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 ⑤
등록일 : 2023.02.01

1. 해방정국 전환의 계기ㅡ ‘신탁통치’  

 

한반도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이 1945년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모스크바에 모였다. 흔히 ‘모스크바 3상 협정’이 곧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핵심적 내용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참여하에 미·소·영·중 4개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협정을 미·소가 체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것은 독립을 유보하고 유엔 주도하의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과 한인의 참여가 보장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소련 안’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에는 ‘소련의신탁통치안’으로 왜곡 전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방정국 초기의 ‘애국 대 매국’(항일세력 대 친일세력)의 대립구도는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구도로 전환했다. 우익은 ‘반탁운동’을 통해 세를 크게 확장하면서 해방 직후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관계를 상당정도 만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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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역사상 사상 최악의 오보.   1945.12.27. 동아일보 1면.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 거짓말하고 있다. 이 오보로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2. 전평 ‘정국의 핵’으로  등장


모스크바 결정을 둘러싼 팽팽한 좌우간 대립에서 전평은 국제적 차원에서 반파쇼 민주주의 국제노선에 입각하여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였다. 전평은 미소공위 지지운동을 전개하고, 노동자를 위한 정부를 만드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평 산하의 노동자들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안 지지를 위한 대중집회에 대거 참여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20만 대중조직을 가진 전평이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국의 핵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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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전평집회. ‘삼상결정절대지지’라고 적혀있다.
 

 

3. 우익의 각성, ‘대한노총’ 결성으로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회 등 우익청년단체와 경찰만 행동부대로 가졌던 우익세력은 뒤늦게야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곧바로 우익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일에 돌입했는데 미군정은 이를 지원했다. 마침내 어용노조가 탄생하였다. 오늘날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이 그것이다.
당시 철도노조와 함께 가장 강력했던 노동조합인 경성전기노동조합은 신탁통치 국면에서 노동계가 어떻게 갈라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경전노조의 우경화도 반탁시위부터 시작됩니다. 반탁 집회에 참가한 일부 노동자들과 전차과의 정대천을 중심으로 한 중간관리자 14명이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전평 소속 경전노조에 대항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에 경전노조는 회사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해고시켜 버리는데, 해고된 이들은 이승만과 우익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아 1946년 3월 10일 대한노총 결성을 주도하게 됩니다.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이렇게 급조된 대한노총은 1946년 8월까지만 해도 그 규모가 3000~4000 정도로, 노동자 대중의 기반을 거의 구축하지 못한 정치단체에 불과했다. 

 

4. ‘정판사 사건’ㅡ 정국이 급랭하다 !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직후인 1946년 5월 8일, 미군정은 정판사 사건을 조작하여 좌익세력에 대한 전면 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정국은 급랭하고 9월 총파업으로 치닫게 된다.
원래 미군정은 일제 조선총독부 하에서 자행된 불법적 화폐 남발을 계승하여 위폐로 의심되는 화폐를 대량 유통시켰다. 이 때문에 수많은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고, 화폐 유통 체계에 큰 혼란이 생겼다. 식량 문제, 물가 문제, 실업 문제 등 갖가지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대중들의 불만은 자연히 미군정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 이 모든 책임을 좌익 쪽에 돌렸다. 미군정은 고작 천만원의 위폐 사건을 조작하여 불과 6명의 노동자와 5명의 독립운동가에게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이 수백억원의 화폐를 찍으며 발생시킨 초인플레이션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조선공산당은 압수 수색을 받은 뒤 입주해 있던 건물에서 쫓겨났으며, 공산당 기관지나 다름없던 좌익 성향의 신문들은 정간되거나 폐간되었다. 조선공산당은 그 대응으로 1946년 7월 들어 ‘신전술’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고, 지금까지 미군정에 협조적인 태도를 바꾸어 적극적인 대중투쟁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평도 대대적인 파업 준비에 착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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