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연대정신’ 보여준 자랑스런 현대차 4.28 투쟁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10호> 2021. 4.20
등록일 :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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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중공업노조를 침탈하러 가는 경찰을 막아서 4공장 앞 도로를 점거한 현대차 조합원들(위). 시위진압용 특수차량인 페퍼포그(지랄탄 발사)를 둘러싸고 진격을 저지하는 현대차 조합원들.  

 

 

31주년 맞는 4.28 투쟁


며칠 후면 4.28 연대투쟁 31주년을 맞이한다.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있는 투쟁의 주역들은 50대 중반을 넘어서서 정년을 앞두고 있다. 이 투쟁에 대해 잘 모르는 조합원들도 많다. 이제 신문 지면을 통해서 당시의 자랑스런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4.28 투쟁은 현대중공업 노조의 투쟁을 침탈하러 가는 공권력에 맞서서 과감한 가두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미포만 작전’을 저지하라!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노태우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노동운동 탄압의 예봉은 전국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선 마산과 울산으로 향해졌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1990년 4월 23일 구속자 석방과 노조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4월 28일 밤 울산시내에 주둔한 73개 중대 1만2000여 명의 병력이 현대중공업이 있는 동구로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벽 4시쯤 전투경찰이 양정동 현대자동차 앞에 이르렀을 때, 비상 상황에 대비해 각 정문에 규찰을 서고 있던 선봉대와 대의원들이 지나가던 병력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판스프링 등으로 도로가 차단되자 경찰은 공장 안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댔다. 
순식간에 주변은 전쟁터가 되었다. 철야농성을 하던 대의원들과 소위원들이 뛰쳐나갔다. 정문 앞에서 쏜 최루탄은 공장 안까지 퍼졌고, 야간작업을 하던 조합원들이 라인을 세우고 뛰어나왔다. 기숙사에서 잠을 자던 조합원들도 함께 투쟁하자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투쟁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지레 겁을 먹은 이상범 2대 위원장은 본관 앞으로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시위대들은 이를 거부했다.  “우리 눈앞에서 우리 동지들, 현대중공업으로 가는 공권력을 그냥 두고 들어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싸움이 정리되었다. 현자노조 조합원들이 현대중공업으로 향하는 공권력을 가로막고 투쟁을 벌이며 시간을 버는 동안, 현대중공업노조 지도부는 골리앗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현자노조 20년사>에서)

 

전노협의 총파업, 그러나 집행부의 아쉬운 ‘5.1 평화대행진’ 결정


 4월 30일 현대차노조는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고 5월1일부터 3일까지 시한부 파업을 결정했다. 현대차 노조의 시한부 파업 결정에 따라 투쟁의 관심은 점차 골리앗에서 현대차 노조로 넘어오게 되었다. 전노협도 이미 긴급 중앙위원회를 열고 5월 1, 3, 4일 전국 총파업을 결의했다. 전노협은 당시 정권의 집중 탄압 대상이었는데, ‘전노협 사수’는 전노협만의 문제가 아닌 정권과 전 민중이 대결하는 투쟁의 초점이 되었다. 
5.1 노동절 기념집회는 전국의 노동자가 KBS,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여 총파업을 벌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현자노조 지도부는 2만여 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노동절 기념 평화대행진을 결정했다. 평상시라면 이 같은 2만여 명의 평화대행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성공적이다. 하지만 당시의 엄중한 전투상황에서 이처럼 한가한 전술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현대차노조와 현대중공업노조가 동시에 싸우면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현대중공업에 대한 진압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 당시 전노협이 전국적 동시 파업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전국 경찰병력의 울산 집결은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상범 집행부가 평화대행진을 결정함으로써 경찰병력이 동구로 이동, 현대중공업노조의 노동절 기념 집회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현장 활동가, 조합원이 자발적으로 주도한 투쟁


4.28 투쟁은 집행부 등 노동조합의 공식 조직이 아닌 민실노(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 소속 등 활동가들과 현장 조합원들이 주도적으로 나선 투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민실노는 집행부 차원에서의 선봉대, 대의원 철농에 적극 결합하는 한편, 그와는 별도로 조직원들을 동원해 현대중공업에 진입하는 차를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이 투쟁으로 김강희, 정갑득, 김종진, 박영배, 배만수, 김성언, 윤기호, 이상도, 박평용, 김중현, 최용탁, 김종술 등이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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