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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민병래 ('황소와 나비' 대표)
등록일 : 2023.03.15

 

자경단 들이닥친 경찰서의 참극


- 유족 3세 권재익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지 백 년이 흐르면서 확인된 유족 2세는 대부분 세상을 떴고 몇몇 3세가 할아버지 세대를 기억하면서 아픔을 곱씹고 있다. 그중 한 명인 권재익을 수소문 끝에 지난 2월 경상북도 영주역 앞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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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역 앞에서 만난 유족 3세 권재익 그는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살해당한 남성규의 외손자다. ⓒ 민병래

  
 
영주에서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온 그는 중학교 때 외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가 일본 군마현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스치듯 들었다. 고향 사람 하나가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지붕을 뚫고 도망쳐 살아 돌아와 소식을 전해 알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도쿄의 뒤숭숭한 소식은 들었지만 군마현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괜찮으려니 생각했는데 들려온 비보였다.

 

권재익은 그때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기억이 되살아난 건, 2016년 관동대학살 93주년을 앞두고 8월 20일 광화문광장에서 처음으로 공식 추모행사가 열린다는 기사를 접한 때였다. 이후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강효숙 교수가 쓴 논문 <관동대지진 당시 피학살 조선인과 가해자에 대한 일고찰>을 보고 기쁜 마음에 전화를 했고 강 교수의 주선으로 93주년 추도식에 유족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그곳에서 (관동대학살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사무국장 다나카 마사타카도 만나고 시청 한 편에서 관동대학살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감춰진 손톱자국>과 <불하된 조선인>도 보고 또 다른 유족 조영균, 조광환씨 등을 만났다.

그 이후 권재익의 관심은 부쩍 드높아졌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유해를 모셔와 헛묘 대신 제대로 된 묘를 쓰고 싶었다. 2017년 오충공 다큐멘터리 감독의 제안으로 부산 강제동원기록관에서 열린 유족 간담회에 나가 교류하며 유족연합회 결성을 모색했다.

 

2018년에는 오충공 감독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으로 갈 때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편을 이용했는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도착해선 할아버지의 묘비가 있는 군마현 죠도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고 할아버지가 일했던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을 둘러봤다.

 

아라카와 강변에서 재일 동포들이 풍물을 치며 넋을 기리는 행사에도 참여하고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일본의 봉선화 회원과도 만났다. 중국인 유족과도 교류하며 중국인 유가족 연합회가 일본 외무부와 국회를 항의 방문하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일본에서 느낀 또 다른 아픔은 관동대학살을 기리는 일에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 따로 움직이는 분단의 현장을 만난 것이다.

권재익의 외할아버지 남성규는 피해자 중 이름과 학살 경위가 밝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최승만의 <극웅필경>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상세히 적혀있다.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244번지 출신인 그는 1922년 군마현으로 갔다. 당시 경상북도 사람들이 군마현으로 많이 갔는데 모집인을 따라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일했던 곳은 군마현에 있는 우에노-타카사키센(上野-高崎線)의 철로 공사 현장, 남성규는 철도성의 청부업체인 녹도조(廘島組) 혹은 신류천 사리(神流川 砂利)라는 회사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마현에서 자경단의 만행이 심해질 때 그는 신류천 사리회사의 사장 다나카 치요키치(田中千代吉)의 주선으로 다른 조선인 노동자 14명과 함께 군마현 후지오카(藤岡) 경찰서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듣고 후지오카촌의 자경단 대표 13명이 경찰서로 몰려와 "조선인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때 경찰서장은 신마치(新町)로 출장중인 상태였다.

 

후지오카 경찰은 서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고 오후 여섯 시경이 되자 자경단은 2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자경단 내에서 누군가 "해 버리자"고 외치자 자경단은 경찰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 유치장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도와 죽창, 엽총으로 찌르고 베었다. 9월 7일 검사국에서 학살당한 사람의 신원을 조사했는데 이때 남성규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남성규는 같은 마을에서 온 김철진(41), 조정원(43), 김백출(29) 그리고 같은 상주군에서 온 김인수(22), 허일성(25)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검사국 조회가 끝나고 짐 마차에 실려 어디선가 화장을 당했다. 이때 1886년생인 남성규의 나이는 38살이었다.

고향에는 부인 송산동과 아들 위득(8), 사득(5), 딸 득녀(2)를 남겨 놓은 상태였다. 남편을 잃은 부인 송산동은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영주로 갔다. 여기서 시댁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다. 권재익은 바로 송선동이 낳은 남득녀의 아들로 남성규의 외손주, 유족 3세가 되는 것이다.

 

권재익은 정부가 진상규명에 나서서 돌아가신 조상의 원한을 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는 "우물에 독을 탔다. 불을 질렀다는 거짓 유언비어와 혐의를 몰아내지 않으면 유족은 폭도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유족들이 앞에 나서는 걸 꺼려하는 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지진 후 일본 사법성의 조사에서도 조선인의 방화나 습격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지진이라는 대참화로 곤경에 처한 일본 민중의 불만이 자칫 천황제에 대한 항거로 분출할까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택했다.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고 조선인이 적이라고 선포하고 일본민중에게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과 싸우고 조선인을 해치우라고 선동한 것이다. 나라 잃은 조선인을 그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조선인은 만만한 먹잇감이었을 뿐이다. 조선인은 폭도가 아니라 일본 국가 범죄의 희생양이었을 뿐이기에 마땅히 그 누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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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맞은 권재익의 일인시위 그는 2월부터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일인 시위를 했다. ⓒ 권재익


 
권재익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 아니라, 혐오와 증오라고 생각한다. 혐오와 증오가 쌓이면 내부를 향해서건 외부를 향해서건 주먹과 총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쌓이고 쌓여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잔학한 학살이 자행된 것이 관동대학살의 진실이라고 그는 바라본다.

 

권재익은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처음으로 1인 시위를 했다. 100주년이 되는 9월 1일까지 꾸준히 해나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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