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욱의 총반격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3.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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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104주년 3.1범 국민대회’에서 연설하는 양금덕 할머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지난 3월 6일 오전, 박진 외교부 장관은 한국기업이 배상하고, 일본기업들은 ‘미래청년기금’에 출연하는 강제동원 백기 투항 해법을 발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밤중에 성명을 통해 “오늘 한국과 일본의 발표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두 동맹 간 협력과 파트너십에서 획기적인 새 장을 장식했다”라고 환영했다. 

 

그러나 기시다 일본 총리는 국회 질의응답 형식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현재 전략 환경에 입각해 한일, 한·미·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역사 인식에 관해서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해 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11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한·미·일 정상은 ‘인도·태평양 한·미·일 3국 파트너쉽에 대한 프놈펜 성명’을 발표하고 대중국 포위를 위해 한미동맹을 미일동맹의 하위개념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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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11월 3일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한·미·일 정상회의를 진행했다.    

 

표면상으로는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 ▲경제안보대화체 신설 ▲대만해협 평화와 안정 유지 ▲우크라이나 지지 ▲첨단기술 공급망 협력 등 방대한 영역에서의 3국 공조이지만, 사실상은 한국이 일본 하위동맹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일 과거사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이 걸림돌 제거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주도하였다. 그는 한국 정부 강제동원 해법발표 후 “미국과 한국, 일본 간 삼각관계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지역이라는 공동비전의 핵심”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아무리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는 결코 반복되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일본은 전범국가로 우리에게 배상 책임이 있다. 

 

그리고 미국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2015년 위안부 합의 그리고 2023년 강제동원 제3자변제 배후이다.

 

민중은 미국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범국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 식민지배를 무시한 극동국제군사재판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은 “조선을 자유 독립하는 것으로 결의를 가진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일본이 항복하고 수락한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주권은 홋카이도, 혼슈 등 현재의 영토에 국한하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엄히 다스리며 배상금을 지불할 것 등이 결정됐다. 그리고 이 선언의 조문을 근거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영국‧미국‧네덜란드‧프랑스의 식민지, 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은 재판했지만, 조선‧대만의 식민지 지배는 심의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그리고 추궁되지 않은 전쟁 범죄 재판은 향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왜곡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전승국에 대한 배상 지불은 한국전쟁으로 미 국무부가 ‘대일강화 7원칙(1950년 11월 24일)’을 적용해 모든 교전국의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초청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참가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애초 조약의 배상 조항 14조는 일본이 배상을 지불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전으로 지불해야 할 배상을 생산물이나 공장, 다리, 호텔 건설 등으로 둔갑하고 그 공사도 일본기업이 수주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경제 부흥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에게 배상이라는 인식은 없고 흐지부지 배상이 끝났다.

 

그런데 이 배상 지불 방식이 한일조약에도 적용된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조인한 직후 10월 20일 한일 간 외교 정상화를 위한 제1차 한일회담이 개최된다. 

 

미국의 베트남전쟁과 한일국교 수립 압박

 

미국은 6·25전쟁 도중 미 국방부의 특별조달령으로 일본의 무기 제조를 허가하였고, 1954년 자위대 창설로 재무장에 이르게 하면서 일본을 충견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에는 사대 친미 반공 독재 이승만을 주구로 내세워 식민지 종속 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1960년 위대한 4월혁명으로 위기에 봉착하지만 미 CIA는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유도하여 다시 한국을 하수인으로 만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5.16쿠데타의 실질적인 주모자였던 미 CIA 국장 덜레스가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방송에 출연해 “내가 재임 중에 CIA 해외 활동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5.16쿠데타였다. (중략) 만약 미국이 무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민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자랑하면서 미국의 공작임이 폭로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미국의 쿠데타 승인을 받고 싶었던 박정희는 1961년 11월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베트남 파병 의지를 밝혔다. 박정희는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뛰어들기도 전에 그런 제의를 할 정도로 미국의 쿠데타 승인이 절박했다. 

 

미국은 1964년 8월 4일 소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겠다며 베트남전쟁을 일으킨다. 또한 10월 14일 소련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체제 등장과 10월 16일 중국의 핵실험 성공으로 국제 정세는 크게 요동친다. 미국은 아시아 안전보장 강화와 가장 중요한 베트남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약탈자 미국은 박정희에게는 쿠데타를 승인해 주는 대신 군대 파병을, 일본에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군수(軍需)에서 번 돈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일관계였다. 한일의 대립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더욱 집요하게 압박했다.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협정

 

박정희는 1964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마침내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6.3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운동을 폭력 진압하면서 한일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였다. 일본도 이에 발맞추어 과거 만주국 군인인 박정희와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기회라고 판단해 속도를 냈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일본에서 무려 13년 8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된다. 하지만 문제가 된 병합조약이 언제부터 무효인지에 대해 한국은 체결 ‘당초부터 무효’라고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무효가 되었으나, 과거에는 합법으로 유효’라고 해석했다. 

 

한국은 1951년 제1차 한일회담을 통해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과 사과를 받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박정희는 과거사 사과는커녕 ‘대일청구권’ 배상을 포기했다. 일본은 ‘조선병합’을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이라 하며, 대가로 10년간 3억 달러의 무상공여, 2억 달러의 차관 그리고 3억 달러 이상의 민간 신용 공여가 고작이었다.

 

한일협정은 돈으로 과거사를 맞바꾼 ‘흥정’이자, 졸속·굴욕 조약이었다. 

 

이때도 미국은 한일협정의 체결 배후이며, 한국과 일본을 베트남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돈으로 대일청구권과 맞바꾸게 한 원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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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정상화 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김학순 할머니와 고노 담화

 

1991년 8월 14일 67살 김학순 할머니가 17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지 50년 만에 눈시울을 적시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 (중략)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중략)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 일본은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는 세상을 바꿨다. 그는 199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거듭 증언에 나서며 일본이 침략 전쟁에서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던 만행을 세상에 알리며 책임을 물었다. 또한 그는 아시아 각국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길을 개척하고 연대했다.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 아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라고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 ▲위안소의 설치, 관리 등에 군이 관여했다.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성이 있었다. ▲위안소에서 강제 사역이 이루어졌다. ▲모집, 이송, 관리 등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진행된 강제성이 있었다. 담화는 이상의 5개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올린다”라고 표명했다. 2007년 미국 하원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 분명한 인정과 사과, 역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의 증언에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전쟁 중 여성 성폭력이 다시는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권과 평화 운동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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