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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성동은 항일투쟁사에서 “조선 인민들이 꼽아 주었던 ‘장군’ 세 사람이 있으니, 김원봉 장군과 무정 장군과 김일성 장군이다”라고 썼다.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도 있지만, 그들 투쟁은 봉오동 대첩과 청산리 대첩 이후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김원봉의 목에 현상금 100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340억원이라는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독립운동의 대명사인 백범 김구의 거의 두 배다. 일제가 이처럼 두려워한 김원봉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아가라


약산(若山)은 김원봉의 호이다.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황상규가 ‘산처럼 살아가라’는 의미로 지어 주었다. 김원봉은 1898년 9월 경남 밀양읍 내이리에서 태어났다. 그와 함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중국 태항산에서 전사한 약수(若水) 윤세주도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김원봉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늦게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두 살 아래 윤세주와 함께 일장기를 똥통에 처박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약산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큰 공훈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표충사에 들어가 손자병법·오자병법 등 각종 병서를 읽으며 조국 광복의 방안을 고민했다. 지리산과 계룡산, 천년고도 경주와 부여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 무전여행을 했으며, 열아홉 살 되던 1916년 10월에는 중국 난징으로 가서 덕화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여름 국내로 오던 중 그는 단둥에서 대한광복회 부사령 김좌진을 만났고,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으로 부터는 조선 혁명을 위해선 비밀·암살·폭동이 중요하다는 사상을 물려받았다. 

 

 눈부신 의열단 활동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을 필요를 느낀 김원봉은 만주 서간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폭탄 제조법과 총기류 취급법을 배웠다. 김원봉·이성우 등 10여명의 청년들은 1919년 11월10일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창립했다. 이들 20세 전후 청년들은 형제의 의로써 뭉쳐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할 것을 결의하고, 1920년대 중반까지 격렬한 항일투쟁을 실천하였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1920년 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사건(1920년 11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사건(1921년 9월), 김익상·이종암·오성륜의 상해 황포탄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사건(1922년 3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사건(1923년 1월), 김지섭의 일본 궁성 폭탄사건(1924년 1월), 김병현·김광추·박희광의 일제밀정 배정자와 일진회 이용구 암살 미수사건(1924년 6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조선식산은행 습격사건(1926년 12월) 등 의열단의 투쟁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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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10일 조선의용대 성립 사진.  조선의용대 앞 줄 깃발 가운데가 김원봉장군이고, 그 왼쪽 두 번째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중국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한 윤세주이다. 

 

 

조직된 무장투쟁으로 전환: ‘조선의용대’ 창설 

 

김원봉은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테러나 암살이 아닌 조직된 군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한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점차 계급적 이념에 기반을 둔 급진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 자신 1926년 황푸 군관학교 4기로 입학하여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을 쓰고 활동하였으며, 이후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1938년 10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조선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총대장이 되었다. 
 
약산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악연


해방 후 김원봉은 1948년 4월 남북협상 때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과 함께 남한 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한다. 이후 그는 그대로 북한에 남았는데, 김원봉이 북한에 남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의 악연이다.
 노덕술은 잘 알다시피 독립투사를 3명이나 고문 치사한 악질경찰이다. 1947년 3월22일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은 화장실에 앉아 있던 선생을 체포했다. 체포 후 선생의 따귀를 때리고 경찰서로 데려가 심한 고문을 했다. 선생은 그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 돌아 와 사흘 동안 울었다고 한다. 의열단 동지들에게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 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8년 그는 월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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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경찰 노덕술.  오른쪽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끌려가는 모습.

 

                 

 후일담

 
울산 출신인 노덕술에 대해 조금 만 더 서술하도록 하자.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1949년 반민특위 특경대에 체포되어 한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에 의해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기술자”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그는 이후 중령 계급장을 달고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한국전쟁 때 화랑 및 충무무공훈장을 3개나 받은 그는 1960년 고향인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비록 2천여 표로 꼴찌를 하긴 했지만, 1968년 69세로 천수를 누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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