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내희(전 중앙대학교 교수)
등록일 :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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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 전쟁 직후인 2022년 3월18일 모스크바 시내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림반도 병합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별군사작전’을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침공을 개시한 지 이제 만 2년이 넘었다. 러시아가 자국의 침공을 ‘작전’으로 명명한 목적은 이번 군사적 개입이 ‘전면전’이 아니라 ‘제한전’임을 주장하려는 데 있다. 러시아 군은 지난 2년간의 군사 행동을 작전이라는 명칭에 맞게 수행해온 셈이다.

 

드론과 미사일을 사용해 우크라이나 전역에 엄청난 폭격을 퍼붓기는 했어도 그로 인한 민간인의 사상자 수가 아주 낮다는 사실도 그런 점을 뒷받침한다. 러시아의 작전 수행 방식은 작년 10월 초 하마스의 침공에 대해 보복한다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을 무차별 폭격해 엄청난 민간인 사상자를 내며 전쟁범죄를 자행한 것과는 크게 대조되고 있다.  

 

그러나 ‘작전’이라는 이름과는 별도로 러시아가 우크를 상대로 벌여온 군사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대륙에서 치러진 최대 규모의 전쟁에 해당한다. ‘작전’ 개시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집단서방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 러시아와 사실상의 전면전을 벌인 때문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말할 것 없고 헝가리와 세르비아를 뺀 거의 모든 유럽 국가, 그리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나토를 중심으로 뭉쳐 자국을 상대로 싸우려 드니 ‘용맹한 곰’도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로 집단서방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유엔에서 침공 규탄 결의안이 채택되는 등 국제여론도 처음에는 불리하게 돌아가, 러시아는 잠깐 외교적 위기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한동안 루블화가 급락한 것도 러시아를 크게 긴장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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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푸틴 "목표 달성 전까지 전쟁 멈추지 않을 것"    출처 : YTN 화면 캡쳐. 2023.12.14

 

그러나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상황은 반전되었고, 전쟁 개시 2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전장에서 확실한 승세를 잡은 것은 물론이고 외교전에서도 집단서방의 우위에 섰으며, 국내의 정치경제도 확연하게 안정된 모습이다.

 

우크라이나 측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을 때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5,000만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세대가 대거 사라졌다는 지적도 있다.

 

며칠 전 러시아 국방부 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밝힌 바로는 지난 2년간 우크 측이 낸 사상자 수가 44만4천 명이라 한다. 엄청난 숫자이나, 문제는 그것도 과소 산정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귀화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러시아의 군사 문제 전문가인 안드레이 마르티아노프(Andrei Martyanov)가 3월 1일에 브라질 팟캐스터 니마가 진행하는 <Dialogue Works>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러시아의 ‘공식’ 발표가 44만이라면 실제 숫자는 150만까지 될 수도 있단다. 러시아가 발표한 사상자 수는 최소화한 숫자라는 것이다. 

 

어디 인명 피해뿐이겠는가. 바흐무트, 마린카, 아브디브카 등 그동안 러시아에 함락된 우크라이나 측 도시들은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한 상태다. 파괴는 전선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에너지망이나 다른 기반 시설도 대거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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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럽, 전쟁 피로도 극심..우크라이나 패배 위기 .   출처 : YTN 화면캡쳐. 2023.12.16 

 

전쟁 초기 EU 집행위원장 폰데어라이엔은 러시아는 첨단 무기를 만들 기술과 자원이 부족하다며 세탁기 속 컴퓨터 칩도 빼내 써야 할 정도라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최첨단 미사일 등으로 끝없이 우크라이나의 주요 표적을 계속 공격한 것은 러시아 군이고, 병력과 무기, 포탄 등이 바닥나 쩔쩔맨 것은 우크라이나 군이다. 우크라이나를 내세워 러시아를 치려 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력도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능력과 자원이 고갈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름 세계정세에 관심을 기울여오기는 했으나 지정학적 정치경제의 문제를 최근만큼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러-우 전쟁에 관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국에서 벌어지고 있지마는 중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데에 있다. 

 

이번 전쟁은 지난 500년 즉 반 천년에 걸쳐 작동해온 서구 중심의 세계체계가 결정적인 균열 또는 변곡점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징후가 아닐까 싶다. 지금 러시아를 상대하는 것은 우크라이나만도 아닌 것은 물론이고 미국만도 아니며, EU를 포함한 나토국가들만도 아니다. 한국도 그 일원인 집단서방 전체가 러시아와 싸우는 중이다. 

 

그런데도 ‘곰탱이’ 러시아는 움쩍도 하지 않고 그 막강한 세력을 잘 막아내고 있을뿐더러, 집단서방의 정치경제가 대부분 어려워진 것과는 달리 국력이 오히려 신장하는 모습이다. 집단서방은 지금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지표상으로는 ‘호황’이라 하나 인구의 최상층부만 그 효과를 누릴 뿐 하위층 인구는 사실 불경기에 빠진 상태다. 유럽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주요 국가들이 모두 불황의 위기를 겪고 있고, 특히 독일의 경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에 러시아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경제가 성장하여 이제는 경제 규모가 세계 5위, 유럽에서는 독일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최근 푸틴은 러시아가 조만간 일본도 추월하여 세계 4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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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온라인 매체 THE PRINT는 IMF 통계를 토대로 2020년에 G7과 BRICS의 GDP 총합이 역전되었다고 보도했다.(2022.4.4)
출처 : 현장언론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

 

러-우 전쟁에서 집단서방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의 패배가 사실상 결정되고 러시아의 승리가 확정적으로 된 것은 지난 반 천년 유지된 서구 중심적 세계체계가 새로운 질서로 바뀌고 있다는 증좌다. 그런 점을 말해주는 것 하나가 집단서방의 선두 7개국의 조직인 G7의 GDP가 비서방 국가들의 조직인 브릭스(BRICs) 5개국보다 작아졌다는 사실이다. 브릭스는 1992년에 구매력평가지수 기준 세계 GDP의 16.45%에 불과했고, G7은 45.80%였으나, 2022년에 이르러서는 두 세력의 지분이 역전되어 브릭스는 31.67%, G7은 30.31%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도 이런 흐름과 궤를 함께함을 보여준다. 미국과 집단서방 전체가 전력을 다해 지원해온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압도하고 있는 것은 서방과 비서방의 역관계가 이제는 역전되었음을 말일 것이다. 세력들 간 우세의 방향을 그들 간 전쟁의 승패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는 서세동점의 종식을 확실히 말해주는 데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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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미국,영국,독일,프랑스, 아탈리아,캐나다,일본)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도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오른쪽 다섯번째)

 

이번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집단서방의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 전체가 덤벼들었는데도 러시아 한 나라를 군사적으로 감당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 EU, 나토, G7 등 집단서방이 각종 자원과 수단을 동원했으나 결국 러시아를 당해내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근래에 신자유주의적 축적에 매진해 지나친 탈산업화를 추진한 결과로 여겨진다.

 

반면에 러시아는 군수산업을 포함한 자국의 산업적 생산능력을 증진해 세계 최대 군사 강국이라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증명했다. 미국과 집단서방의 이번 패배는 이제는 그들이 세계질서를 과거처럼 일방통행식으로 좌우할 수 없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의 하나는 집단서방의 쇠락을 증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지난 500년 세계체계를 좌우해온 서세동점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가 열리는 듯하다. 이 시대를 가리켜 ‘다극 질서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극 질서는 어떤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줄 것인가? 혹자는 또 다른 헤게모니 질서가 형성되리라 예측한다. 

 

러시아 아니면 중국이 지금의 미국과 같은 지위에 오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극 시대가 진정한 다극 시대가 되려면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자신의 동맹국을 모두 예외 없이 속국으로 만들어 휘하에 두고 세계를 지배해왔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나라들, 일본과 한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 집단서방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미국의 속국 아닌 나라는 없다. 다극 시대에도 비슷한 사태가 전개된다면 세계질서의 진정한 변화는 오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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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스 플러스, 다극화된 새로운 국제질서의 출현. BRICS 기존 회원국과  2023년8월 신규 가입 국가
출처 : Diverse Asia 서울대학교 2023년  겨울호 

 

진정한 다극 시대에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출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 같아서는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노르웨이의 국제정치학자 글렌 디센이 한 말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한 유튜브 프로그램(“The Ukraine War & the Eurasian World Order - Alexander Mercouris & Glenn Diesen,” The Duran, 2024.3.4.)에서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러시아가 유럽 일부가 되려는 생각을 확실히 접고 유라시아 질서의 일원이 되려는 것이 확실해졌다고 보고, 러시아의 그런 행보를 다극 질서 형성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는 다극질서를 추구하면서 중국이나 인도, 이란, 브라질 등 브릭스 국가들만이 아니라 유럽, 미국과도 공존을 추구하려 한다. 러시아가 정말 그런 태도라면 다극 질서 이념에는 지지할 부분이 분명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적어도 미국이 주관해온 일극 질서보다는 나아 보인다. 

 

일극 질서에서 결정권이나 거부권을 행사할 권력을 행사한 것은 미국뿐이다. 다극 질서가 진정한 다극 질서라면 서로 다른 국가들이 동등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힘의 각축장인 국제관계에서 그런 상황이 쉽게 실현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미국 한 나라의 헤게모니가 사라져도 사태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동안 인류가 평화보다는 전쟁, 공존보다는 독존, 협력보다는 강압에 시달려 온 데에는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위협을 통해 세계질서를 유린해 온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런 나라의 힘이 제압되면 세상은 그만큼 나아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가 결정되면 그렇게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미국 내 매파, 특히 군산복합체가 건재함을 생각하면 이런 기대가 난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전쟁이 21세기 인류의 미래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님을 생각할 때, 러시아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은 그래도 희망적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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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1951년 생
전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마케트대학교대학원 영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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