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5.29
주막집-3.jpg
주막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시 또한 공감이 중요하다. 공감의 폭이 넓어지려면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가 독자와 함께하려면 독자와 가까워져야 한다. 독자는 단순히 책을 읽는 대상이 아니라 시인도 속한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삶을 살아 가는 존재다. 시적 대상과 거리를 좁힐 때 독자와의 거리도 좁아질 수 있다. 시적 대상은 시인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관심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은 때로는 관심사를 넘어서서 작가나 독자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와의 거리 좁히기는 시적 대상과의 거리 좁히기이기도 하다.

 

지난 5월 22일 세상을 떠난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면서 거리 좁히기의 측면에서 그의 작품과 생각을 되돌아본다.

 

시게전 끝께에서 술장사를 하는
김막내 할머니는 이 길로 쉰 해째다
청춘에 혼자되어 아이 하나 기르면서
멀쩡하던 사내 하룻밤새 송장 되는
차마 못 견딜 험한 꼴도 보고
죽자 사자던 뜨내기 해우채 되챙겨
줄행랑놓았을 때는 하늘이 온통 노랬지만
전쟁통에는 너른 치마폭에 싸잡아
살린 남정네만도 여럿, 지내놓고 나니
세상은 서럽기만 한 것도 아니더란다
어차피 한세상 눈물은 동무해 사는 것
마음은 약하고 몸은 헤펐지만
때로는 한숨보다 더 단 노래도 없더란다
이제 대신 술청을 드나드는 며느리한테
그녀는 아무 할말이 없다
돈 못 번다고 게으름핀다고 아들 닦달하고
외상값 안 갚는다고 손님한테 포악 떨어도
손녀가 캐온 철이른 씀바귀 다듬으며
그녀는 한숨처럼 눈물처럼 중얼거린다
세상은 그렇게 얕은 것도 아니라고
세상은 또 그렇게 깊은 것도 아니라고

(신경림, 「김막내 할머니」)

 

이 시에는 ‘안의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안의는 덕유산 아래 함양땅에 속한 지명이다. 시인은 시적 대상, 즉 시게전(시장에서 곡식을 파는 노점이나 가게를 이르던 말)에서 술장사를 하는 할머니의 사연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만큼 가까이 다가갔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여행객으로서 낮에 경치나 즐기고 밤에 음주로 시간을 보냈다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시적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 모습은 「안의장날」에서도 볼 수 있다.

 

산나물을 한 소쿠리 다 팔고
비누와 미원을 사 든 할머니가
늙은 마병장수와 장국밥을 먹고 있다
한낮이 지나면 이내 파장이 오고
이제 내외가 부질없는 안팎사돈
험하게 살다 죽은 사위
아들의 얘기 애써 피하면서
같이 늙는 딸
며느리 안부만이 급하다
손주 외손주 여럿인 것이 그래도 대견해
눈물 사이사이 웃음도 피지만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이토록
오래 살아 있는 것이 영화라고
아니면 더없는 욕이라고

 

 

시게전 할머니.jpg
시게전의 할머니

 

장날 볼 수 있는 여러 풍경 중에서 시인은 두 늙은이의 순탄치 않은 삶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의 사연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연민을 느끼면서 되새기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다가가는 대상은 사물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시적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해당한다.

 

‘지리산 달궁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아래 시에서는 공간에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달궁은 먼 옛날인 삼한 시대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운 세상 중에 이상향을 꿈꾸던 공간, 그러나 그 꿈이 끝내 수난 속에 흩어지고 마는 아쉬움의 공간을 대변한다.

 

비 오는 날이면 소녀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를 부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눈발 치는 어스름에는 소년들이 서성이는 것이 보인다
어깨동무로 미지기도 하고 갈갬질도 치면서
바위 사이로 나무 사이로 몰려다니는 것이 보인다
꽃 피는 철에는 처녀애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진달래로 산나리로 맨몸을 치장하고
골짜기에서 자갈밭에서 꽃나비 춤추는 것이 보인다
기러기 나는 달밤에는 사내애들 뛰노는 소리 들린다
끼줄도 하고 씨름도 하고 공중잽이도 하면서
쿵쿵 달구질로 땅 밟는 그림자가 보인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 소년 소녀들 부릅뜬 눈이 보인다
나뭇잎 사이 이슬 맺힌 꽃덤불 속 싱그러운 바람 속에
사내애들 처녀애들 맑고 고운 눈이 보인다
세상의 더러움을 몰라 사람의 교활함을 아직 몰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을 죽지 않게 하는
활활 불길로 타는 부릅뜬 눈이 보인다 

 

(신경림, 「부릅뜬 눈」)

 

달궁 계곡에서 그저 경치나 감상하고 야영하면서 즐기기만 한다면 위와 같은 시가 나올 수 없다. 시인은 그 공간에 신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소년 소녀들의 해맑은 모습을 그릴 수 있었고 그들의 한 맺힌 눈을 볼 수 있었다. 한때 빨치산의 해방 특구이기도 했던 달궁 계곡에서 실제 있었을 법한 장면들이기도 하다.

 

지리산 달궁.jpg
지리산 달궁계곡

 

1990년에 발간된 그의 시집  <길> ‘후기’에 밝힌 바에 따르면 신경림 시인은 “틈만 나면 돌아다니면서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도 만나고 마을도 구경하고 친구도 사귀었다.” “꼭 시로 쓰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주는 사람이나 고장을 만나”면 그때마다 메모해 두었다고 한다. 더러는 그 직후 시로 정리해서 발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냥 메모로 남겨 둔 채 여러 해가 지나기도 했단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세상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시적 대상에 다가간 것이다. 

 

멀리서 볼 때 보이지 않던 것도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게 된다. 시적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그런 만큼 표현이 풍부해진다. 시인은 구경꾼이 아니다. 시적 대상을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고 때로는 대상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시적 대상과 거리를 좁히려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찰도 해야 하고 때로는 대화도 필요하다. 공부도 해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하고 상상력도 발휘해야 한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대상의 처지에 깊이 빠져 볼 필요도 있다. 거리 좁히기에 부지런한 만큼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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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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