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③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23호>
등록일 : 2023.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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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적색노조사건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1. 원산총파업 이후 노동자파업 더욱 왕성해져


1929년 발생한 원산총파업은 일제 식민지치하 최대의 노동자 파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운동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원산총파업 이후 전국 각지의 노동자투쟁은 더욱 빈번히 발생하였다. 1930~1934년 5년간 투쟁건수는 897건, 참가인원수는 7만7천여 명에 이르는데, 이는 1920년대 10년간의 투쟁과 맞먹는 것이다. 

 

2. 이유1ㅡ 식민지하 자본주의의 발전


이렇듯 1930년대 들어 노동운동이 더욱 활발해진 이유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자본주의가 일정 정도 발전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일제는 처음 조선을 단순 원료•식량 공급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만주와 중국침략을 본격 시작한 1930년대부터는 조선을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하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급속히 촉진되었다. 1930~1936년 사이에 공장노동자는 10만6천여 명에서 20만7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1943년에는 공장노동자 54만9천여 명에, 광산•토건•운수노동자를 합치면 그 수는 대략 200만 명에 달했다. 

 

3. 이유2ㅡ 극악한 착취와 살인적 노동 강도


일제 식민통치하의 노동자들에 착취와 수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장노동자들의 임금은 가혹한 민족차별적 기아임금인데다, 이마저도 점차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조선인 성인 노동자의 경우 1929년에 1원하던 임금이 1935년에는 90전이 되었다. 성인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더욱 가혹하여 49전에 불과했다. 일본인 성인 남자 임금 1원 83전의 1/2 밖에 안 되고, 성인 여자는 1/4, 유년 여자는 1/6도 못되는 30전의 임금을 받았다. 이렇듯 살인적인 노동조건 하에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서도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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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을밀대에 올라가 단식농성을 벌이는 강주룡. “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 2,300명 고무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의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농성 중 강주룡의 연설 중에서). 일본 경찰은 적색노조를 만든 정달헌이 강주룡을 배후 조종해 일으킨 파업이라고 발표했다.

 

 

4. 노동운동, 사회주의와 결합하기 시작하다.


일제의 탄압은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특히 중국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일제는 ‘문화정치’의 허울마저 완전히 벗어던지고 합법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일제가 발표한 사상범은 1930년에 3만8779명, 1934년에는 6만6055명이나 되었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1930년대 들어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에 신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적색노조운동’인데, 일제의 파쇼적 식민통치 하에서 노동운동가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리에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 역시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하였다. 


이리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은 웬만한 산업시설이 있는 곳은 어디든 속속 결성되었다. 4차례에 걸친 ‘태평양 노조사건’, 흥남적색노조사건, 원산적색노조사건, 신의주비합법공장노조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경성일대,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도 비합법적인 적색노조운동이 일어났다. 1931~1935년 좌익노동조합운동으로 검거된 건수는 70여건에 1,759명이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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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노동운동의 한 축을 담당해 공장노동자들을 비합법 혁명적 적색노조로 조직한 권영태

 

 

5. 잠시의 잠복기 진입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본격적인 전시 비상체제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노동쟁의는 430건에 2만4967명이 참가했다고 일제는 발표했다. 기층 대중들의 저항이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국내에선 적색노조운동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일부는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 역량으로 전화되고, 국내 노동운동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잠복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잠시 억눌렸던 이들 역량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정국에서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최초의 전국노동조합 조직인 전평이 단기간에 건설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역량이 존재하였기에 가능했다. 

 

<교훈> 일제치하의 노동운동은 단순한 노동자의 생활조건 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을 위해서도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투쟁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점은 오늘날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국 노동자들은 삼성•현대차•SK•LG 등 독점재벌과 맞서고 있는데,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이 버티고 있기에 재벌은 지금처럼 막강할 수 있다.

 

출처 :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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