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저자)
등록일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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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되는 프랑스 공수부대.


3.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개과정과 승리

 

1953년 11월 20일 오전 6시 30분, C-47 정찰기 1대가 디엔비엔푸 마을을 선회하며 폭격을 가했고, 이후 64대 이상의 프랑스군 정찰기에서 공수부대가 투하됐다. 당시 이들이 낙하한 곳에는 베트민 2개 중대가 있었으며, 양측의 전투가 발생했다. 프랑스군도 최소 4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베트민의 2개 중대도 적잖은 병력이 손실됐다. 이후 앙리 나바르는 이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최소 11,000명 이상의 병력을 디엔비엔푸에 배치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를 세운 프랑스군 중 일부는 “이 요새에 겁먹은 베트민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프랑스군의 망상이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망상은 당시 프랑스 여론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공수부대의 투하가 프랑스에 알려지자 『로로르』라는 프랑스 신문은 1면에 “앙리 나바르가 베트민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공수부대원이 디엔비엔푸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군대의 용맹과 지도자의 권위를 확인했다.”라는 표제를 달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프랑스는 베트민의 군사적인 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딩인비엔푸 전투를 회고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소련제 트럭을 활용했고, 5만 명의 병력과 2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동원했으며, 산길을 지나 물자와 화기를 운반했다. 이들은 중포와 방공포도 운반해 기지에 배치했다. 베트민 병사들은 직접 포탄을 머리에 이고 날랐으며, 대포를 맨손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어떤 베트민 병사는 대포를 옮기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말 그대로 베트민에게 있어 이것은 총력전이었다. 전 민중이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했다. 당시 베트민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항공기가 정찰하면, 풀숲이나 밀림에 숨었으며, 정찰기가 사라진 이후 다시 진격했다.

 

대포를 운반하는 베트민 병사들을 표현한 모형.jpg
대포를 운반하는 베트민 병사들을 표현한 모형

 

프랑스군 디엔비엔푸 요새에 대한 본격적인 제1차 공격은 1954년 3월 13일에 시작됐다. 밀림 속에 잠복해 있던 베트민군의 대포가 계곡 바닥에 모여 있는 프랑스군에게 분당 50발의 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1차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활주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물자보급과 병력 보급은 프랑스군의 항공기로부터 낙하산 투하에 의존하게 됐으며, 프랑스군 포대 지휘관인 피로트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충격을 받아 스스로 자살했다.

 

1954년 3월 15일에는 프랑스군의 요새 가브리엘과 앤 마리 이 두 곳이 베트민군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프랑스군은 병력을 증강했으며, 전투를 통틀어 총 16,200명의 프랑스군 병력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3월 27일 베트민은 프랑스의 엘리안느 1기지를 확보했으며, 활주로 중앙에 포탄을 퍼부었다. 3월 30일 베트민은 이른바 A1 고지라 불린 엘리안느 2기지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A1 고지에 견고한 지하 벙커를 건설했으며,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를 배치해 항공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며 진지를 지켰다. 베트민군은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5일간 연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고지의 절반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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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민 측 대공포 부대

 

이후 A1 고지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있다가 5월 1일 다시 시작됐다. A1 고지가 완벽히 점령당한 것은 1954년 5월 6일 베트민 부대가 프랑스군의 철통같은 방공호에 1,000kg의 폭탄을 터뜨린 다음 고지를 점령하면서였다. 

 

다음 날인 5월 7일 오후 4시 반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비밀 터널을 굴착하고 1톤의 지하 폭발물을 설치하여 진지 대파 후 최후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베트민은 1차 공격을 실행한 이후 프랑스군의 거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베트민은 대공 방어 진지를 증강했으며, 프랑스군 수비대의 방어 진지는 점차 감소했다. 1954년 3월 29일 베트민은 비행장 동쪽과 남쪽 그리고 남영강 동쪽 고지를 점령했으며,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가한 뒤 4개 주요 진지를 점령하고자 지뢰밭과 철조망 방어 지대를 지나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희생이 급증하자 신병들은 밀림 속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4월 1일 지압 장군이 디엔비엔푸에서 직접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군의 막강한 항공 화력 및 공세로 베트민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압 장군은 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하여 적은 인원으로 프랑스군 진지에 바짝 다가가서 참호를 부수는 작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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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베트민 사령부가 있는 곳

 

1954년 4월 10일 이후 잠시나마 디엔비엔푸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는데, 그 동안 프랑스 공군은 디엔비엔푸에 병력을 증강하고 탄약과 식량을 공중 투하했다. 대략 4,000명 이상의 최정예 공수부대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중에 증원됐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급품은 번번이 베트민 쪽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압은 휘하 병력 3만 5,000명과 압도적인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대공 화기로 프랑스군 참호를 격파했다.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이 마지막 공세에 나선 것은 1954년 4월 29일에 이르러서였다. 5월 초부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의 외곽 방어선까지 돌파했으며, 내부의 프랑스군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의 내부 방어진지가 하나씩 함락되었고, 앞서 언급한 A-1 고지도 그렇게 함락됐으며, 디엔비엔푸의 지휘관 드 카스트리가 있던 지휘부 요새도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지압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년 5월 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 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시,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번, 509번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시,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분,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다음과 같은 축하서한을 보냈다.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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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함락된 프랑스군 참호 실제 사진

 

결과적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293명 전사, 6,650명 부상 그리고 1,729명이 실종됐다. 대략 11,721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으며, 미군 2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트민의 경우 최소 4,020명에서 많게는 8,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략 1만 명 정도 전사했다고 추산하는 경우도 있다. 병력 5만 5,000명 중에 대략 2만 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디엔비엔푸에서만 최소 62대의 프랑스 측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그 시기 다른 전선에서 베트민은 177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 병사들이 보인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당시 적이었던 프랑스군 지휘부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던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을 마음속으로 존경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베트민에게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군 포로 행렬.jpg
베트민에게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군 포로 행렬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전쟁 준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분대에서 중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보병이었다고.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병력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프랑스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미군도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보병이었다.”

 

4. 미국 제국주의의 프랑스 식민지 전쟁 옹호 및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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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엔비엔푸 전사자 묘역


디엔비엔푸 전투는 100년간 베트남에서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아주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라는 역사에는 주목해야할 또 다른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의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이다. 사실 미국이 처음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9년 미소냉전이 본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게 됐다. 즉, 여기서 반공의 논리가 작용했으며, 프랑스도 이 전쟁을 반공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 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 전쟁이라는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반공과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라는 자신들이 가진 모순 그 자체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년 1,490억 프랑에서 1952년 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년에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1954년에는 이 수치가 대략 80%까지 상승했다.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미군 정규군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이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규모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와중에도 확인이 된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및 프랑스 지도부는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것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술핵무기 3발을 사용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옵션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회고록 내용을 보자.

 

“1954년 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앞서 언급한 전술핵 관련 부분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미 공군 참모총장 네이선 트와이닝)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한 미군도 있었다. 이들은 민간업자로 위장한 CIA 요원이었으며, 이들 중 2명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중 한 명은 2004년 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맥거번 2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민간 조종사로 CIA에 고용된 인물이었다.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식민지 지배자 프랑스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CIA 요원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던 셈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프랑스의 부도덕한 식민지 유지 전쟁을 반공이라는 논리로 포장하면서 도왔던 것이다. 따라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은 마땅히 규탄 받고 강력히 비판 받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5.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의 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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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에 있는 승리 기념상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식민주의적 지배에 맞서 다시 한번 저항해야 했지만, 디엔비엔푸 전투가 제3세계 인민들의 탈식민화 운동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특히나 프랑스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시기 미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영웅주의를 칭송했다면,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 전우들의 승리를 환영했다. 어찌됐든 디엔비엔푸 전투는 냉전시기 탈식민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앞으로도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다.


2024년인 올해는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베트남 친구들이 많은데 이 중 한 사람은 열병식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친구들의 페이스북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념하는 여러 포스팅들을 쉽게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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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열병식

 

이제 70년도 더 지난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과연 현재성이 없을까? 글쓴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 나라에선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맞선 항쟁들과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맞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영미 제국주의자들이 후티를 축축한다는 명분을 들어 예맨을 폭격했지만, 이들의 저항 앞에 제국주의자들은 먼저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여름 니제르에서 시작된 반프랑스 봉기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거쳐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고 있다.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움직임에 훼방을 놓고 간섭을 하는 주체는 미국 제국주의 자신이다. 마치 이들이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도왔듯이 말이다. 즉, 지금도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에 맞선 저항이 이른바 서구 일극패권체제에 반대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전은 지금도 의미하는 바다 크다.

 

지난 2023년 1월 글쓴이는 베트남을 여행하며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디엔비엔푸 승전 박물관과 A1 고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한 베트민 사령부 진지 및 프랑스군 사령관이 항복한 참호까지 두루 관광했다. 글쓴이는 베트남 민중의 항쟁 유적지를 돌아보며 깊이 감동했다. 현재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세는 점차 반제국주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항쟁이 보여주듯이, 디엔비엔푸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또 다른 국가에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제3세계 해방전사들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는 막대하다.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반제항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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