 회담(1918년 1월 초) 동안의 트로츠키(오른쪽), 조페(가운데)

 

스탈린의 기회는 정말 좋았다. 그 비상한 시기에 볼셰비키당이 직면한 각종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트로츠키는 외교 문제, 특히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과의 협상에 바빴다. 스베르들로프는 당무사업에 바빠 늘 바빴기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1917년 ‘6차 당 대회’ 이래 줄곧 당의 서기처를 책임져왔다. 반면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리코프, 밀류틴, 노건(Nogan) 등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으로 구성된 연립정부 출범을 주장하다가 당 중앙과 이견을 빚으면서 중앙위원회에서 잠시 탈퇴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한때 레닌 주변에서 보기 드문 핵심 인물이 되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레닌의 중요한 조수가 되었다.

 

이 점은 트로츠키조차도 인정했다. 그는 "그 당시 레닌은 스탈린이 매우 필요했다. 그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그는 참모장 역할을 했다."* 1917년 11월 29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은 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중앙상무국을 설립했다. 성원은 레닌, 스베르들로프, 트로츠키, 스탈린 네 명으로 구성되었다. 상무국 구성원은 다른 중앙위원들이 스몰니궁에 없을 때 '모든 긴급 사무'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이는 사실상 레닌 측근으로서의 스탈린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 트로츠키, <스탈린평전>(하)  326쪽. 

 

이 시기에 스탈린은 레닌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레닌도 확실히 스탈린의 도움이 필요했다. 페스트코프스키에 따르면 "레닌은 하루도 스탈린을 떠날 수 없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스몰니의 사무실에서 레닌의 보호를 받았다. 하루 중 레닌은 스탈린을 몇 번씩 부르거나, 우리 사무실로 와서 스탈린을 데려갔다. 스탈린은 하루의 대부분을 레닌과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레닌의 중요한 조수로서 스탈린은 많은 중대한 문제의 결정에 참여했으며, 관건적 시기에 레닌을 지지했다.

 

1917년 11월 초, 볼셰비키 당내에서 정권 구성 문제를 놓고 이견이 발생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은 "사회당 일색의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레닌과 당내 대다수는 반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카메네프, 밀류틴, 지노비에프, 리코프, 노건 등 당내의 소수 사람들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으로 연합 정부를 구성하길 원한다며 중앙위원회 내에서 반대파를 형성했다. 그들의 이 같은 생각은 레닌을 포함한 대부분의 당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당 중앙은 11월 2일 중앙 내 반대파 문제에 대한 전문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반대파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3일, 레닌은 중앙위원회 다수파가 소수파에게 서면으로 중앙위원회의 결의에 복종할 것을 서약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작성했다. 스탈린과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최후통첩에 서명했지만, 반대파는 서면 보증을 제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11월 4일 중앙위원회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11월 8일 심야, 인민위원회와 군사혁명위원회는 합동회의를 열고 레닌, 스탈린, 육군인민위원 N. V. 크릴렌코에게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N. N. 두호닌 장군과 직통전보를 통해서 담판을 진행할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레닌은 7일 두호닌에게 보낸 전보 원고에 서명해 교전국사령부에 정전 협상을 즉각 제안해 수시로 인민위원회에 협상 진전 상황을 보고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두호닌은 소비에트 정권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휴전 협상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9일 새벽 2시, 레닌, 스탈린, 크릴렌코는 함께 페테르부르크 사령부에 와서 직통 전보를 통해 두호닌 장군에게 무엇때문에 휴전협상을 지연시켰는가고 물었다. 두호닌은 정부의 명령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거듭 회피했다. 두호닌은 그에게 즉각 휴전담판을 시작할것을 단호히 요구했을 때 명령에 복종할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레닌, 스탈린, 크릴렌코는 두호닌의 총사령관직 해임을 발표했다. 새벽 4시 30분, 그들은 차를 몰고 육해군방송국에 와서 방송을 통해 이미 두호닌을 해임하고 크릴렌코가 최고사령관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스탈린의 이런 특수한 역할 때문에 레닌이 과로로 12월 24~27일 아내 크루프스카야와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핀란드 '할리다' 요양원에서 휴가를 보낼 때, 스탈린은 레닌을 대신해서 임시로 인민위원회 의장직을 맡았고 두 차례 인민위원회 회의를 주재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기간에 레닌은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귀중한 숨통을 틔우고, 국민경제를 재편하고 건설하며, 적군을 편성하여 젊은 소비에트정권을 공고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평화회담에서 ‘싸우지도 말고, 휴전을 체결치도 않는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반면 부할린을 위시한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평화조약 체결을 결연히 반대하면서 유럽 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 국제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전쟁을 주장했다. 스탈린도 한때 "평화조약을 맺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간적인 입장을 취했다. 레닌의 심한 비판을 받자 스탈린은 태도를 바꿔 평화조약을 논의하는 모든 회의에서 레닌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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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오른쪽부터: 소콜니코프, 트로츠키, 앞줄왼쪽부터: 카메네프, 조페. 1918년3월3일 '스트-리토프스크평화조약' 서명당시의단체사진

 

i이밖에 스탈린은 이 시기에 제헌회의를 해산하고 (부할린과 함께) <피착취노동인민선언>을 기초하고, <러시아연방사회주의공화국 헌법총강>을 독립적으로 기초하는 등의 사업에 참여하였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러시아 건국 초기 업무에서 이미 그가 정력이 넘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생산적인 실무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레닌 곁에서 일하는 며칠 동안 레닌은 그의 능력과 업무 태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히 레닌은 많은 면에서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는 내전과 외국 무장간섭 기간에 레닌이 그를 중용한 것에서 더욱 똑똑히 알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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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의 부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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