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 정치세력화논쟁] 의회주의 노선은 어떻게 현장 활동을 방해했나?
안길성 (노동운동가)
등록일 : 2023.09.08

선거.png


지난 민주노동당 시절, 선거는 의회진출과 공직자 자리를 넘보는 출세주의자들의 경쟁의 장이 되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울산과 같은 노동자 밀집지역, 노동운동 활성화 지역일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이들의 ‘대중투쟁’ 요구를 방기한 노골적인 개인적 혹은 정파적 이기주의는 대중을 실망케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진보진영의 의회활동 내지는 ‘정치세력화’ 자체까지도 의심과 혐오적 감정으로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노선은 이 같은 출세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토양이 되었다. 


이하에서 소개하는 울산지역 사례는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기층 조직에 이미 출세주의적 경향이 팽배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애초 건강치 못한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었으며, 이후 민주노동당의 의회주의적 경향의 고착화에 따라 이러한 출세주의가 극복되기는커녕 더욱 활개 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의존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 이하 소개하는 사례는 다음 두 개 문건을 주로 참조하였다. ⓵김남수, 2000년,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울산 북구 선거” ⓶김남수, 2016.7, “울산지역 선거를 통해서 보는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사례ㅡ 현대자동차노조와 울산 북구 사례를 중심으로”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16대 국회의원 선거만큼 진보세력의 큰 주목을 받은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울산 북구의 경우 민주노동당 후보가 4.13 선거 전 과정에서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KBS, MBC 등 중앙방송에 그 결과가 방송되는 등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 역시 16대 선거에서 그동안 숙원이던 국회 진출을 이루어내고,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작은 불씨를 가꾸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이번만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희망은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인 최용규(세종공업)씨가 563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원래 울산 북구에는 2만 명이 넘는 조합원을 가진 현대자동차가 있었기에 노동자 후보라면 누가 나와도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어긋났으며, 울산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으니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16대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민주노동당은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한 채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정치세력화의 진척은 또다시 몇 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고 기대를 모았던 울산 북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선거 패배의 주원인은 후보 선출과정에서 발생한 내분 때문이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후보는 규약에 따라 민주노동당 당원들에 의해 선출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울산 북구 후보의 경우 현대자동차의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일부 세력의 요구에 따라 이번에는 현대자동차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에 추천하는 형식으로 후보를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

 

* 이러한 일부 세력의 요구가 제출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울산지역의  진보진영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2000년 1월 21일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북구 지회 총회에서 지회장, 중앙 파견 대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당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울산연합' 세력들이 지회장을 비롯하여 싹쓸이를 했다. 광역시 의회 의원이었던 이상범(현대차노조 2대 위원장 역임)씨 조차 중앙파견 대의원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만이 참가하는 내부의 선거로는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상범씨 측은 현자노조 내부에서 국회의원 후보를 뽑을 것을 주장하게 된다. 당시 울산연합 세력은 송철호 변호사를 민주노동당 북구 후보 경선에 출마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래 인용문은 이와 관련한 현대자동차 정파신문 중 하나인 <현자노동자신문>에 실린 글이다. 

 

현자노조에서 ‘노동자 후보’ 추대해야 …(중략)… 지금 후보 조정이 어려운 북구의 경우 ‘최대 주주’라 할 현자노조에서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따라 노동자후보를 추대하는 것으로 정리하면 된다. … 북구의 최대 주주라 할 현자노조가 나서 노동조합 차원의 어떤 결의를 이끌어 낸다면 민주노동당에서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현자노동자신문>. “16대 총선과 현자노조의 역할”, 2000년 1월 26일) 

 

이런 주장이 힘을 얻어 현대차 노조는 2월 11일 대의원대회에서 후보를 뽑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차 노조가 3월 말~4월 초 투쟁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북구 후보선출의 진흙탕 싸움의 한 복판으로 빨려 들어가는 계기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약속한 2월 11일 대의원대회 날 ‘민투위’ 강성신, ‘우리모임’ 이상범, ‘실노회’ 박상철 3명의 후보가 나와 경선을 치렀다. 그러나 진보진영에 있어 민주노동당 권위의 유일성을 인정치 않는 민투위의 강성신 후보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아니라 ‘노동자 후보’로 출마할 것을 요구하였다. 민투위는 당시 좌파('노동자의 힘')의 노선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독자정당 혹은 사회주의독자정당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후보 경선에 앞서 때아닌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강성신 후보가 제기한 문제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소수의 당원이 현자노조 전체 조합원을 대변할 수 없으며, 2만 2000명 울산공장 조합원 중 민주노동당 당원은 300여 명밖에 안 되는 노동조합에서 ‘남’의 당 예비후보를 선출하는 것은 문제이다. 둘째,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외에 다른 노동자 정치조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선이며, 현대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에서 선출된 후보가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니면 민주노총 후보가 될 수 없는 점은 문제다. 셋째,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권고사항’이 ‘정치방침’으로 바뀐 점과 민주노동당 결성 절차와 노선에 대한 지적이다.


이날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리하여 ‘노동자후보론’과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론’ 간에 5시간에 걸친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는데, 표결 결과 “현자노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하는 것이 결정됨으로써 강성신 후보는 자진 사퇴했다. 이리하여 '우리모임'의 지지를 받는 이상범(2대 노조위원장)과 '울산연합'(자주계열)의 지지를 받는 박상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울산연합과 우리모임 두 세력의 격돌로 치러진 경선 결과는 당시 부품사업부 매각반대투쟁에 미온적이었던 정갑득 집행부에 대한 반발 (정갑득 위원장은  ‘실노회’ 소속이었는데, 그것은 울산연합의 현장조직으로 인식되었다), ‘울산연합’에 대한 견제 심리 등이 깔리면서 예상을 뒤엎고 이상범씨가 현대자동차노조 추천 후보로 선출되었다. 


양 세력은 이 과정에서 대의원들의 표를 얻기 위한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다. 표결 결과 1차 투표에서 240명 참가 중 박상철씨가 120표, 이상범씨가 114표를 얻어 박상철씨가 과반수에서 1표가 모자라 2차 투표에 들어갔다.  하지만 2차 투표결과는 정반대였다.  232명이 참가하여 이상범 121표, 박상철 110표로 치열한 접전 끝에 이상범씨가 ‘현자노조 추천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로 선출되었다.


 현대자동차 내부의 경선에서 패배한 울산연합 쪽은 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민주노동당의 원래 규약을 적용한 후보선출을 들고 나왔다. 3월 9일 민주노동당 울산지부 당원들에 의한 선거를 통해 현자노조 추천후보인 이상범씨를 탈락시키고, 울산연합이 지지하는 세종공업의 최용규씨를 정식 후보로 선출하였다.(총 981명 투표 중 최용규 513표, 이상범 466표) 


이렇듯 경선과정에서 분열되고 서로 간의 앙금이 쌓인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민주노동당 울산지부 내부의 경선이라면 현자 조합원들의 대중적 불만을 사지 않았을 것이지만, 분파 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현자노조 대의원대회를 활용하려던 전술은 결과적으로 활동가들과 조합원의 선거 참여 의지를 꺾어버렸다. 선거과정에서 경선에서 패배한 이상범씨 계열은 노조 집행부 사퇴(당시 자주계열 정갑득 위원장과 공동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었음)라는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민주노동당 후보에 타격을 가했다. 울산연합을 제외한 나머지 활동가들 역시도 울산연합의 패권적인 사업방식에 반발하며 선거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결과 최용규 후보는 563표(1.25%)라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것은 같은 노동자 후보끼리 분열을 보인 것에 대한 대중들의 냉소적 반응, 이왕이면 현자노조 후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뒤섞인 결과였다.  선거가 끝난 후 패배 원인을 놓고도 가장 치열하게 대립했던 두 세력(울산연합, 우리모임)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경선에서 패배한 이상범씨 측의 방해로 패배했다"(울산연합, 최용규씨측),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선택하지 못한 경선과정의 문제로 패배했다"(우리모임, 이상범씨측)는 것이 각각의 입장이다. 


  표1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 울산 북구 득표현황
   

그림1.png

 

현대차 노조는 노조대로 울산연합이 미는 최용규 후보가 북구 국회의원 후보로 선출되자 갈등에 휩싸였다. 마침 당시 현자노조 8대 정갑득 집행부는 실노회(자주계열)와 현노신(우리모임)의 연합집행부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현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두 조직이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인 꼴이 되었다.   그들은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에게 무차별적이고 원색적으로 상대 진영을 비방하는 선전물을 배포하였다. 

 

결국 3월말, 4월초 현장 투쟁을 앞두고 선거과정의 갈등으로 실노회의 정갑득 위원장과 공동집행부를 구성했던 현노신 측의 주용관 수석부위원장, 김강희 사무국장을 비롯한 18명이 집단 사퇴하면서 집행부를 떠났다.


3월 20일 사퇴한 현노신 계열 18명은 곧바로 휴가를 얻어 '대우차 해외매각 저지' 완성 4사 공대위 투쟁이 한창이던 4월 3일∼4월 12일까지 부분파업, 총파업 투쟁 기간 중 회사에 출근조차 하지 않은 채 휴가를 보냈다. 집행부에서 사퇴하면 통상 2주 정도 휴가를 보내던 관례에도 불구하고, 사측의 협조를 얻어 한 달 반이나 휴가를 보내고 5월1일 이후에나 현장에 복귀하였다. 이러한 끝 간 곳 없이 진행되는 양 진영의 대결 양상은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세력의 국회의원 출마와 당선에만 안중에 있는 출세주의와 분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아래는 이러한 분열과 자리다툼을 지켜본 조합원의 심정을 옮겨 놓은 현장 대자보이다.

 
노동조합은 특정 정파나 몇몇 활동가들의 조직이 아니라 4만 조합원의 조직이다. 
하지만 투쟁 시기에 갈갈이 찢겨져 서로에 대해 비난만을 일삼는 무책임한 활동가들의 행태를 보면서 조합원들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중략) 조합원이 바라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특정 사람이나 세력을 국회의원으로 출세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까? 

 

이 난장판에서 이기고 나면 그럴듯한 포장을 하여 조합원을 상대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다시 한 표를 찍어달라고 할 것입니까? 
노동조합에 대한 어떠한 위기의식도 없이, 당면 투쟁의 조직화에 대한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벌어지고 있는 진흙탕 싸움은 조합원들로 하여금 노동조합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현대자동차 승용2공장 대의원 기명 대자보에서 인용)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의지와 염원을 송두리 채 짓밟아 버린 자들은 누구인가? 그 책임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과 이해관계를 노동자를 볼모로 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채 노동자를 이용하려 했던 일부 조직과 개인들에게 있다. 그들은 국회의원 출마와 당선을 양 세력 간의 양보할 수 없는 세력다툼으로 몰아갔다. 결국 이러한 진흙탕 싸움으로 인해 노동자 후보를 국회에 진출시켜 노동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소박한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 선진노동자와 조합원들이 ‘제2의 정치세력화’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최소한 그 원인이 분명히 정리되지 않은 채 제2의 정치세력화를 결코 운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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