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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민병래 ('황소와 나비' 대표)
등록일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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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통해 말 전한 큰할아버지
- 유족 3세 조광환

 

또 다른 유족 3세 조광환을 만난 건 찬바람이 매섭던 2월 중순, 그가 산불 감시원으로 일하는 함양군 기백산의 용추사 앞 초소에서였다. 조광환의 큰 할아버지 조권승은 1893년 2월 9일생으로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231번지에서 태어났다. 조권승은 군마현으로 갔다가 1923년 9월 2일 그의 나이 30세에 참변을 당했는데, 고향에 남겨둔 아들 조병준이 다섯 살 때였다.

 

조권승의 소식은 한동네에 있다가 생환된 이가 가지고 왔다. 살아 돌아온 그도 일본도에 뒷머리를 베이면서도 목숨을 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집안에서는 조권승의 옷가지를 넣어 헛묘를 만들고 기일인 7월 22일(음력)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는 일본 쪽을 향해 묵념을 올리는 것이었다.

 

조권승이 죽자 그의 집안은 무너져 내렸다. 조권승의 동생 조기승이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남아 있던 땅마저 잃어버렸다. 조광환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조권승의 아내는 독자인 병준을 데리고 직접 들일에 나섰다. 문중의 땅이나 집안의 땅 가진 사람 논을 부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집안의 가장을 잃은 채 평생을 청상과부로 고생한 조권승의 아내는 1968년 1월 15일 숨을 거뒀다. 그리고 조권승의 헛묘에 묻혔다. 비록 조권승은 아니지만 무덤은 주인을 맞은 셈이다.

 

조광환에게 조권승은 큰할아버지이지만 어려서부터 집안 제사에 참여했고 일본 쪽을 향한 묵념을 빼놓지 않았기에 그리 먼 느낌이 아니었다. 2013년에도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유족 확인 조사를 나온 것이다.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발견되었고 이를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넘겨받은 위원회가 현장조사에 나선 터였다.

 

조권승이 이 명부에 오르게 된 것은 1953년 내무부에서 관동대지진 피살자 조사를 할 때 조권승의 동생 조기승이 형의 죽음을 신고했기에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할아버지의 직계 외아들이며 조광환에게 사촌 형인 조병준과 그의 아들 조용진이 사망한 터라 조광환이 조사원을 상대했다. 큰할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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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3세 조광환 함양군에서 그를 만났다. ⓒ 민병래


 조광환에게 잊지 못할 큰할아버지의 기억은 굿을 할 때 당신이 종종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거창에서 조씨 집안은 어려울 때마다 당골을 통해 집안 굿을 했다. 이때 평소 술을 좋아하고 활달했던 큰할아버지는 "내 일본 다녀오겠다. 까짓거 무서울 게 무에냐"라며 무당의 공수(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이 하는 말이라고 전하는 말)를 통해 또렷이 음성을 들려주었다.

 

조광환을 유족으로서 역사의 현장에 나오게끔 이끌어준 사람 역시 오충공 감독이었다. 오충공 감독이 자신이 만든 <감춰진 손톱자국>에서 증언자로 나온 조인승의 고향을 찾아 거창에 온 적이 있었다. 조인승은 조광환과 마찬가지로 창녕 조씨였다. 오 감독은 조인승의 족보며 일가친척을 찾아 조인승이 일본에 오기 전 행적을 발굴하려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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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조씨 족보 ⓒ 조광환

 

동네에선 자연스레 그때 숨진 조권승과 유족 조광환의 얘기를 들려주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오충공 감독과 만났다. 조광환은 오충공 감독을 만나기 전날에 큰할아버지 무덤이 환하게 빛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오충공 감독은 마침 유족의 얘기를 담은 세 번째 작품을 촬영중인 터라 조광환은 오 감독을 조권승의 무덤으로 안내하고 창녕 조씨의 족보도 건네며(안타깝게도 조인승씨는 대가 끊긴 탓인가 족보에 올라가 있지 않다) 관동의 진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조광환은 2018년 오 감독의 초청으로 권재익 등 다른 유족과 함께 도쿄의 아라카와 강변과 치바 관음사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재일동포 3세, 4세들이 관동대학살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며느리에게 담배 가리킨 시아버지
- 유족 3세 홍동선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또 다른 유족 3세 홍동선씨를 만난 건 그가 운영하는 '신토불이'라는 떡공장에서였다. 한창 성수기인 설이 막 지난 때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3형제 중 맏이로 이름은 홍철유였다. 1898년 충남 당진, 지금의 면천면에서 태어난 그는 마을 사람 네 명과 함께 취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아내의 뱃속에 3개월 된 홍사인을 둔 상태였다.

 

서당 공부를 한 후 면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일본어를 잘했다. 그런 탓인가 홍동선은 할아버지가 토목공이나 노무자가 아닌, 사무원으로 일하는 직장을 구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동네 사람 3명은 떨어져 돌아왔고 홍철유만 남아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녔다. 홍철유는 벌이가 좋았는지 "뱃속에 있던 홍사인이 태어났다는 편지를 받고" 집으로 미쓰비시에서 만든 미싱과 담요를 보내왔다.

 

유복자였던 홍사인은 홀로 성장해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많은 자식을 생산했는데 4남 4녀, 그중 홍동선은 일곱째다. 홍동선은 집안에 남아있던 할아버지 홍철유의 면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 사진 덕분에 유족임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 이기정은 사진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동경에서 돌아가셨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하지만 전후 얘기는 깜깜했다. 일본에서 전보를 받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동경에서 할머니 이기정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게 남 보기 창피하다고 읽고서는 태워버렸단다. 그중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발신지를 찾아가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더듬어볼 수 있을 텐데 모두 없애버린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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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유의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적부 그는 일본에서 야간대학을 다녔다. ⓒ 홍동선제공

 

이기정은 남편 홍철유를 잃고 유복자인 홍사인을 엄하게 키웠다. 그런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홍사인은 엇나갔다. 정미소를 했을 정도라 나름 재산이 있었지만 일을 뒷전에 두며 술과 노름으로 한 평생을 보냈다. 늑막염으로 18년간 고생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유복자였던 그에게 홀어머니는 인생의 큰 그늘이 되었던 게다.

 

이기정은 아들을 자신 앞에서 떠나보낸 후 홍동선이 14살 때 세상을 등졌다. 평생을 청상으로 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졸업 사진을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할머니의 유언에 소년 홍동선의 코끝은 찡했다. 그는 삼 년간 초하루와 보름에 할머니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의 가슴 아픈 얘기는 또 있다. 울화가 쌓여서인지 평생 속병으로 고생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홍동선의 증조 할아버지, 즉 홍철유의 아버지가 며느리인 이기정에게 담배를 가르쳤다고 한다. 담배로나마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었으리라.

 

안타깝게도 홍철유의 기록은 한 조각도 없다.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며 어쩌면 당시 동경에서 고학했던 아리랑의 장지락을 만났을지 모른다. 혹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댔을지 모른다. 아니면 야간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에 돌아와 식민지에서 출세할 길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일본이 학살 사실 은폐를 위해 혈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9월 4일 임시내각회의에서 "불령 조선인의 시체는 군대의 손으로 소각할 것"이라는 방침이 정해졌다. "근위 3연대 병사는 300명의 시체를 산처럼 쌓아놓고 폭발물을 투입하여 1.8M 정도의 도화선을 붙여 폭발시켰다"는 기록처럼 조선인의 사체는 산산이 부서지고 태워졌다. 홍철유의 유족에게 남아있는 사실은 그가 동경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뿐이다.

 

홍동선은 현재 관동학살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종수 목사를 우연히 만나 2016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추도식에도 나가고 유족도 만났다.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과도 만나 그를 통해 '관동대학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추진 소식을 알게 되었고 몇 차례 면담도 했다. 그의 바람은 소박하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유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유족으로서 최소한의 바람이리라.

 

윤석열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1923년 관동대학살을 접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장관은 강제수용된 조선인의 석방, 재난 지역 한인들의 생사여부 조사, 학살 가해자의 엄중 징계 등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보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이 문서를 철저히 무시했다. 해방 후 독립 정부가 되었지만 우리는 국가적 차원의 피해 조사를 하지 못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을 조직해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관헌의 감시를 뚫고 목숨을 걸고 동포들의 피해를 조사했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은 2022년 12월 방위에 관한 3대 전략 문서를 공개했다. 여기에서 사실상 선제 타격이 가능한 반격 능력을 천명했다. 이로써 평화헌법은 휴짓조각이 되었고 일본은 언제든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일본과 군사동맹을 서슴없이 맺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인도태평양전략, 일본의 패권국가 전략에 몸을 담그고 한국군을 자위대의 예속 군대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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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는 혐한시위.  일본내 극우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 


 그렇기에 관동대학살은 결코 10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 범죄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언제든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관동의 제노사이드"를 다시 저지를 수 있다.

 

관동대학살의 유족 문제는 단지 핏줄의 문제가 아니다. 1920년대 일본 땅을 밟았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빼앗긴 농민이었다. 이들은 일본 땅에서 일본 노동자의 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탄광노동, 토목노동 같은 가장 힘든 노동에 종사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수탈당하고 일본 땅에서도 극심하게 착취당하다 지진의 한가운데서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차별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스러져간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고 전쟁 범죄를 되풀이하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정신적인 유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유족 3세로 끝날 일이 아니다. 유족 4세, 5세가 되더라도 기필코 일본에 그 학살의 죄과를 물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일본의 군국주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

 

며칠 전 3.1절 기념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이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동 일원을 떠도는 6661명의 혼령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역사적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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