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민병래 ('황소와 나비' 대표)
등록일 : 2023.03.11

관동대지진-SBS.jpg

 

올해 9월 1일이면 일본 관동지방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일어난 지 백 년이 된다. 일본은 수십 만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행방불명이 되었던 아픔을 기려 이날을 방재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6661명 이나 되는 조선인이 대학살을 당한 사실에 대해선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학살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학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에 100년이 흘렀건만 그 진상은 지금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립국가가 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단 한 차례도 일본에 사과는 커녕 진상 규명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학살당한 조선인 노동자를 위한 어떤 기념물도 만들지 않았고 기념행사도 거행하지 않았다. 그 흔한 조사나 외교부 차원의 성명조차 발표한 적이 없다.

 

지진 당시 조선인을 형식상으로 대표하는 정부 기관은 조선총독부였다. 사이토 총독은 지진과 학살 소식을 접하고 머리를 싸맸다. 관동에서 일어난 살육 소식이 한반도에 전해지면 조선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자칫 3·1운동과 같은 저항이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이토는 일본 사법성이 조선인 학살 피해자가 233명이라고 인정했는데도 조선인 피해자는 단 2명뿐이라고 우겼다. 조선총독부는 그해 11월까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관련 보도 601건에 대해 기사 게재 금지 조치를 취했다. 또 조선인의 일본 입국을 막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헌병을 동원해 입막음을 하고 주변을 감시했다. 유족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땅에 남아있던 6661명의 희생자 가족은 생사를 몰라 이제나저제나 일본에서 가족이 돌아오길 수십 년 동안 기다렸다. 8·15해방 후 강제징용과 징병자, 많은 재일동포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이도 잠시, 해방 후의 격동과 한반도의 내전 속에서 관동의 희생자를 찾고 기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반공 독재 정권 속에서 유족은 모일 수도 없었고 일본의 죄과를 묻는 일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관동의 비극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희생자와 그 유족 또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참변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백주년을 맞아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유족 2세 김대원, 조팔만의 사연을 모아보았다. 연이 닿는 유족 3세 권재익, 조광환, 홍동선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짧게나마 관동 조선인 학살 피해자의 가슴 아픈 가족사를 구성했다.

 

지금 일본은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커녕 재무장의 길, 군국주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때문에 관동대학살은 끝나지 않은 비극이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결코 100년 전의 일이 아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톱으로 켜서까지 죽여
- 유족 2세 김대원

 

우선 목포의 김대원이 있었다. 김대원의 증언은 2009년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이 목포를 찾았을 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촬영한 영상이 있다. 이 영상기록과 신문을 통해 정리했다.


당시 주소로 전남 무안군 안좌면 원산리의 김광진(31), 김광수(28), 김동민(25), 김광삼, 김동진 등 다섯 사람은 도쿄 아사쿠사구 아사쿠사바시(淺草橋)에서 학살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갔다. 김광삼의 양자인 김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동진이 양복 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먼저 떠났고 나중에 집안 친척을 불러들였다.

 

참변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김광삼의 큰아버지뻘 되는 김동진뿐이었다. 학살 당시 피범벅이 되어 쫒기던 그는 어느 일본 사람 집을 두드렸고 '어서 들어오라'며 숨겨준 덕에 살아남았다. 김동진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조선인을 톱으로 켜서까지 죽였다고 증언했다.

 

같은 집안이었던 김대원은 대가 끊긴 김광삼의 양자로 들어갔다. 유골을 수습할 수 없었기에 헛묘를 써서 김광삼의 기일을 챙겼다.  

 

관동대지진-자경단.jpg
관동대지진 후 각지에서 결성된 자경단의 모습 조선인 색출에 앞장 선 자경단 ⓒ 강덕상


 그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헌병이 김광삼의 집으로 위로금을 가져왔다고 한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집안 어른에게 들은 얘기인지라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당시 조선총독부가 저항의 불씨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로금 지급을 한 것은 사실이다.

 

1924년 6월 조선총독부 관방외사과에서 제작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문제>에 보면 "총독부에서는 지진 때문에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조선인의 유족에 대해서는 1인당 200엔 정도의 조위금을 보내고 지방 관리를 시켜 유족을 위문하도록 했는데 그 인원은 830명이고 조위금 총액은 16만 6000엔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1922년 당시 일본 관동지방에서 백미 10kg의 소매 가격이 3엔 4전 수준이었는데 200엔이라면 560kg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조선의 농민에겐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김대원은 액수를 200원으로 기억한다. 엔과 원은 차이가 있다. 원이라 하더라도 당시 200원은 오늘날 구매력 기준으로 하면 약 1000만 원 내외에 해당한다.*이 돈이 형제별로 각각 나왔는지 집안 전체로 나왔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조선총독부의 목적은 유족을 입막음하고 저항의 기운이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200원의 구매력에 대한 판단은 광운대 김광열 교수가 쓴 논문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시 학살된 한인과 중국인에 대한 사후조치>에서 인용했다.  
 1923년 전후 200원의 구매력은 얼마일까? 당시 기록을 보면 1919년 수원의 4인 가족 생활비는 25원, 같은 해 관청에 근무하는 일본인 하급 서기의 월급은 본봉 30원, 수당 20원 합하여 50원 정도다. 1920년 일용노동자 하루치 임금은 조선인이 1원 10전, 일본인 1원 50전이었다. 1920년 동아일보 1개월 구독료는 60전, 1924년 신문사 지방부 기자 월급이 40원, 정치부 기자가 50원이었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1923년 1원의 구매력은 오늘날 대략 7~10만 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김대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관동의 진상에 대해서 말조차 못 꺼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김대원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을 찾아가 가족의 사연을 전하고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2009년 일본에서 '관동 제노사이드' 연구자 마에다 아키라를 비롯한 시민운동가들이 목포까지 찾아왔을 때 묘소를 안내하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김대원은 관동대학살 희생자 추도 집회에도 참여하고, 요코아미쵸 공원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에도 찾아가 조상의 넋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013년 3월 용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경찰서 앞마당에서 버젓이 학살 자행
- 유족 2세 조팔만

 

또 조팔만이 있었다. 그는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학살당한 제주도 대정읍 인성리 출신인 조묘송(趙卯松·1891∼1923·당시 32세)의 유족이다. 그의 존재와 가족사는 <연합뉴스> 변지철 기자의 취재로 확인됐다. 조묘송의 죽음은 지진 직후 '이재동포위문반'을 만들어 동포들의 피해를 조사했던 최승만*의 회고록 <극웅필경>에 담겨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일했던 나환산의 목격담을 정리한 것이다.

 

*최승만은 1987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최승만은 1917년 동경관립 외국어학교 노어과에 재학하다 유학생 최팔용과 함께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지진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의 총무로서 이재동포위문반의 일원이 되어 피해조사를 다녔다. 이때의 경험을 <극웅필경>이라는 책자로 남겼다. 해방후 연희대학교수, 제주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나는 조선인 86명을 총과 칼로 사살하거나 참살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봤다. 9월 2일 밤부터 3일 아침까지 가메이도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00여 명이었으며 이날 오후 1시에는 (계엄령에 따라) 기병 1개 중대가 들어와 경찰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다무라(田村)라는 사내가 지휘를 하게 되었는데, 군인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오더니 3명을 불러냈고, 연무장 입구에서 그들을 총살해 버렸다. 이때 지휘자는 총소리가 들리면 인근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터이니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에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는데 그중에는 임신한 부인도 있어서 배를 가르니 태아가 나왔다. 아기가 울자 그 울음소리에 태아까지 찔러 죽이고 말았다. 시체는 다음 날 새벽 2시에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갔는데,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관동대지진-계엄령문서.jpg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한 계엄포고령 계엄령 조치로 군대가 전면에 나서 조선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 민병래

 
태아까지 죽인 끔찍한 만행이 일본 군대에 의해 경찰서 앞마당에서 버젓이 행해진 것이다. 여기서 조묘성이 학살당했고 이 목격담에 나온 임산부는 조묘송의 부인 문무연(文戊連·1885∼1923·38세)이었다. 또 그의 동생 조정소(趙正昭·1900∼1923·23세) 조정화(趙正化·1904∼1923·19세)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4세)도 함께 살해당했다.

 

조묘송과 그의 동생들이 한꺼번에 살해당해 집안의 대가 끊기게 되자 조팔만씨가 양자로 들어가 대를 잇게 된 것이다. 그 사연을 조금 줄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에 남은 조묘송의 여동생들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조팔만씨의 아버지에게 팔만씨를 양자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조팔만씨의 나이는 13세였다. 조팔만씨의 부모는 이를 거절했다. 아들이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다.

 

조묘생의 여동생 4명 중 홀로 살아남은 조술생씨는 1958년 12월 어른이 된 조팔만씨를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팔만씨에게 양자로 들어와 30년 넘게 구천에서 맴돌며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오빠들의 제사를 맡아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팔만씨와 그의 아내 신생씨는 두 번이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이후 아들 역할을 맡아 2008년까지 50년 가까이 제사를 지냈다.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제사와 명절을 챙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간소하게, 때로는 빚을 져서라도 제사를 지냈다.

 

가슴 아픈 가족사다. 조팔만이 양자로서 유족으로서 그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노릇은 제사였으리라. 후손된 도리로서 일본에 가 희생된 현장을 둘러보고 국화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다던 조팔만은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2015년 87세로 숨을 거뒀다.

 

유족 3세가 되는 조팔만의 아들 조영균은 2016년 광화문에서 열린 관동대지진 희생자 공식 추도 행사에서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에 의해 관동 조선인 학살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들이 이 문제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표시한 바 있다.

 

<저자 소개>

민병례(사진).jpg

민병래: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민병래는 1999년에 광고대행사 ‘황소와 나비’를 창업하여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저서 '민병래의 사수만보(현북스 2021간), 송환 끝나지 않은 이야기(2022, 원더박스)가 있다.

 

(편집자 주ㅡ'사수만보'의 글은 원래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다.  저자의 양해 하에  울산함성 독자들에게도 소개하도록  한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일본은 왜? 이 세상 일이라고 여길 수 없을 처참한 장면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 사실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대표와 만남②

2023.09.16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나는 야마모토, 한국인들의 끔찍한 죽음 추적중입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 사실을 알고 추모하는 가나가와현 실행위원회' 대표와 만남①

2023.09.09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20Kg 가방 둘러메고 하루 만보... '100년 침묵' 도전하는 청년

관동 조선인 대학살 추도비 촬영에 나선 청년사진가 천승환 ①

2023.08.19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③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2023.03.18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②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2023.03.15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끔찍한 살인 숨기는 일본, 진정 우리의 파트너인가? ①

관동대학살 피해자의 유족, 그들은 누구인가

2023.03.11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