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5.26
레닌 생전의 코민테른 참석자들과의 합동사진 (좌측 5번째 부하린, 레닌 오른쪽 3번째 지노비예프 등의 모습이 보인다).png.jpg
레닌 생전에 코민테른  동지들과 함께한  사진.  좌측 5번째 부하린,  앞줄 레닌 오른쪽 3번째 지노비예프의 모습이 보인다. 


1929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지만 부할린 등에게는 이 한해가 아무런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양력설이 얼마 지나지 않아 1월 20일, 트로츠키파는 <당의 눈은 가려졌고, 새로운 재난으로 인도되었다>는 제목을 달아 모스크바에서 부하린과 카메네프 간의 대화록을 배포했다. 이때부터 형세가 급전직하했다.  대화록의 공개는 스탈린에게 부하린이 파벌 집단을 조직하여 반당적인 활동에 종사한다고 비난할 수 있는 강력한 구실을 제공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과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 연석회의에서 <부하린집단과 우리 당내의 우경화>란 제목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아무리 가슴이 아프더라도 우리 당내에 부하린, 톰스키, 리코프로 구성된 특수한 부하린집단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과거 당은 이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부하린 분자들이 당에 이 집단의 존재를 엄밀히 숨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집단은 우경투항주의 집단으로 "부할린은 일찍이 이 집단의 위탁을 받았으며, 일찍이 카메네프와 막후 협상을 진행하여 부하린과 트로츠키 분자의 동맹을 조직하고 당과 당중앙을 반대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그룹이 당의 정책에 대항하는 특수한  자신들의 정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1) 공업 발전의 속도를 낮출 것을 요구 (2)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건설을 축소할 것을 요구 (3) 개인무역의 완전한 자유화, 무역에서 국가의 조절 역할을 포기할 것을 요구가 그것이다. (<스탈린전집> 11권, 274-275쪽)


부할린은  자신에  대한 혐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회의에서 세 사람을 대표하여 미리 준비한 장문의 성명을 낭독했다. 성명은  스탈린의 ‘공금’ 구호*는 사실상 "농민에 대한 군사적 봉건 착취의 구호"이고, 농민에 대한 ‘초과세’를 징수하는 기초에서 급속한 공업화의 방침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재난을 초래하는 정책이다. 스탈린은 이미 완전히 트로츠키 입장에 서 있으며 새로운 ‘전시공산주의’를 진행하고 있다. 스탈린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당내에는 민주주의가 결핍되어 있다. 당대회의 결의 따로, 스탈린의 집행 따로이다. 이 때문에 당 결의는 사문화되었으며, 당내 민주주의가 허위가 되었다.

 

당은 ‘관료주의화’ 되었으며, "우리는 관료주의를 배양하고 있다."  당내에 선출된 서기가 없으며,  모두 위로부터 임명되었다. 국가의 긴박한 대사는 토론되지 않고 상부에서 결정한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정책은 오류이다.  스탈린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기회주의’, ‘화해파’, ‘변질 분자’ 등의 모자를 씌웠으며,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형제 당들을 대했다. 이런 정책은 코민테른 각 지부를 와해시키고, 해이하고 분열 상태로 만들었다. 당내에서 그들을 조직적으로 포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등등이다. (정이범, <부하린 논고>, 404, 406-407쪽에서 인용) 

 

*  ‘공금’ 구호*ㅡ 스탈린은 <공업화와 식량 문제에 관하여>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즉,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자금의 출처가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이다. 소련은 식민지와 다른 나라를 약탈하거나, 노예적인 외채를 빌려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도, 자금의 주요 공급원은 농부들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이를 위해 농민들은 일반세 즉 직접세와 간접세를 국가에 납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비싸게 사고 싸게 팔아야 하는 협상가격차가 일종의 '추가세'이자  '공금(贡款)' 같은 것이다.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과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 연석회의는 부하린-카메네프 회담과 부하린의 '성명'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위원회에 스탈린과 부하린 외에 보로실로프, 키로프, 몰로토프, 코로트코프, 오르조니키제, 루주타크, 야로슬라프스키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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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부터) 미코얀, 키로프, 스탈린이 함께하고 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1930년대 초)

 

이 위원회는 2월 7일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부하린에게 카메네프와의 회견이 "정치적 오류"를 범한 것임을 인정하고, 1월 30일자 성명을 철회하고 자신의 직책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이는 부하린이 [프라우다]와 코민테른의 직무를 사임하도록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그 대가로 중앙위원회 역시 부하린에 대한 고발 동의(動議)를 포기한다는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


부하린은 이 화해안을 거절한 후 리코프, 톰스키와 함께 또 다른 성명을 기초했다. 2월 9일, 중앙정치국과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은 다시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리코프는 회의에서 세 사람이 서명한 성명을 낭독하면서 자신들의 관점을 견지했다. 이른바 카메네프와 파벌 집단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는 비난을 단호히 부인하면서, 이는 “난폭한 사실 왜곡”이고 "파벌 발명"을 기도하는 것이자, 결국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고 "단죄"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부하린 등의 변명은 일리가 있다. 당시 카메네프 등은 이미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을 탈퇴하고 스탈린 다수파의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부하린에게는 어떤 지지도 보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당적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내에서 더 이상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부하린 분자와 트로츠키분자의 동맹"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부하린 역시 이런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과 어떤 동맹도 맺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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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석회의는 부하린 등의 변명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회의에서 자신의 다수파 지위를 이용하여 당내 사건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부하린과 카메네프의 회동 문제를 틀어쥐고, 그들이 파벌집단을 만들어 당의 경제정책을 변경하고 그것에 "발맞춰 정치국원을 교체하려 했다"고 질책했다. 그런데도 리코프와 톰스키는 이런 사실을 알고도 당에 보고하지 않았다."이런 행위는 완전히 용납할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당의 통일을 절대적으로 수호하기 위해서 회의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부하린의 중앙위원회 업무에 대한 비판은 근거가 없다.
(2) 부하린이 국내 정책에서 프롬킨 노선과 단호히 선을 그을 것을 지시한다.
(3) 부하린과 톰스키의 사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4) 부하린과 톰스키에게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당과 중앙의 모든 결의를 충성스럽게 집행할 것을 지시한다.*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및 중앙위 전원회의 결의 집성> 제3분권. 462-479쪽 참조.

 

이렇듯 쌍방이 서로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후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1929년 4월 16일부터 23일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는 합동 전체 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전체회의에서 스탈린은 <당내 우경화에 대해>라는 장문의 연설을 하는 등 세심한 준비를 했다. 그는 더 이상 당내의 화해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대신 이견과 투쟁을 강조했다. 당내에는 두 가지 노선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하나는 중앙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부하린그룹의 기회주의 노선인데, 이는 "반당 선언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사직하는 방식으로, 당을 모독하는 방식으로, 암암리에 당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어제의 트로츠키 분자와 반당연맹을 조직하기 위해서 막후담판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당에 반대하는 노선"이라고 규정했다.


스탈린은 발언에서 그의 ‘공금론', 집체 농장과 공업의 급속한 발전 정책을 입증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계급투쟁 첨예화 이론을 다시 한번 심도 있게 설명하면서, 부하린의 이른바 '계급투쟁 소멸론'과 “부농이 사회주의로 성장한다”는 이론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톰스키를 '노동조합주의 정치인'이라고 불렀으며, 부하린을 "얼마 전까지 트로츠키의 문하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이론은 터무니없는 '헛소리'이며, 부하린파의 선언은 “파렴치하고 난폭한 유언비어”라고 말했다.

 

회의에서 부하린, 톰스키, 우그라노프는  스탈린과의 얼마전까지 우정을 들먹이며  스탈린의 어투를 완화시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모든 것이 이미 "깨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며 외면했다.  (<스탈린전집> 12권, 3-9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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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후 소련 최대의 이론가로  손꼽히는 부하린


부하린 등은 회의에서 이치에 맞는 논쟁을 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전원회의는 마지막으로 <당내 사건에 관하여>라는 결의를 통과하고, 부하린의 [프라우다] 주필 직위와 코민테른 정치서기처 서기 직위를 취소하고, 톰스키에 대해선 소비에트 노동조합 중앙이사회 의장 직위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4월 말에 소집된 제16차 당대회는 4월 전원회의의 이 같은 결의를 비준하였다. 7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제10차 확대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부하린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장단 위원직을 해임키로 결정했다. 


그후 전국적으로 ‘우경분자’ 비판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는 곧 집단화 가속화의 실질적 신호탄이 됐다.


1929년 11월 7일, 스탈린은 [프라우다]지에 <대전환의 한 해>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농촌에서 전면적인 집단화의 시작을 선포하고, 국가가 이미 식량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우경기회주의자 (부하린집단) 의 단언은 이미 파산하고 분쇄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집단농장이 이미 농촌에서 사회주의 발전의 ‘대도(大道)’가 되었다고 했다. (<스탈린전집>12권, 106-107쪽)


스탈린의 이 글은 11월에 열리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위한 기조가 되었다. 이번 전원회의는 11월 10일~17일에 소집되었는데, 주로 1929~1930년도 국민경제 통제수치, 집단농장 건설과 ‘부하린집단’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전원회의에서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 등을 번갈아 공격했다. 11월 12일, 그들 세 사람은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들은 "과거와 지금 당의 총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면서, 5개년계획 및 "정치국 결의에서 이번 전원회의에 제시한 통제수치"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업화를 위해 규정한 속도에 대해 단호히 찬성하며,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및 그 규정 속도에 찬성한다. 우리는 부농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주장한다. 우리는 빈농에 의존하여 부농을 반대하고, 중농과의 굳건한 연대를 위해 그들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을 주장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자신들과 중앙의 이견은 단 한 가지, 즉 비상조치를 둘러싼 문제라고 간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와 중앙 다수 간의 의견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라고 성명했다.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가 "이견이 사라지고 있다"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참석자들은 그들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스탈린은 회의에서 농민협동조합을 통해 사회주의로 진입한다는 공식을 비판했다. 오르드니키제는 '이견'은 비상조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업 발전 속도에 있으며, 집단화를 바탕으로 농업을 개조하는 데 있다고 논박했다. 부브노프는 발언에서 "조직된 자본주의"를 거세게 비판하고, 부하린이 쓴 <레닌의 정치유언> 에 대해  부하린 자신의 합작사계획으로 레닌의 합작사계획을 대체했다고 주장했다. 몰로토프는 회의에서 장문의 발언으로 그들 세 사람의 성명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우경 분자’와의 의견 차이는 일련의 중대 문제와 관련된다고 간주했다.

 

예컨대 공업화의 속도문제,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건설 및 이와 연계한 부농에 대한 공격, 관료주의와의 투쟁, 코민테른 정책 등이다. "근본적인 쟁점은 계급역량에 대한 서로 다른 추정, 계급투쟁에 대한 상이한 태도, 계급 임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다. 핵심적인 문제는 어떻게 노동계급을 동원해서 소련 국내의 자본주의 성분에 대한 진격을 개시하고, 전 세계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혁명 투쟁을  전개할 것인가 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비상조치를 반대하는 것은 부농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공격 정책을 퇴각 정책으로 바꾸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정이범, <부하린 논고>, 404, 406-407쪽)

 

부하린의 딸 구르비치 부하리나와 중국 부하린 연구 전문가 정이범 교수. (1988).png.jpg
부하린의 딸 구르비치 부하리나와 중국의 부하린 연구 전문가 정이범 교수. (1988년)


11월 17일, 전원회의는 마지막으로 <부하린집단에 관하여>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부하린집단의 11월 12일자 성명이 "파벌 활동 성격의 문건으로서 트로츠키분자의 ‘퇴각’ 수완 (...) 과 유사한 정치파산자의 파벌활동 수완"이라면서, "일종의 당을 적대시하는 문건"이라고 간주했다.  전원회의는 부하린의 정치국위원 직무를 해임하고 리코프, 톰스키 등에 대해선 경고 조치를 결정했다.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및 중앙위 전원회의 결의 집성> 제4분권, 110-112쪽 참조.)


일주일 후인 11월 25일, 엄청난 스트레스를 견디던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는 중앙에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최근 1년 반 동안 우리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다수는 일부 정치 및 전술 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우리는 일부 문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합동 전원회의 및 기타 회의에서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우리는 이 논쟁에서 당과  중앙이 정확하다는 것을 분명히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부 문건에서 서술한 우리의 관점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이런 잘못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 방면에서 전력을 다해서 전당과 함께 당의 총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경향, 먼저 우경화와 타협주의와 견결히 투쟁하며,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사회주의건설의 완전한 승리와 조기 승리를 보장할 것이다. (정이범, 위책, 409-410쪽)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그들 주장의 실패를 선언한 것이며, 정치적 패배를 선언한 것이다. 부하린은 이후 당과 국가에서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톰스키와 리코프는 1930년 정치국 위원직에서 물러났다. 리코프는 인민위원회 의장직에서 해임되고 몰로토프가 스탈린의 지명으로 의장직에 올랐다. 이로써 레닌이 서거한 뒤  '제13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7명의 정치국 위원인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 스탈린 중 스탈린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스탈린은 다름 아닌 레닌이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총서기 자리에서 끌어 내릴 방법을 강구할 것을 요구했던 사람이다.

 

독일 베르크만 교수와 중국 학자.왼쪽부터 6번째가 정이범(郑异凡)교수. (1990년).png.jpg
부하린 관련 학술토론회에 참석한 독일 베르크만 교수와 중국 학자들.왼쪽부터 6번째가 정이범(郑异凡)교수. (1990년)


그러나 스탈린은 몇 차례 당내 투쟁을 통해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고, 당과 국내 및 공산권 내에서 유아독존적 지위를 확립했다. 그해 12월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 토지문제 전문가 대표회의'에서 "우리가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한 것은 사회주의 사업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더 이상 사회주의 사업을 위해 봉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저승으로 보낼 것이다.”고 선언했다.(<스탈린전집>12권, 151쪽) 

 

이때부터 소련 역사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레닌이 제창했던 신경제정책은 중단되고, 그 대신 전국적으로 폭풍우 식의 전국적인 집단화 운동과  급속한  공업화 운동이 일어났다. "계급투쟁 첨예화" 이론의 지도하에 대대적인 탄압운동이 시작되었다. 정치, 경제 및 사회생활에서 행정 명령적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소련 사회주의 건설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상징되는 레닌의 건설모델을 버리고, 소련 모델로 불리는 스탈린 모델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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