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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한국노동운동사⑧
등록일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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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대구항쟁시 노동자 파업대오

 

1. 도시에서 농촌으로 폭동 확산

 

미군은 10월 1일 오후 5시부터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워 진압을 시작했다. 대구시의 항쟁은 휴업과 파업이 10월 3일까지 이어지다 10월 8일 대구의 파업 노동자들이 직장에 복귀하면서 완전히 종료되었다. 하지만 항쟁은 영창과 인근 지역으로 번져나갔다.  


“면소로 밀려간 사람들은 거기서 사무소를 때려 부수고 서류를 꺼내 불태워 버렸습니다… 경찰관도 도망가고, 면서기도 도망가고… 원한의 대상인 그 악독했던 면서기, 친일파인 그 사람의 마을로 간 것입니다. 가옥과 재산을 마구 때려 부셔 불태워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저녁에서 밤에 이르기까지 온통 잔치 바람이었습니다… 밀주(密酒)에 벌겋게 된 그들은 완전보복과 승리감에 취해 금방이라도 공출도 없는 아주 잘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구 10.1 폭동사건>, 이목우, 「세대」 1965년 10월호)

 

2.  ‘토지혁명’ 성격을 띤 농촌 항쟁

 

도시에서는 ‘식량배급’이 주요 쟁점이었다고 한다면, 농촌으로 항쟁이 확산되면서 점점 토지혁명의 성격을 띠었다. 평소 지주의 수탈이 극심하고 소작농과의 대립이 첨예했던 지역일수록 농지개혁이 지체된데 대한 불만이 격렬하게 폭발하였다. 지주를 습격하여 그들의 가옥을 불사르고 재산을 약탈했으며, 억압적인 관리와 친일 경찰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가장 사태가 심각했던 곳은 칠곡군과 영천군(현 영천시)이다. 칠곡에서는 군중들이 봉기하여 경찰서를 공격하고 낫과 도끼 등의 농기구를 이용해 경찰 여러 명을 참혹하게 살해했다. 특히 칠곡경찰서장 장석한은 말 그대로 반으로 쪼개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다른 경찰들도 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대구‧경북 일대에서만 전체 인구의 1/4인 77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12월 중순까지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되어 총 230만 명이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과 경찰의 유혈진압이 맞물리며 민간인 1,000여 명과 경찰 200여 명이 사망했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를 꺼리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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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1 항쟁 관련 봉기 발생지역 

 

3. 마치기 전에 - 왜 대구‧경북에서 폭발했을까?

 

대구‧경북은 지금은 보수의 근거지이지만, 일제강점기 때만해도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원래 사회주의 활동이 왕성했던 지역이다. 일제 강점기의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숫자를 보면 경상도와 함경도 출신이 많은데, 특히 경북 출신이 월등히 많았다. 경술국치 이후 충청도와 호남 지역은 일제의 수탈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무장단체들이 많긴 했으나,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그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망명하거나 지하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그나마 탄압이 덜한 영남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영남 지방은 좌우익을 떠나 독립운동가의 비중이 타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경제적으로는 2차 생산직, 그것도 경공업 중심의 산업 기반 도시가 많았다는 점 역시 사회주의가 확산하는 데 한몫했다. 1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호남 지역과는 달리 부산항을 기점으로 많은 경공업 공단들이 있었던 영남에서,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사상이 유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 왜 항쟁 도시 대구는 TK의 본거지가 되었을까?

 

10월 항쟁의 발발지이자 한동안 진보적 도시의 본거지인 대구가 지금은 보수세력의 근거지로 180도 전환한 것은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대구항쟁 이후 우익의 보복, 보도연맹 사건을 통한 1차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


둘째, 이승만 정권이 위협을 받자 진보당 조봉암을 사형시킨 사건, 그리고 박정희 군사쿠테타 이후 인혁당 등 2차 숙청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조봉암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지역이 바로 대구였으며, 인혁당 사건 사형수 8명은 모두 영남에서 출생했다.


셋째, 박정희 정권과 역대 군사정권이 정권 유지책으로 의도적인 지역감정을 유발시키고, 유정회 의원 25%를 이 지역에 배려하는 등 채찍과 당근 정책을 사용한 것이 주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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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일대에 건립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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