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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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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벽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정치 테러를 당했습니다. 날카롭게 벼린 등산용 칼을 든 범인이 점프까지 하면서 이 대표의 목을 겨냥해 찌르는 끔찍한 동영상을 보고,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이 대표의 목숨을 끊어 놓겠다는 살의가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살해에 실패한 범인은 현장에서 붙잡혔고 이 대표는 천운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천만다행인 사건이라고 쿨하게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룬 한국 언론의 태도를 보면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최악의 보도 행태였습니다.

 

ㅡ 언론의 역할이 수사기관보다 더 중요한 중대 사건

 

이런 중대한 사건이 터지면, 언론사 안에도 당연히 비상이 걸립니다. 수사기관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총력 수사에 나서듯이 언론사는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전방위 취재에 나서는 게 보통입니다. 적어도 제가 언론사에 근무할 때는 그랬습니다. 검경의 수사와 범인의 주변을 취재하는 사회부 기자 몇 명, 정당과 정치인 등 정치권을 취재하는 정치부 기자 몇 명을 주축으로 팀을 꾸렸을 겁니다.

 

꼭 특별취재팀을 구성하지 않더라도 이번 사건은 정치부와 사회부, 그 외의 다른 관련 부서가 협동·협력하면서 다뤄야 할 중대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해외 언론이 사건 직후 주요 뉴스로 긴급 타전했다는 사실을 굳이 끌어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테러 대상이 된 이 대표가 지난 대선에서 박빙의 차이로 패한 제1야당의 지도자이자 현 정권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사건이 얼마나 중대한지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이 대표의 안위, 그리고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배경, 공범이나 배후 세력 존재 여부를 궁금해했을 터입니다. 바로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게 수사기관의 수사와 언론 보도의 몫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정권의 입김을 받는 경찰은 아는 사실도 감추고 어떤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론의 역할이 경찰 등 수사기관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다는 건 너무 자명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주요 언론들의 보도는 어땠습니까? 기자들이 현장을 누비며 관련자를 만나고 자료를 수집·분석하면서 시민의 의문에 답하기보다는 경찰이 가공하거나 선별한 정보를 그대로 전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ㅡ 범인 이름, 당적, 변명문 비공개해도 주체적 취재 안 해

 

이재명 테러.jpg

 

아주 단적인 예가 범인의 이름 등 신원 공개와 관련한 보도입니다. 이미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가 1월 3일 “용의자는 66살의 김진성이라는 공인중개사”라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들은 그의 취재를 통해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줄곧 ‘김 아무개’, ‘김모’라고 써댔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 나온 주요 언론의 기사를 검색해 봐도 범인의 이름을 쓴 언론사는 한 곳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경찰의 비공개 방침이 나오기 전부터 그런 방침을 추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부터 한국의 언론사들이 정치 테러범의 신상 공개도 주체적으로 판단·결정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는지 서글플 따름입니다. 일부 언론사는 뉴욕타임스가 김 씨의 이름을 공개했다는 기사를 전하면서 이 신문이 밝힌 ‘김진성’이라는 이름 대신 ‘김○○’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나마 그런 사실이라도 알려줬으니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식 보도 태도를 질타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예전엔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정부 부처에서 곤란한 일이 있거나 미리 보도가 나가면 불편한 사안이 있을 때 부처가 발표할 때까지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엠바고를 걸고, 기자들은 부처의 체면을 생각해 대체로 엠바고를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엠바고 내용을 다른 경로로 입수한 일본 등의 외신이 먼저 보도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해당 부처 출입기자들도 ‘외신에 따르면’이라는 전제를 붙여 엠바고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엠바고를 깨지 않는 외양을 취하면서 사실상 엠바고를 깨는 거죠. 이번 뉴욕타임스 전언 기사는 이런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의 방침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한국 언론의 습관이 이 정도까지 고질로 굳어졌나 하는 자괴감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이러니 이번 사건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용의자의 ‘남기는 말’(이른바 변명문)을 경찰이 비공개해도 언론들이 제대로 추궁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남기는 말’은 범인이 방조범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지인에게 범행 이후 공개해달라며 전해 준 것이고, 그 안에 범행 동기가 가장 잘 나와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정치 테러의 경우 범인의 당적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데도 경찰은 비공개 방침을 고수했고, 언론은 충실하게 그에 따랐습니다. 언론이 무슨 경찰의 하부기관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언론들이 경찰의 비공개 방침에 비판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경찰의 비공개 결정을 비판하는 척하는 데 그치지 말고, 치열한 취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을 스스로 밝혀내야 합니다. 범인의 ‘남기는 말’, 당적, 신상은 범행의 전모를 파악하는 주요 단서이자 많은 사람이 알고 싶어 하는 사안들입니다. 경찰이 비공개한다고 언론마저 비공개하는 것은 언론이기를 포기하는 짓입니다. 경찰이 감출수록 오히려 언론은 더욱 열심히 파헤쳐야 합니다. 그게 바로 많은 사람이 언론에 기대하는 역할입니다.

 

ㅡ ‘환자의 안위’보다 ‘헬기 이송’ 문제 삼는 최악의 반인륜 보도

 

이번 사건 관련 보도 중에서 최악의 보도는 부산대병원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 대표를 이송한 것, 운송수단으로 헬기를 이용한 것을 문제 삼는 기사들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걸린 사람을 두고 병원 이송 과정을 문제 삼는 말을 하거나 비판 성명을 내는 의사와 의사 단체도 징하지만 그런 얘기를 객관 보도를 가장해 키우는, 그래서 사안의 본질을 가리고 왜곡하고 눈을 돌리게 하는 보도야말로 인간성 상실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우물가에 걸어가는 아이를 보고 차마 그대로 있지 못하는 마음, 불인지심과 측은지심을 인륜의 첫째로 꼽았고, 모든 의사가 떠받드는 히포크라테스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설파했습니다. 의사들과 언론이 이런 점을 알고도 헬기 이송을 특혜, 지방 무시 운운하며 문제 삼았다면 정말 사악한 것이고, 알지 못했다면 다시 기본부터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중한디’를 잊으면 의사도 언론도 ‘살인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이 대표 테러 사건 보도 이전부터도 한국 언론은 최악의 불신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핵심을 외면하고 우선순위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정파적·선별적인 기사로 가득한 이 대표 테러 사건 보도가 더해지면서 불신의 무게가 한층 커졌습니다. 기존의 주요 신문·방송 보도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대안 매체를 찾아 떠나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습니다. 이렇게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게 태어난다면 그것도 의미가 전혀 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한때 기존 매체에서 밥을 먹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 본 기사는 저자의 양해 하에 본 매체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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