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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12월30일  노동법 개정 총파업 당시 명동성당 집회.

 

민주노총이 선포한 7월 총파업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이에 <울산함성>은 한국노동운동사에 있어 성공적인 총파업 사례로 꼽히는 96-97 노개투  관련한 글을 소개한다. 본문은 2012년 1월 18일에 있었던  <96-97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현재적 의미와 과제> 토론회에서 발표되었던  발제문이다.  비록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핵심 내용은 여전히 참고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분량이 다소 길기에 총 4회로 나누어 연재한다.ㅡ 편집자 주

 


[ 발제1]  96-97 노개투 총파업 15주년, 노동운동의 과제 

                                                     

  허영구(민주노총 전 부위원장)

 

1. ‘96 이전의 총파업 역사

 

일제식민지배 시기 파업투쟁은 임금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 생존권 문제를 포함해 노동력에 대한 무한수탈과 착취에 맞선 민족해방 투쟁의 성격을 지녔다.  1923년 평양 고무공장 여성노동자 아사투쟁, 1929년 원산 총파업(3개월) 투쟁을 거쳐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노동운동 불법화로 비합법 적색노조, 무장독립운동으로 나아갔다. 

 

해방과 더불어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설립되었다. 17개 산업노조와 지방조직 등 1,757개 단위 노조(산업노조 근간으로 하되 기업, 직업, 직업노조도 포함), 조합원 57만 명, 11개 주요산업지대에 ‘지방평의회’를 두었다. 이에 맞서 1946년 3월 10일에는 어용 대한노총이 급조되었다. 1946년 5월 메이데이 행사에는 전평 조합원 10만 명 이상 참가했으나 대한노총은 3천명 참가에 불과했다. 1946년 9월 23일 철도노동자를 필두로 전국에서 17개 산업노조에 24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했고 20여 일 동안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전평이 총파업을 벌이자 미군정과 우익세력이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1947년에 들어서서도 2월부터 5월까지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으나 전년도에 비해 규모도 줄었고 탄압으로 인해 조직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현장으로 숨어들었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 대한노총은 정권의 사병조직으로 반공운동과 정부 친위대 역할을 맡았다. 1956년 3월 경전노조는 이승만의 3선 출마요구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어용노조를 앞세운 노동자관리와 민주노조 말살 가운데서도 정권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에 따라  1953년 1~4월에 노동조합법, 노동쟁의법, 근로기준법, 노동위원회법을 제정했다. 제도적으로만 노동조합을 보장했다. 1960년 4월 19일 민중혁명으로 신규노조가 결성되고 노동쟁의가 증가했다. 1959년 95건 에 49,813명이 참가했으나 1960년에는 227건 64,335명이 참여했다. 4.19혁명으로 전국조직인 전노협을 비롯한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 일당의 5.16쿠데타로 기존의 노동조합을 해산 시켰고 그 해 8월 80명 대의원으로 11개 연맹으로 구성된 전국단일산업노조 연맹체인 한국노총을 발족시켰다.  1963년4월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노조설립허가주의와 복수노조금지 조항을 삽입했다. 이후 개발독재와 고도경세성장 과정에서 노동력 착취는 극에 달했다. 1970년 11월 3일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고 외치며 분신했고 이소선 어머님과 청계피복 노동자 그리고 청년학생들과 양심적인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노동자 노동자민중운동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1970년대는 섬유, 전자 등 여성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과 투쟁이 전개됐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YH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끝났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 중화학 금속노동자, 동원탄좌(‘80.4), 동명목재(’80.5) 등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5.18광주 민중학살 후 억압적인 상황이 시작됐다. 1980년 12월 제5공화국의 국보위에서 노동법을 개악했고 산업노조는 기업노조로 전환됐다.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신설되고 유니온 숍 제도가 폐지됐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뛰어들었고 정권과 자본의 억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분노는 조직되고 있었다. 1985년 6월 24일 전평 파업 이후 최초의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1987년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마지막 독재정권을 이어가고자 했다. 어용 한국노총은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6.10항쟁이 발발했다. 이어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3,749개 사업장에서 150만 명이 투쟁에 동참했다. 3000여건의 파업과 90만 여명이  참가하는 5000여개 노조 설립됐다. 이 당시 투쟁의 94%는 정치투쟁이었다. 실정법으로 보면 ‘불법파업’이었다. 작업거부, 집단농성, 시위 등 99.8%가 전투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이런 투쟁의 성과로 1987년 11월 부분적으로 노동법이 개정됐다. 그리고 여소야대시절이었던 1989년 3월 노동법이 개정되었으나 노태우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가 건설됐다. 1989년 4.15 부천 총파업, 4.20 서울 총파업, 5.1과 11.1~2 마산창원 총파업, 11.26 경기노련 총파업 등 지역조직들은 투쟁을 통해 조직을 건설했다. 1990.1.22 12개 지역 협의회, 20만여 명이 전노협을 창립했다. 전노협은 창립과 함께 1990년 5.1~4 현대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되자 전국 총파업, 1991년 5.9, 5.18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진상규명을 위한 전국 총파업을 벌였다. 선파업 후교섭, 정당방위대(선봉대), 민자당 해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싸웠다.

 

전노협 창립과 함께 전국조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1개 연맹 및 협의회, 15만명이 1990.5.30 업종회의를 창립했다. 1990.2.2., 38개 노조, 9만 명이 현(대그룹)총련을,  1990.12.3, 16개 노조, 5만 명이 대(우그룹)노협을 창립했다. 1991.10 전노협, 업종회의 노동2 단체가 모여 ILO공대위를 창립했다.  ILO공대위 +대공장 및 여타 민주노조가 모여 1992.11 전국노동자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노조 총단결의 계기를 만들었다. 1,145개 노조, 40만 7천명이 1993.6.1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했다. 전노대는 1993년 노·경총 밀실 임금합의를 거부하고 현장투쟁을 독려했다. 1994년 임투 시 한국노총에서 31개 노조 탈퇴했고 135개 노조가 의무금 납부 거부 운동을 펼쳤다. 1994.11, 민주노총 준비위를 발족시켰고 1995.11.11 민주노총이 출범했다. 

 

2. 민주노조 총단결 모색기(전노대) 노동법개정 투쟁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당시의 세계정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시점이었다.*  소위 문민정부의 부분적이고 기만적인 개혁정책에 맞물려 진보적인 운동은 혼란과 침체를 겪었다. 김영삼 정권의 형식적인 민주주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이나 구조적 개혁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이는 역대 군사정권과의 차별화를 드러내고 권력재편을 위한 몇 가지 조치들은 있었지만 법과 제도적인 개혁은 진행되지 않았다. 반면 세계경제의 침체와 국가 간, 기업 간 경쟁력 심화, 경제블럭화와 다국적 기업에 의한 산업구조 조정 강제가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과 자본간 역관계 역시 노동에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재벌을 중심으로 한 국내자본은 자본에 대한 규제완화와 기술고도화를 통한 이윤축적을 통해 세계화 시대에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절실했다. 노동과 자본 관계에서는 노동의 양보 또는 착취 강요로 나타났다. 이에 발맞추어 김영삼 정권은 전노대가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근로기준 및 계약관계를 악화시킬 근로자파견법, 공공부문노사관계법, 기업규제완화특별조치법 등은 추진하겠다고 했다. 

 

* 그러나 국내에서는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세계화가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의 신보수주의 개념으로만 인식할 정도였음.

* 1993.8.24, 노동부 공식 발표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핵심투쟁은 노동법 개정투정이었다. 1989년 여소야대 시절 노동법이 개정되었으나 노태우정권이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무산되었다. 1991년 한국정부가 UN과 ILO에 가입하면서 국제적 연대와 지원을 통한 노동법 개정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이에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노동단체와 함께 1991년 11월 ‘ILO조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권과 자본의 공세가 계속되었고 당면투쟁과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조직발전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노동법 개정 투쟁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3년 6월 민주노조진영이 하나로 뭉친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전노대는 출범과 함께 노동법 개정 투쟁을 이어가기로 하고 노동법 개정 투쟁 의의를 첫째,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주적인 민주노조 진영의 단일대오 결집과 투쟁, 둘째, 노동자 대중의식 발전, 셋째, 현 단계 노동과 자본의 힘 관계 변화의 시금석이자 사회개혁 촉진으로 정의했다. 노동법 개정 투쟁 목표로는 첫째, 근로자 파견법과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정의 강력저지, 둘째, 정부가 노동법 개정을 않겠다는 것과 상관없이 국회에 청원하여 강력한 투쟁 전개, 셋째, 산업별 노조 건설을 위한 구체적 사업배치를 내세웠다. 

 

* 1993년 4월 전노협, 업종회의, 대공장 노조는 그해 6월 출범하는 전노대는 상급연합조직이 아닌 공동사업추진체로 한다고 합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상급단체 역할을 수행함. 

 

1993년 2월 문민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근로자파견법과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을 제정하려 했다. 먼저 근로자파견법의 입법취지를 보면 고용관계가 없는 노동자를 제3자에게 사용하도록 하는 ‘근로자공급사업’(노조 외 금지)과 고용관계가 있는 노동자를 타인의 지휘, 명령 하에 사용케 하는 ‘근로자파견사업’으로 구분하고 후자를 합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1993년 당시 ILO에서 법제화를 권장한 바 있는 내용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파트타임근로자’의 보호법인데 김영삼 정권은 이를 악용해 오히려 불법용역을 합법화하는 법 제정을 시도했다. 이는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 길이었다. 결과는 노동조건 악화, 고용불안, 노조약화, 노사관계 불안정이었다. 

 

1988년 시행한 국민연금*의 적립금 중 60% 이상을 국채 구입 등으로 시중은행 보다 낮은 금리로 운용되고 있었는데 공공자금관리기금법 제정을 통해 국민연금을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위한 국가재정자금으로 충당하고자 했다. 정부의 의도대로 연금을 사용할 경우 장기적으로 기금이 고갈될 것이며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 증가, 국민세금부담 증가, 나아가 연금제도의 붕괴로 사회혼란이 초래될 것을 우려했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을 통한 국가경제발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장래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기존의 노동법 개정에 앞서 무효화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노동법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타 관련법들의 제정요구나 제정반대운동을 동시에 전개해 나갔다. 

 

* 1992년 말 당시 국민연금 기금 조성액은 5조 2000억 원 이었음, 2011.10월 현재 344조 9000억 원 적립되어 있음, 이 중 국내외 주식투자가 20%를 넘어섰고 2011년 3조원의 손실을 입음, 국민연금 기금은 2044년부터 마이너스, 2060년 고갈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음

 

전노대가 국회에 청원한 주요 노동법 개정(안)은 1963년에 신설되었으며 헌법 제 33조는 물론이고 ILO 조약 87호의 자주적 단결권을 침해하고 있는 복수노조 금지 조항(노조법 3조 5호) 삭제, 1989년 개정되었으나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공무원과 교사의 단결권 보장(노조법 8조), 1980년  전두환의 국보위에 의해 신설된 제3자 개입 금지 조항(노조법 12조 2, 노동쟁의 조정법 13조)삭제,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노동자의 쟁의행위 금지 및 공익사업 강제중재조항(노동쟁의 조정법 12조 2, 30조 3) 삭데, 행정관청의 조합 활동에 대한 부당한 지배, 개입, 간섭조항(노조법 16, 21, 26, 34조) 삭제였다. 

 

한편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지는 않았지만 자본과 기업을 대변하는 경총은 끊임없이 노동법 개악안 상정을 기도했다. 그 내용을 보면 근로기준법에서는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월차 및 생리휴가 폐지, 휴일 및 야간근로 수당 할증료 25%로 하향, 시간제 근로자의 근로기준법 적용 배제, 노동조합법에서 해고효력을 다투는 자의 조합원 자격 불인정, 직접근로관계를 맺지 않은 자의 사업장 내 조합 활동 금지, 노조위원장의 직권조인 인정, 인사경영사항의 협약금지, 노조전임자 임금 불지급 등을 요구했다. 노동쟁의조정법에서는 무노동 무임금, 정치파업금지, 직장폐쇄 명시, 냉각기간 연장 등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총은 경총과 함께 민주노조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복수노조금지조항의 유지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1993년 전노대 출범과 함께 주어진 노동법 개정투쟁의 과제는 첫째, 산업노조 건설과 관련된 실천적 투쟁 전개하는 일이었다. 특히 전노대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총단결을 강화하고 전노협과 대공장 노조의 업종별 사업 강화, 업종회의 소속 연맹의 공동사업 추진이 그 내용이었다. 둘째는 상반기 임단투, 하반기 노개투라는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 1994년 임투와 결부된 계획성 있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단위노조와 조합원의 역할이 증대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기업노조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재정과 활동가의 상급조직으로의 결집, 조합원 대중의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각성이 필요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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