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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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잘못된 민족정책은  훗날 소비에트연방 해체의 화근을 남겼다. 사진은 러시아 -그루지아  전쟁( 2008년8월8일~ 18일) 

 

스탈린, 오르조니키제, 제르진스키가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앞의 두 사람은 그루지야인이었고 제르진스키는 폴란드인이었다), 레닌은 일부러 이렇게 덧붙였다.

 

"러시아화 된 다른 민족들은 진정한 러시아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항상 과격하다", "그루지아인은 문제의 이런 측면에 대해 가볍게 보고, 전혀 개의치 않고 아무에게나 '사회민족주의'라는 죄명을 씌운다 (사실 그 자신이 진정으로 '사회민족주의자'일 뿐만아니라 난폭한 대러시아의 젤시몰다이다)*. 그렇다면 이 그루지아인은 실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단결의 이익을 파괴하는 것이다."

*  젤시몰다는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희극 <친차대신>에서  나오는 인물로, 어리석고 거칠며 툭하면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는 경찰이다.

 

레닌은 서한에서 또 민족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중요한 원칙을 천명하고, 반드시 대러시아 쇼비니즘(국수주의)을 굳건히 반대해야 하며, 민족주의 문제를 추상적으로 제기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반드시 억압민족의 민족주의와 피압박민족의 민족주의, 대민족의 민족주의와 소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 대민족 사람들은 역사의 실천에서 거의 줄곧 과실이 있었다. 우리는 무수한 폭력을 저질렀고, 심지어는 무수한 폭력과 모욕을 저질렀지만 자신은 아직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민족을 억압하거나 이른바 '위대한' 민족의 국제주의는 "형식상의 민족 평등을 준수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억압민족 즉 대민족이 불평등한 지위에 처함으로써 실제 생활에서 형성된 불평등을 상쇄하는 데 있어서도 표현되여야 한다."*

 

* 레닌의 이 같은 민족문제에 대한 원리는 현재 중국의 민족정책에서 일정 정도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소수민족에 대해서 전국인민대표대회 구성에 있어 한족에 비해 인구비율 보다 많은 의석을 할당하는 것, 과거 ‘1자녀’ 인구제한 정책을 펼칠 때 소수민족에게는 그런 제한을 두지 않은 점,  또 대학입시에서 소수민족 출신 학생들에게는 가산점을 주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좀더 부여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매우 신중하고 매우 겸손하고 양보하는 태도를 취하여 소수민족에 대한 관계를 잘 처리함으로써 그들의 최대한의 신임을 얻고 "역사적으로 그들에게 가져다준 그와 같은 불신,  의심,  모욕"을 제거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공화국연방 문제에 관해선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연방을 보유하고 공고히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실시하려고 한다면, 만약 대러시아 쇼비니즘(국수주의)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

 

"우리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동맹 탈퇴의 자유'는 공문에 불과하며, 전형적인 러시아 관료, 위대한 러시아 우월주의자, 본질적으로는 악당과 깡패와 같은 실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에 있는 이민족을 보호할 수 없다.”  (레닌전집 2판 43권, 349-355 쪽)

 

레닌이 구술한 이 편지는 당시에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내지지 않고 그의 비서실에 보관되었다. 1923년 1월 25일, 중앙정치국은 제르진스키 위원회의 결론을 청취한 후 그의 보고서와 권고를 승인하였다. 그루지야 당과 정부 지도자를 경질하는데 동의하였는데, 이는 "코카서스 정세와 당내 투쟁 과정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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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민족

 

레닌은 위의 <민족 또는 ‘자치화’ 문제에 관하여> 라는 편지를 구술한 후 그루지야문제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1월 24일, 레닌은 비서 포디에바를 불러 제르진스키나 스탈린에게 그루지야문제 위원회의 자료를 요구토록 했다. 그는 이 자료들을 상세히 연구하여 당대회에 사용할 수 있는 보고서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 레닌은 자료를 받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1월 27일, 제르진스키는 포디에바에게 자료가 스탈린에게 있다고 말했다. 포디에바는 또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그날 모스크바에 없었다. 29일, 스탈린은 포디에바에게 전화를 걸어 정치국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자료를 줄 수는 없다고 하면서, 레닌이 어디서 이 같은 일상 사무를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30일, 레닌은 또 포디에바를 불러 자료를 재촉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2월 1일,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그루지야 문제에 관한 제르진스키 위원회의 자료를 레닌에게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다. 레닌은 즉시 비서들에게 이 자료를 연구하고 대회에서 사용할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레닌은 연구 작업에 대한 자세한 지침을 제시했다.

 

"(1) 왜 그루지야 공산당 기존 중앙위원회가 경향주의를 범했다고 (스탈린등이-주) 고발 했는가. (2) 그것이 당의 기율을 파괴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고발인가, 혹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3) 왜 (상급기관인-주) 코카서스 변강위원회가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억압했다고 고발당했는가. (4) 육체적인 억압 방법에 대해 ('생물역학'). (5) 블라디미르 이리치가 없을 때와 블라디미르 이리치가 존재할 때의 중앙위원회 노선. (6) 위원회의 태도. 그것은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에 대한 혐의만 심사하는가? 아니면 코카서스 변강위원회에 대한 혐의도 심사하는가? 그것은 '생물역학' 사건(구타사건-주)을 심사했는가? (7) 현황 (선거운동, 멘셰비키, 억압, 민족분쟁).  (레닌전집 2판 43권, 567-568 쪽)

 

2월 3일, 레닌은 정치국이 이미 제르진스키 위원회의 제안을 비준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서에게 자료를 서둘러 연구하여 3주 내에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또 여러 차례 보고서 작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2월 14일, 레닌은 두 번이나 비서를 불러 반드시 당대회에서 뭔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그루지야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비서들에게 시간을 재촉할 것을 요구했다. 또 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의 편에 서라"고 지시했다. 레닌은  이 문제는 반드시 다음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1. 사람을 때릴 수는 없다. 2. 양보가 필요하다. 3. 강대국을 소국과 비교할 수 없다. 스탈린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왜 반응이 없는가? '경향주의자'나 '쇼비니즘과 멘셰비키 경향'이라는 딱지는 이런 경향 자체가 대국주의자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레닌전집 2판 43권, 469, 475-476, 568쪽)

 

3월 3일, 레닌은 포디에바 등으로부터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 그루지야문제 위원회 자료에 관한 보고와 결론적 의견을 접수했다. 이는  레닌으로 하여금 사건의 진상을 더욱 분명히 알게 했다. 그는 더욱 단호한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3월 5일,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했다. 

 

존경하는 트로츠키 동지:
나는 당신이 반드시 당 중앙에서 그루지야 일을 변호해 주기를 바라오. 이 일은 지금 스탈린과 제르진스키가 ‘조사’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들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소. 심지어는 그 정반대일 수도 있소. 당신이 나서 이 일을 변호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나는 안심할 수 있소. 만약 당신이 어떤 이유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모든 서류를 나에게 돌려주시오. 나는 이것으로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간주할 것이오.  
(레닌전집 2판 52권, 554 쪽)

 

레닌의 비서 볼로디체바는 이날 전화로 트로츠키에게 이 같은 편지를 전달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병이 나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는 레닌의 편지와 함께 동봉한 문서를 받고는 몰래 한 부를 복사한 후 원본을 레닌에게 돌려주었다.

 

3월 6일, 레닌은  므디와니, 마하라제 (이들은 기존 그루지아공산당 중앙위원임-주)등에게 편지를 구술한 후, 그 편지를 베껴 트로츠키와 카메네프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레닌은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들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소. 나는 오르조니키제의 잔인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인에 분노하오. 나는 당신을 위해 편지와 연설을 준비하고 있소.”(위글, 556쪽) 이것이 레닌의 마지막 편지였다. 그날 한밤중 레닌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기본적으로 국정을 돌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루지야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곧 카메네프에게서 레닌이 므디와니 등에게 보낸 편지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3월 7일, 스탈린은 오르제니키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셰어 형!
나는 카메네프에게서 이리치(레닌-주)가 마하라제 등의 동지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경향분자를 동정하고 당신 제르진스키 동지와 나를 꾸짖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경향분자를 위해서 그루지야공산당 당대회의 의지를 억압하려는 의도로 보이오. 말할 필요도 없이 경향분자들은 이 편지를 받은 후 가능한 한 그것을 이용해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 특히 당신과 미코얀 동지를 반대할 것이요.

 

나는 다음과 같이 건의합니다. 1.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는 그루지야공산당중 다수의 의지에 대해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말아야 하오. 어쨌든 이런 의지가 마지막에 충분히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2. 타협을 쟁취하되, 이 같은 타협은 관철할 때는 그루지야의 다수 책임 간부에 대한 압력이 필요 없는 정도로 한정해야 하오. 즉 반드시 자연스럽고 자원적인 타협이어야 합니다. 3.나는 미야스니코프 동지가 당대회에 참가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는데,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를 파견하지 않으려는 것 같소. 하지만 나는 그를 대표로 선출해 당대회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보오. 왜냐하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당대회의 대표로 선출될 것이기 때문이오.*

* 할만다량의 <레닌과 외코카서스연방의 형성 (1921~1923) > 39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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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풍경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레닌이 므디바니에게 보낸 편지를 입수한 후, 카메네프와 쿠비셰프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를 그루지야에 파견하여 재조사키로 결정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이견과 분쟁을 해소하고 그루지야 당내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3월 14일, 오르드니키제를 한편으로, 므디바니 등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카메네프와 쿠비셰프의 참여하에 <그루지아공산당의 당면 주요 임무에 관한 요강>이 서명되었다.

 

이 요강은 코카서스 연방의 존재 필요성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면서 또한 연방 형태는 유연해야 하고, 연방공화국에서 통합할 필요가 없는 경제 및 행정 부서의 독립성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점, 연방기관이 대러시아 쇼비니즘을 추진하는 도구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위원회는 레닌이 중태에 빠지자 황급히 조사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스탈린 등이 그루지야 문제에서 승산이 있어 보였다. 3월 16일, 스탈린은 오르드니키제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어쨌든 당대회에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 생각하오. 그루지야 당대회와 러시아공산당 제12차 당대회가 코카서스 변강위원회의 정책을 비준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소"라고 말했다. (위책 , 398쪽)

 

3월 2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그루지아공산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트로츠키는 이 회의에서  다음 세 가지 제안을 했다: "(1) 오르드니키제를 소환한다. (2) 현재 코카서스연방은 소비에트연방의 왜곡이라 단정한다. 즉 너무 중앙집권적이다. (3) 그루지아공산당의 소수파 동지들이 민족문제에 있어 당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경향'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정책은 자기방어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오르드니키제 동지의 부정확한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모두 부결되었다. (위책, 412쪽)

 

3월 31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므디바니를 소환한다. 오르조니키제를 소환하라는 트로츠키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룬제, 페트로프스키를 카메네프, 쿠비셰프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조사위원회에 참가시켜 그루지야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한다; 위원회는 한 가지 임무를 보충한다. 즉 코카서스연방에 반대하는 소수파의 잘못을 지적한다.

 

1923년 4월 17일, 러시아공산당 제12차 당대회가 개막되었다. 레닌은 병으로 인해 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포디에바는 당대회 개막을 하루 앞두고 레닌의 <민족 또는 '자치화' 문제에 관한 편지>를 정치국에 보냈다. 스탈린은 레닌이 이 편지를 트로츠키에게 건넸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날 밤 중앙위원들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트로츠키 동지가 3월 5일 레닌 동지로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높은 원칙적 의의를 지닌 이런 글을 받은 사실이 매우 놀랍다. 그는 뜻밖에도 그것을 정치국이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보고하지 않고 한 달 이상 방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12차 당대회가 개막되기 직전에야 비로소 공개했다. 오늘 당대회의 일부 대표들은 나에게 모두들 이 글에 대해 의논하고 있으며, 대표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유언비어와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말했다.

 

내부자는 중앙위원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고, 중앙위원회는 이런 소문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다. 분명 중앙위원회는 기사의 내용을 먼저 통보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포디에바 동지의 편지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기사는 아직 레닌 동지의 승인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은 발표될 수 없다.

 

* 친용리, <스탈린연보>, 중앙편집번역출판사 1999년판, 150쪽.

 

4월 18일, 대회 주석단은 <그루지아 문제를 포함한 레닌 동지의 민족문제에 관한 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 '대표단지도자 회의'에서 레닌 동지의 이 서찰과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낭독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각 주석단 위원은 대회의 각 대표단을 향해서 각각 이 자료들을 낭독한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레닌의 <민족 또는 '자치화' 문제에 관하여> 편지 및 기타 자료는 대회 전체 대표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문제, 특히 그루지야 문제는 많은 대표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문제였다. 당대회 의제가 아직 중앙위원회 업무의 총화 보고를 토론하고 있을 때, 많은 대표들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중 가장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므디바니였다. 그는 4월 18일 발언에서 스탈린과 오르드니키제가 이끄는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의 민족정책을 호되게 비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는 스탈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코카서스에서 "스탈린 동지가 그 탁월하고 근거 있는 연설을 통해 찾고 싶어 하는 독립분자란 없다. 스탈린 동지, 당신은 이런 분자를 찾을 수가 없다. 당신이 끊임없이 그들을  이곳 저곳으로 잡아당긴다고 한들 말이다.”(<맑스레닌주의연구자료> 1982년 제4집 127~130쪽 참고)

 

4월 19일,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의 조직보고에 관한 결론>에 대해 보고할 때, 므디바니 등의 발언에 대해 그루지야 문제에서 자신이 취한 정책에 대해서 답변했다. 그는 므디바니 등을 그루지야에서 전출시키려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이유는 므디바니 그룹이 그루지야 당내에서 위신이 없으며, 그루지아공산당 자체에 의해 버려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여러 차례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므디바니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비록 그가 소환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승리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패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자 돈키호테가 풍차에 치였을 때도, 그는 스스로 승리자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다. 그루지야라는 소비에트 영토에서 일하는 일부 동지들의 뇌는 완전히 정상적이지가 않은 것 같다".*

 

* 이상, 스탈린전집 5권, 184-191쪽 참조.

 

코카서스 변강구위원회가 그루지야에서 부정확한 정책을 실시하여 그루지아공산당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나는 그런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4월 23일, 대회 의제는 민족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먼저 <당과 국가 건설 중 민족문제에 관한 보고>를 했다. 25일에는 이 문제에 대한 보고서의 <결론> 역시 보고했다.


대회에서 민족문제를 토론할 때 발언자들이 앞다투어 나왔다. 대표들은 대러시아 쇼비니즘(국수주의)에 화력을 집중할 것인지, 아니면 지방 민족주의와 그루지야 문제에 반대할지 등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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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 그루지야 전쟁
 

스탈린은 보고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뿐만 아니라 지방 민족주의도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 억압받은 민족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주변으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 요인은 지방 민족주의보다는 대(大)러시아 쇼비니즘이 더욱 심각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 공화국에서 지방 민족주의가 발전하고 있다. 만약 이런 민족주의가 단지 대러시아 쇼비니즘에 대한 반응이고 방어형식일 뿐이라면 그것은 무섭지 않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부 공화국에서는 이런 방어적 민족주의가 공격적 민족주의로 변질하고 있다."  따라서 마땅히 근절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코카서스연방에 대해서는, 스탈린은 각 민족 간 균형을 유지하고 각 공화국의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 연방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루지야의 일부 ‘경향분자’들은 무엇 때문에 코카서스연방이라는 이 중간형식을 반대하고, 이 연방을 통하지 않고서 직접 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할 것을 주장하는가? 그 이유는 "그루지아 ‘경향분자’들이 일부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 (예를 들어 항구, 철도 허브 등)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루지아인들이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보다 수가 적어서 불리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단 그루지아가 단독으로 공화국을 쟁취하면,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을 트빌리시에서 이주시켜 그루지아인들을 유리한 처지에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위책, 194-206쪽 참조)

 

므디바니 등은 회의에서 발언할 때, 직접 소련에 가입하고 코카서스연방이라는 이 중간고리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연방이 성립된 후 군사/외교 등 방면은 이미 소련 전역에서 통일을 실현하고, 게다가 각 공화국 기구들이 몇 차례 구분을 거친 후 코카서스 연방에 남겨진 것은 단지 두 개의 인민위원부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인민위원회 의장에겐 두 개의 인민위원부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은 얼마간 부적절한 연합 형식이다!" 따라서 이 중간 단계가 이미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보고서에서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의 발언이 "자신들의 국수주의적 정서를 공산당 전체에 전염시킬 위험이 있다"고  맹공격했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레닌 동지의 편지에서 서술한 관점에 입각해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자료> 1982년 4집, 130-136쪽 참조)

 

부하린은 회의에서 발언할 때, 대러시아 쇼비니즘에 대한 반대에 힘을 집중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민족문제에서 레닌주의의 실질은 우선 우리의 기존 기본적인 쇼비니즘, 대러시아 쇼비니즘과 싸우는 데 있다"고 했다. "이 부분에 있어 민족 평등의 관점에서조차 출발할 수 없다. 레닌 동지는 이 점을 여러 차례 증명한 적이 있다. 반대로 우리는 과거 강대국의 민족으로서 (자신의-주) 민족주의적  요구를 제지하고 (다른-주) 민족 경향에 대해 더 큰 양보를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불평등한 지위에 처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 억압받은 민족의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만약 당대회에서 "지방 쇼비니즘 문제에 관해 토론하는 것은 우리가 옳지 않은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된다. 왜 레닌 동지가 그루지야 문제에 이렇듯 큰 힘을 들여 경고를 했는지 알아야만 한다. 왜 레닌 동지는 자신의 편지에서 ‘경향분자’에 관한 잘못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4 러시아자(284cm 길이, 장문을 뜻함-주)나 되는 글로 그런 反경향분자 정책을 반대했는가?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지방 쇼비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인가? 아니면 분리 성향이 있는 10개의 주를 들 수 없어서일까?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왜냐하면 레닌 동지는 천재적인 전략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색깔을 절충적으로 다른 색깔과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요한 적을 타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만약 '객관적 공정'을 위해 우리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이야기하고 동시에 그루지야  국수주의, 우크라이나 국수주의가 존재한다고 논했다고 하자. 이렇게 하면 우리는 기본적인 문제를 파묻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 코바 스탈린 동지는 러시아 국수주의를 날카롭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그루지야인으로서 그루지야 국수주의를 반대한다. 이 점은 내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러시아 국수주의를 반대하는 것 역시 허락해 달라"고 말했다. (위 자료, 124-126쪽)

 

스탈린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소수민족을 억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히 옳다. 나는 이 점에 동의한다. 소수민족을 억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하지만 만약 이로 인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과거 억압된 민족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지위에 처해야 한다는 새로운 이론이 창조된다면,  이는 헛소리이다. 레닌 동지의 유명한 논문에서 단지 문자상 표현 방법일 뿐인데, 부하린은 결국 그것을 완전한 구호로 만들었다.”(스탈린전집 5권,  214쪽) 여기서 스탈린은 부할린뿐 아니라 레닌의 견해도 반박하고 있다.

 

스탈린은 <결론>에서 “오직 러시아의 공산당원만이 대러시아 쇼비니즘에 반대하는 투쟁에 종사할 수 있고, 그것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만약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그루지야나 투르키스탄에 의해 반대된다면 그것은 일을 망칠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위책,  216-217쪽)

 

대회는 스탈린의 보고와 <결론>에 근거하여 <민족문제에 관하여>란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들 보고서와 결론, 결의를 보면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는 허구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 이에 비해서 지역 국수주의에 대한 반대는 구체적이다. 회의에서 그루지야 지도자들은 엄격한 비난을 받았다. 스탈린이 이끄는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노선이 관철되었으며, 민족문제에 관한 레닌의 편지는 중시 받지 못했다. 스탈린이 민족문제에서 보여준 대러시아 국수주의 작풍은 훗날 소련의 해체를 위한 화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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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과학지식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3)

2023.12.23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슬프지만 아름답고 찌질하지만 위대한 이 학교

개교 30년 부천실업고 만든 이주항 선생 "명문학교는 되지 않으렵니다"

2023.12.23

교양

[영화 단상] 민주주의를 선동하는 영화와 피하고 싶은 자들 - 영화 『서울의 봄』 (2023)

2023.12.21

연재

요셉 스탈린(제13회)ㅡ 그루지야 문제 ⓶

2023.12.17

교양

[시] 단동에서 목포를 꿈꾸다

2023.12.16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항일운동가 이관술의 손녀딸 손옥희의 호소 ②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유가족을 찾습니다

2023.12.16

교양

법이야기⑤

위법 체포

2023.12.15

연재

지춘란(6)ㅡ 중국 동북3성 조선인 장병들의 귀국

ㅡ 사람을 찾아서

2023.12.13

연재

요셉 스탈린 (제12회) ㅡ 그루지야 문제 ⓵

2023.12.10

교양

[시] 진실

202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