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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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서거한 후 소련의 주요 당정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레닌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는 첫째 레닌을 기리고 추억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를 통해 레닌주의의 해석자이자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레닌이 세상을 떠난 지 두 달여 만에 스탈린은 4월 초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레닌주의 기초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일련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맑스주의다. 정확히 말하면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략,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전략"이라고 레닌주의에 관한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지노비예프의 견해를 거명하지 않으면서 비판했다. 지노비예프는 "레닌주의는 제국주의 전쟁 시대와 농민이 다수인 나라에서 직접 시작된 세계혁명 시대의 맑스주의"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 정의가 러시아의 '농민성'과 '후진성'을 강조하여 레닌주의를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의 산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는 레닌주의의 국제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스탈린의 정의는 '혁명'과 '노동자계급 독재'를 강조하고, 레닌주의는 각국의 혁명운동 경험을 요약한 것이며, 이론과 전략이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적용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발전한 레닌주의의 측면, 특히 레닌의 새로운 경제정책(NEP)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해석은 분명히 단편적인 측면이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논할 때, 스탈린은 한 나라의 노동자계급이 정권을 잡을 수는 있지만, 이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같은 소농이 우세한 국가에서 한 나라가 사회주의를 완전히 건설하려면 "적어도 몇 개의 국가 내에서 혁명의 승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민문제에 관해선, 그는 이 문제가 레닌주의의 기본 문제는 아니며 '파생적 문제'라고 간주했다. 레닌주의의 기본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말했다.

 

이것은 레닌의 본 뜻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레닌은 농민문제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폐기하고 신경제정책을 시행한 이후, 농민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농민이 결정적 요소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닌이 <협동조합에 관하여>에서 강조한 것도, 농민문제를 해결하고 흩어져 있는 소농경제를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끄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스탈린은 연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구" 라며 '도구론'을 제출했다.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도구다", "의지의 통일이며, 어떠한 파벌 활동과 당내 권력 분산 현상도 배척해야 한다", "자기 대오 내의 기회주의자들을 숙청함으로써 공고화 된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 승리를 가속화 하는 조력이자 도구"라고 말했다.(<스탈린전집>6권 , 96-100, 148~162쪽 참조)


이밖에도 스탈린은  연설에서 민족문제, 전략과 전술문제 및 당의 사업작풍 등에 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했다. 그는 전략과 전술 문제를 상당 부분 다루면서 (국제) 사회민주당에 타격을 줄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논증했다. 그는 10월 혁명 이후 시작된 혁명단계에서 세계 혁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이 시대에 "주요 타격 방향은 소부르주아 민주파를 고립시키고, 제2 인터내셔널 소속의 당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 당들은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이 정책의 기본적인 기둥"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회민주당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는 일관돼 있다. 
스탈린은 일찍이 1923년 독일 10월 함부르크 노동자 무장봉기 직전에 독일공산당에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와 우파의 분열을 가속화 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독일 공산당의 임무는 "좌파와 우파의 분열을 가속화하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사회민주당 좌파 지도자들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 지도자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영향은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소련공산당 역사문제> 1987년 제10호 참조)

 

독일에서 10월 무장봉기가 시작된 후 코민테른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여러 차례 회의를 소집하여 독일의 혁명적 정세를 토론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의 혁명적 전환이 이미 다가왔고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성숙되었다고 보고, 독일공산당과 좌파사회민주당 당원들에게 즉각적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연합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혁명적 정세는 러시아공산당 지도자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독일혁명은 그해 11월 실패했다. 독일혁명이 실패한 후 스탈린, 지노비예프 등은 다시 독일혁명이 실패한 원인은 사회민주당원의 배신과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의 ‘우경기회주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4년 1월 24~25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사회민주당과 결사적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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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스파라타쿠스 봉기 때의 바리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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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의 바리케이드 옆을 지키는 국가방위군 병사들


레닌의 병이 위중한 이후 스탈린과 지노비예프는 점차 코민테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의 이 같은 사상을 코민테른에 강요하였다. 1924년 6~7월 코민테른 제5차 대회가가 제정한 <전략문제 (요강)>에서 사회민주당을 부르주아계급의 제3당으로 자본주의제도의 기둥 중 하나라고 간주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부르주아정당 특히 사회민주당은 다양한 정도의 파시스트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파시즘과 사회민주당은 대자본 독재의 양날의 칼이다. 그러므로 사회민주당은 영원히 노동자계급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믿음직한 동맹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의 이 같은 표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1924년 9월 < 국제정세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파시즘은 사회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부르주아에 의존하는 전투조직이다. 사회민주당은 객관적으로 파시즘의 온건파이다......이 조직들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한다. 그들은 앙숙이 아닌 쌍생아이다. 파시즘은 이 두 주요 조직의 보이지 않는 정치적 연합이다. 그것은 전후 제국주의 위기 상황에서 생겨났으며, 그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투쟁하는 것이다."(<스탈린전집>6권, 246쪽)

 

스탈린의 이러한 관점은 레닌의 혁명적 정세의 발전에 입각해 제기하는 노동자계급 통일전선 수립과 공동투쟁 전략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찍이 코민테른이 창건된 첫 몇 년 간은 레닌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에 대해서 분열과 타격 정책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각국의 사회민주당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조국 보위' 입장을 취하였으며, 또한 부르주아계급 내각에 참가하여 군사지출 예산 등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민테른은 설립 당시부터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20세기의 20년대 초에 이르러 국제혁명 정세에 있어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과 파업투쟁이 잇달아 실패하였다. 레닌은 적시에 경험과 교훈을 종합하여 전략 전환을 실시하였다.

 

1921년 6~7월에 소집된 코민테른 ‘제3차 대회’는 레닌의 사상에 근거하여 "군중 속으로 들어가라",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쟁취하자"는 슬로건을 제출하고 직접적인 투쟁에 참가하였다. 1921년 12월, 레닌은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에 <통일전선 전략에 관한 결정 초안>을 제출하였다. 지노비예프는 레닌의 이 결정 초안에 근거해 <노동자통일전선에 관하여, 제2인터내셔날, 제2.5인터내셔날과 암스테르담국제노동조합에 참가한 노동자 및 무정부주의 생디칼리즘 기구의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문서를 제정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본주의와 투쟁하려는 모든 노동자들과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공동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2년 4월 베를린에서 이들 세 개 국제 대표들이 참가한 회의가 열렸다. 레닌은 코민테른과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에게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은 보류하면서, 논쟁이 될만한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가장 논쟁이 없는 데에서 공동행동을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확대회의는 3개 국제대표회의 참가를 위한 결의안 초안에서 "제2인터내셔널과 제2.5인터내셔널 지도자를 세계 부르주아계급의 앞잡이라고 부르는 단락"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레닌전집> 2판 42권, 434-43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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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레닌이 서거할 때까지 3개 국제조직의 연합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지만, 레닌의 통일전선전술은 분명히 코민테른에 참가한 각 회원 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스탈린, 지노비예프가 사회민주당을 타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 레닌의 사상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런 통일전선전술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이르러서야 일정 정도 수정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레닌이 죽은 후에 트로츠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오만하고 언변이 좋은 트로츠키는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레닌 사망후 처음 몇 달 동안 그 또한 레닌을 회상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고, 1924년 4월에  <레닌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집대성되어 출판되었다. 트로츠키는 업무 중 레닌과 비교적 많은 접촉을 가졌는데, 레닌과 적지 않은 이견과 논쟁도 벌였다. 게다가 그는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반대파'의 우두머리로 여겨졌기에,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많은 관심을 끌었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레닌을 찬양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높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변명했다. 예를 들어 그는 1917년 5월 자신이 귀국 후 처음 레닌을 만났을 때 "나는 레닌에게 나와 그의 4월 테제 및 그가 귀국한 후 취한 모든 방침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고, 나는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즉, 즉시 '개인' 자격으로 당의 조직에 가입하거나, 혹은 지역연합파의 우수 분자를 데려오기 위해 시도하든가......이렇게 되면 정치적 연합은 조직 연합에 앞서게 된다"라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여기에서 당시 볼셰비키와 연합해서 레닌 쪽으로 향하려는 그의 소망을 사실적으로 반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역할을 부적절하게 너무 부각시켰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트로츠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담판을 회상하면서 "싸우지 않고, 휴전하지도 않는다"는 그의 입장에 대해 적극 변명했다. 그는 "당에게 있어 절충한다는 결정은 평화조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다리여야만 한다"라면서, "만약 절충이란 표현이 없었다면 대다수가 혁명전쟁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24년 9월, 트로츠키는 코카서스 로보츠크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자신이 이전에 쓴 일부 문장과 연설을 엮어서 단행본 <1917년>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 서문으로 <10월의 교훈>을 썼다.


트로츠키는 이 서문에서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의 당의 전략 운용에 관한 러시아공산당의 경험과 교훈을 서술하였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지명하여 비판하였으며, 당의 다른 일부 지도자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1917년 귀국하기 직전 당시 당내 많은 지도자들과 [프라우다] 편집부는 호국주의 입장을 취했다고 말했다. 4월 대표자회의에서 레닌은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소비에트를 통한 정권 탈취를 주장했는데, 당내 우파는 소비에트를 부르주아의회 쪽으로 이끌려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공개적으로 '우파'라고 지칭하며, 이들이 '예비국회' 참가를 주장하는 것은 당시 결정된 무장봉기를 보이코트하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또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10월 11일 무장봉기에 반대하여 <시국에 관하여>를 쓴 편지와, 10월 18일 <신생활>에 발표한 성명을 비교적 많은 필묵으로 묘사하면서 두 사람의 우파적 입장을 입증했다.


트로츠키는 10월 혁명의 경험과 교훈을 총결산하고 레닌과 그 자신의 전술 운용에 관해 이야기할 때, 또 일방적으로 10월 무장 봉기에서 자신의 역할을 높이고 레닌의 공적을 폄하했다. 그는 10월 9일 "페테레스부르크 소비에트가 수비대 3분의 2를 전선으로 이동시키라는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했을 때부터 우리는 사실상 무장봉기에 들어갔다. 당시 페테레스부르크에 없었던 레닌은 이런 사실의 모든 의미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의 당시 모든 편지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서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0월 16일 페테레스부르크 혁명군사위원회가 설립된 후, "봉기의 결말은 이미 최소한 4분의 3은  결정되었다." 따라서 레닌이 이끄는 "10월 25일의 봉기는 보충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트로츠키 어록>, 544-60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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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트로츠키와 미국인 동지들이 멕시코에서 찍은 기념사진


트로츠키가 자신을 10월 혁명의 중심 즉 지도적 지위에 놓고 레닌을 폄훼하려 한 태도는, 당시 사람들로선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글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지명하여 비판하면서 그들을 우파라고 비난하고, 또 당내 기타 일부 지도자들에 대해선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채 비판하였다. 비록 그가 제기한 사실이 부분적으로 사실일지라도, 그는 낡은 장부를 다시 꺼내 든 셈이다. 또한 레닌이 이미 그들의 이 같은 잘못을 용서한 이후 다시 그런 문제를 제기했기에,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그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겼다. 특히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얼마 전 당내 논쟁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이때문에 트로츠키는 그들의 '상처'를 다시 들춰내 더욱 분개하게 만들었다.


트로츠키의 이 서문은 그의 <레닌에 관하여>라는 책과 함께, 발표 후에 당내에서 또 한 차례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트로츠키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과 부하린 및 기타 볼셰비키들의 비판도 받았다.


가장 먼저 나서 트로츠키를 비판한 사람은 카메네프였다. 그는 10월 18일 당내 열성분자들이 참가한 모스크바 시위원회에서 <트로츠키주의냐 레닌주의냐?>라는 제목으로 보고를 했다. 그는 보고에서 1903년부터 10월 혁명까지 기간에 트로츠키가 행한 레닌과의 갈등을 열거하며, 트로츠키의 이 글은 "볼셰비즘을 위한 것이 아닌" "반당분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묘하지만, 기본적으로 부정확하고 사실과 상반된 식으로 2월부터 10월까지의 이 모든 사건을 서술했다." 이러한 트로츠키주의는 결코 레닌주의가 아니며 "한 역사적 조류의 전형적 표현"이라면서, "멘셰비즘의 대리인이고, 멘셰비즘이 노동자계급의 이러저러한 계층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이자, 멘셰비즘의 종복"이라고 언명했다.(<레닌주의냐 트로츠키주의냐?>, 삼련서점 1964년판, 1-65쪽 참조)


11월 19일, 스탈린은 치밀한 준비를 거쳐서 전(全)소련노동조합 중앙위원회 공산당조직 전체회의에서 <트로츠키주의냐, 레닌주의냐>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10월 중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비밀을  누설한 사건을 얼버무리면서 그들 두 사람을 옹호했다. 그들의 잘못은 모두가 알고 있고 우연적인 것이라며, "의견 차이가 불과 며칠밖에 지속되지 않은 것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레닌주의자이고 볼셰비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탈린은 10월 무장봉기에 있어 트로츠키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무장봉기에서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순 없지만, 그는 "어떤 특별한 역할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당시 페테르스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이끄는 상응하는 당 기관의 의지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왜 10월 혁명과 10월 혁명 준비, 레닌과 레닌의 당에 관한 이 모든 기이한 얘기를 조작했을까? 트로츠키는 왜 그 반당적인 새로운 저작을 발표했을까? 지금 당이 논쟁을 원하지 않고 있을 때, 당이 많은 긴급한 임무로 바쁠 때, 당이 일치단결하여 경제를 회복하는 일을 해야 하며 낡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할 필요가 없는 이런 때, 이들 저작의 의도, 임무와 목적은 무엇인가? 트로츠키는 왜 당을 또 다시 새로운 논쟁으로 끌고 가고 있는가?”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자료를 보면, 이 '속셈'은 바로 트로츠키가  자신의 저작을 통해 또 하나 (또 하나!) 의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건을 창조하여 트로츠키주의로 레닌주의를 대체하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당의 위신을 '절박하게' 파괴하고, 봉기를 거행한 당 간부의 위신을 파괴하려는 것은, 당의 위신을 파괴하는 것에서부터 레닌주의의 위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옮겨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더 나아가 "트로츠키의 새로운 저작은 트로츠키주의를 회복하고 레닌주의를 '이기려는' 것이며,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특징을 밀반입하고 배양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레닌이 죽을 때 때마침 나타난 새로운 트로츠키주의며,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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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스탈린은 "당의 임무는 트로츠키주의라는 사조를 매장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이 트로츠키 등을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스탈린은 "반대파 처벌과 분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동지들, 이건 헛소리다. 우리 당은 강력하며, 어떤 분열도 용납하지 않는다. 처벌에 대해서는 나는 단호히 반대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며, 부활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사상투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전집>6권, 281-309쪽 참조)


11월 30일, 지노비예프도 [프라우다]에 <볼셰비즘인가 트로츠키주의인가>라는 글을 발표했다. 지노비예프는 자신이 10월 혁명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지만, 그는 이 실수를 며칠 안에 고쳤다고 말했다. 그는 트로츠키가 그들 두 사람을 당내 우경화라고 비난한 것에 대해 특히 화를 냈다. 그는 볼셰비키의 역사를 아는 모든 사람은 "우익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2일, 부하린은 [프라우다] 편집부의 명의로 <어떻게 10월의 역사를 쓰지 않을수 있겠나>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여기서 트로츠키가 레닌주의를 수정하고 볼셰비키의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며 규탄했다. 그후 1925년 1월까지 소련의 신문과 간행물들은 트로츠키를 비난하는 글들이 쇄도했다.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각종 회의에서 트로츠키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은 부브노프, 브롱지, 미코얀, 키로프, 제르진스키, 쿠시넨, 구셰프, 몰로토프 등 볼셰비키당과 코민테른의 저명한 활동가들이다.


전국에 있는 당원들은 모두 트로츠키를 규탄하는 운동에 말려 들었다. 이처럼 일방적으로 성토하는 분위기 속에서 공개적으로 트로츠키를 변호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트로츠키는 정치적으로 극도로 고립되었다.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자 사람들은 갈수록 궁금해졌다. 트로츠키는 이 같은 그의 공격에 대해 무슨 이유 때문에 나서서 부정하지도 응답하지도 않는 것일까? 이런 이상한 침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유죄라는 생각을 갖게 할 뿐이었다. 때마침 신문은 1913년 4월 그가 치흐제에게 보낸 편지와 그해 우리츠키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레닌을 난폭하게 공격했는데, 이것은 트로츠키가 레닌주의를 트로츠키주의로 대체하려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더욱 믿게 했다.


늘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과 <레닌에 관하여>의 발표가 뜻밖에도 이렇게도 커다란 반대의 폭풍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같은 압력 하에서 그의 몸도 확실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의사는 그에게 코카서스에 가서 한동안 쉬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그는 크렘린궁에 있는 자신의 숙소를 떠나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다. 1925년 1월 15일, 그는 곧 소집될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편지  한통을 보냈다. 그는 서한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으며, 그에 대한 특수한 노선 (즉 '트로츠키주의') 집행과 레닌주의를 수정하려 한다는 비난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업의 이익을 위해 나의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직을 조속히 해임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적었다.


1925년 1월 17~20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가 합동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트로츠키는 병을 핑계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번 전원회의의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트로츠키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선 당내 주요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 기회를 틈타 정치적으로 트로츠키에게 파멸적 타격을 주려고 했다. 일찍이 1924년 말, 지노비예프를 위시한 레닌그라드 주 위원회는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하는 결정을 통과시킨 적이 있다. 카메네프도 이 결정에 동의했지만, 이 결정은 당 중앙에 의해 통과되지 않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또한 공산청년단 중앙위원회를 조종하여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하는 결정을 통과시켜, 당 중앙에 압력을 가하려는 시도도 했다. 이는 분명 당의 조직원칙에 위배 되는 행위로서, 당 중앙은 단호하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 이 같은 행위를 제지하고 공청단 중앙 책임자 15명의 직무를 해제시켰다.

 

이번 전원회의에서도 지노비예프를 위시한 레닌그라드 사람들은 카메네프와 함께 즉각적인 트로츠키의 정치국원직 해임을 건의했는데, 스탈린 등은 이를 주저하지 않고 부결시켰다. 스탈린은 나중에 이 결정에 대해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우리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책을 제거하는 것이 당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거하는 방법, 피를 흘리는 방법ㅡ 그들은 바로 피를 흘릴 것을 요구했다ㅡ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며 전염성이 있다. 오늘 한 사람을 제거하고, 내일 다른 사람을 제거하고, 모래는 세 번째 사람을 제거한다. 그럼 우리 당내에 또 어떤 사람이 남을 것인가? (<스탈린전집> 7권, 317쪽)

 

이번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트로츠키에 대해서 엄격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가 말로만 당 규율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행동에서 레닌주의에 반대되는 그 어떤 행동도 무조건적으로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원회의는 "트로츠키는 소련혁명군사위원회에서 계속 일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트로츠키의 중앙위원과 정치국 위원의 직무를 유지토록 하였다. 트로츠키에게 당의 결의를 다시 훼손하거나 집행하지 않으려 할 경우,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에 계속 머물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경고를 하기로 했다.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군대 내의 직무를 누가 대신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대신해서 육해군 인민위원과 소련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직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나오자 스탈린은 즉각적으로 노여움을 드러냈는데,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즉시 이 불만에 주목했다. 표결에 부쳐져 카메네프의 이 제안은 다수에 의해 부결되었다. 그런 다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푸룬제가 이 두 직무를 승계하는 것을 지지했다. 스탈린은 푸룬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토론을 거쳐 푸룬제가 제1 책임자를 맡고, 보로실로프가 제2 책임자를 맡는데 동의했다.

 

1925년 1월 26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의견에 따라 트로츠키를 소련 혁명군사위원회 주석과 육해군인민위원의 직무에서 해임하고, 그 대신 푸룬제*를 이 직위에 임명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푸룬제가 수술 도중 사망하자, 결국 보로실로프가 육해군인민위원과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직을 승계했다.

 

1925년의 프룬제.png
1925년의 푸룬제

 

* 푸룬제(M.V.Frunze, Mikhail Va-silyevich, 1885-1925). [소련의 정치가이자 붉은 군대의 통솔자 겸 군사이론가. 그의 군사방면 저작은 이후 군사과학의 발전에 비교적 큰 영향을 주었음.

 

이로써 트로츠키와의 싸움이 일단락됐다. 트로츠키는 해임된 후 첫 몇 달 동안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5년 5월, 그는  외국 자본가에게 임시로 빌려주어 경영케 하는 임대(租让)위원회 주석, 전기기술관리국 국장, 공업과학기술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런 직무들은 비록 그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임명을 받아들여 한동안 이 같은 실제적인 경제사업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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