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⑥
등록일 : 2023.02.01

 1. 미군정청 운수부의 구조조정이 직접적 계기


9월 총파업 발발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미군정청 운수부의 정책 발표였다. 1946년 8월 20일, 미군정 운수부는 ‘산업합리화’를 내세우며 철도노동자 25%를 줄이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였다. 
9월 15일 미군정 당국과 철도노조의 회담이 결렬됐다. 노조는 수차례 미군정 당국에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했지만, 9월 23일 코넬슨 운수부장은 “인도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강냉이라도 먹고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로 조롱하였다. 이 말이 전해지자 분노한 노동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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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국적  총파업으로  발전


9월 23일 오전 0시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제일 먼저 파업에 들어갔다. 이튿날에는 서울철도국의 1만 5,000여 명의 노동자들도 파업을 단행함으로써, 남한의 철도교통망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9월 26일 출판노동조합 1,277명의 동정파업을 선두로 대구우편국 노동자 400명, 27일에는 서울중앙우편국 600명, 그 이후 중앙전화국 1,000명이 파업을 벌였다. 각급 학교 학생들까지도 국립대학안 반대를 이유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근 10일 동안 남한 산업의 많은 부문이 마비되어 서울에서만 공장 295개, 노동자 3만여 명, 사무원 6천여 명, 20개 학교, 학생 1만 6천여 명, 교수 3백여 명이 참여했고, 지방에서는 5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3. 미군정과 우익의 반격


미군정의 지시를 받는 경찰은 9월 30일 총파업의 거점인 서울철도 파업단에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관 2천여 명을 투입했다. 이어 대한노총(현 한국노총 전신), 대한민청, 독촉 등 반공 우파 청년단 1천여 명도 가세했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필두로 8시간에 걸쳐 시가전을 벌인 뒤 3명의 간부가 사망하고 총 1,700여 명이 연행되면서 우파세력에게 점거되었다. 서북청년단원 700여 명도 서울철도에 침투하여 정지된 철도 교통을 복구시켰다. 우익청년단원들은 광산회사, 섬유 공장들과 다수의 공기업에 침투하여 파업이 끝난 다음에도 공장에 남았다. 그들은 대한노총의 간부가 되어 전평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색출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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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 노동자 파업 집회 

 

4. 10월 대구항쟁으로 이어지다


9월 총파업은 전평 간부 및 조합원들이 대량 구속되면서 마무리됐다. 서울에서만 2,200명 이상의 노동자가 검거됐고, 2,000여 명 이상이 해고됐다. 이 파업으로 붕괴될 정도는 아니지만 전평은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조직력이 크게 약화됐다. 대한노총맹원이 철도종업원의 새로운 대표로 선출된 후, 10월 14일 운수부 당국자와의 협정이 체결되어 9월 총파업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항쟁, 여순반란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당시 좌익세력은 군대까지 침투하는 등 광범위한 대중적 기초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역량도 산발적으로 터져 나옴에 따라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5. 교훈 –총파업 실패의 원인


첫째, 애초 미군정의 본질을 잘못 인식한데 근원이 있다. 전투의 첫 번째 원칙은 적과 아를 정확히 가르는 일이다. 전평은 해방 직후 공장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다가, 미군정에 막히자 산업건설운동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친일파 우익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는 조건에서 산업건설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현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자발적인 투쟁을 억압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미군정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었다. 
둘째,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애초 농민들의 추수투쟁과 결합하기 위해 10월로 예정됐던 총파업은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한 달 정도 앞당겨졌다. 이에 비해 미군정은 상황을 ‘전쟁’으로 간주하고 노동자의 총파업에 철저히 대비했다. 미군정청 운수부장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상황은 마치 우리가 전투에 돌입한 것과 같았다. … 그것은 전쟁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전쟁으로 생각했다. ”(Stewart Meacham,<미군정하 노동정책-한국 노동사정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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