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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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한다는 면에서 작가와 사기꾼은 닮은 면이 있다. 사기꾼은 동기가 불순하지만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굳이 사기꾼을 예로 드는 것은 독자에게 잘 기억되게 하려는 것이니 이해를 구한다.)

 

사기를 치려면 상대가 자신의 말에 혹하게 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로써 감동을 주려면 독자가 시에 매료되게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사기꾼이나 시인이나 구체적인 정황을 마련해야 한다. 

 

그저 돈 잘 벌게 해 주겠다는 말로는 쉽게 사기를 칠 수 없다. 최 아무개가 언제 어디에 얼마를 투자했는데 몇 배를 벌었다거나, 고속도로가 어느 지역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역에 투자하면 몇 배를 벌 수 있다거나 하는 등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혹하게 된다. 사기꾼의 말 중 일부는 대개 사실이기도 하다. 즉, 사실을 적당히 섞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쓸 때도 추상적인 말 몇 마디 던지는 것으로는 감동을 주기 어렵다. 작가 자신은 머릿속에 배경이 이미 그려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글이 감동적일지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그런 감동이 전달되지 않는다. 독자는 오로지 문자만으로 시를 감상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공유하려면 독자의 머릿속에 그럴 만한 상황을 그려 주어야 한다. 독자가 그려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장면이 필요하다.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에는 시인의 의도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정황이 잘 그려져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야전병원(第四十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 원 때문에 십(十) 원 때문에 일(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2.png
김수영 시인

 

시 속의 화자는 사회의 부조리는 외면하면서 눈앞의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의 옹졸함에 대하여 자책한다. 독자는 이 시를 읽으면서 어느덧 자기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독자가 자연스럽게 자아비판의 장에 스스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럴 만한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부조리에는 눈을 감고 음식에 불만을 토로하는 나, 언론 탄압과 해외 파병에는 할 말을 못하고 말단 공무원의 부조리만 증오하는 나, 남자답지 못한 일을 한다고 간호사들 앞에서 놀림당했던 나, 결국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인 싸움에서는 비켜서 있는 비겁한 나, 땅 주인에게는 아무 저항도 못 하면서 이발쟁이에게만 반항하는 나, 그런 옹졸하고 작은 시적 화자의 구체적인 모습이 독자의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를 읽다 보면 독자는 어느덧 시적 화자와 일체화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난 2016년 어느 방송사의 뉴스 시간에 ‘앵커브리핑’으로 이 시가 소개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대나 우리 시대나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점에 공감하면서 그의 시를 불러온 것이다.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걸그룹의 사죄…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https://zrr.kr/vxtY 참고)

 

추상적 생각과 구체적 표현.png
추상적 '생각'과 구체적 '표현'

 

만약 시인이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내가 싫다’거나 ‘우리 모두 큰 부조리에 분개하자’는 등의 내용을 그저 추상적인 어휘로 나열했다면 독자는 수긍은 하겠지만 자연스레 공감하며 각성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당위성이나 깨달음 혹은 호소나 주장만으로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함께하기 어렵다. 

 

좋은 시가 되려면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 정황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 정황은 반드시 본인이 겪은 사실일 필요는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이야기나 활용할 수 있다. 다만, 글의 맥락에 잘 어울리면서 설득력이 있도록 배치하면 된다.

 

사기꾼은 나쁜 목적으로 정황을 꾸며서 남을 속이지만, 시인은 좋은 목적으로 정황을 창조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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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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