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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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문학박사이며 시집 <송전탑>(2010)의 저자인 지창영 작가가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를 연재한다. 쉽고 풍부한 사례를 들었기에 문예창작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금융가 월 스트리트에는 유명한 상징물로 ‘돌진하는 황소’ 동상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아르투로 디 모디카의 작품으로 그 역동성은 주식시장의 활황을 상징하고 뿔을 밑에서 위로 들어 올리는 모습은 주식의 상승세를 나타낸다.

 

어느 날 이 동상 앞에 크리스틴 비스발이 만든 ‘두려움 없는 소녀’라는 동상이 추가로 세워졌다. 크기는 황소상(높이 3.35m)보다 훨씬 작지만(1.27m),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다. 황소는 본의 아니게 소녀에게 돌진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고, 폭력성과 공격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황소상 작가는 소녀상으로 인해 황소상의 원래 이미지가 변질됐다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1년여 간의 논쟁 끝에 소녀상을 이동하여 설치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는 배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 주는 사건이다. 

 

황소상은 간혹 각종 단체의 시위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붉은 잉크를 묻히고 황소상 주변 여기저기에 누워 있으면 끔찍한 희생자의 이미지가 연출된다. 황소 앞에 바나나를 잔뜩 쌓아 놓고 고릴라가 멀찍이서 바라보는 모습을 배치하면 탐욕과 독점, 불평등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지창영-1.jpg

 

글쓰기에서 배치를 잘 활용하면 작가의 메시지를 훨씬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글의 소재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느낌과 메시지가 달라진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핵심 내용과 분위기가 잘 살아나도록 하려면 어떤 소재를 어떻게 배치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연필을 예로 들어 보자. 그 옆에 지우개를 배치하면 쓴 것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수해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뜻이므로 여유와 융통성을 느끼게 한다. 연필을 귓바퀴에 꽂으면 목수나 건축가 등 특정 분야 전문가를 생각나게 한다. 연필 옆에 알약이나 칼 등을 배치하면 유서를 써 놓고 죽기라도 할 작정인가 하는 생각을 유도하여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신동엽의 시 「진달래 산천」은 전쟁의 상처를 처절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강산에 전쟁이 웬 말이냐, 아까운 청춘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 그 옛날 우리는 한 형제로 외세와 싸우지 않았느냐, 불쌍한 가족들을 남겨 두고 우리가 왜 산으로 들어와서 동족끼리 싸워야 하느냐는 등 수없는 질문과 항변 그리고 설움 등이 숨어 있다.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내뱉지 않고 있다. 관련 장면들을 마치 흑백 무성영화처럼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 장면들이 독자의 뇌리에 살아 움직이면서 곧바로 가슴을 때린다.

 

신동엽.png
신동엽(1930~1969)

 

이 시를 배치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글쓰기 공부에 유익할 것이다. 길, 진달래, 바위, 나비 등이 1연에 배치되어 자연경관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2연에는 장총과 잠든 사람이 배치되어 본격적인 사연을 말하기 위한 계기가 마련된다. 3연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후고구려 시대 외세와 싸우던 장수들을 배치하여 바위의 사연을 말함으로써 현재의 비극성과 대비시킨다. 이어지는 연들에서도 산으로 간 사람들, 두고 온 식구들, 담배, 잘린 발목, 과수원, 폭격, 노을 등을 배치하여 전쟁의 비극을 그림처럼, 영상처럼 펼쳐 놓는다. 

 

각각의 연에서는 여러 단어들이 배치되어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다면 시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연과 연이 적절히 배치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이룬다. 특히 싸우다 죽은 사람의 모습이 2연과 8연 그리고 12연에 반복 배치되어 있어 비극성을 대변한다. 반복적으로 배치되었지만, 똑같은 모양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2연에서는 ‘잠이 들었’다고 표현하여 죽음을 암시만 했다면 8연에서는 ‘서늘히 잠들어’ 있다고 하여 죽음에 더 접근했고 마지막 12연에서는 ‘피 흘리고 있었’다고 하여 죽음을 확인시켜 준다.

 

독자의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에 이르는 글을 쓰고 싶다면 배치를 잘 활용해 보자. 배치는 월가의 황소도 다양한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은 배치가 잘 된 시로서 창작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진달래 산천(山川) /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지창영.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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