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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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의 홍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의 체결은  러시아 국내에 안정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제국주의자들은 곧 소련에 무장간섭을 시작했다. 3월 중순부터 영국, 프랑스, 미국 등 협약국 군대가 무르만스크에 침입했다.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5월에는 터키군이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지역에 침입했다. 독일군도 크림반도를 침공하고 핀란드와 노보로시스크에 상륙했다. 러시아 경내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또 동부 전선에서 소비에트 군대를 공격했다. 

 

국내에서는 반혁명세력들이 이 기회를 틈타 백위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남러시아 지역에는 크라스노프와 데니킨의 백위군이 있었고, 중부와 동부에는 콜차크 부대가 있었으며, 북부에는 유데니히의 백위군이 있었다. 1918년 여름까지 소비에트공화국은 전국의 4분의 3 영토가 적들의 수중에 떨어져 소비에트 국가는 사방이 포위되었다.

 

전국은 공포에 떨었으며, 젊은 소비에트 공화국은 위험에 처했다. 레닌은 "모든 것은 최전선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제시했다. 전국을 통일된 군영으로 선포하고, 15개 방면군을 조직해 전쟁에 대처했다.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전시 궤도에 진입시켜 ‘전시 공산주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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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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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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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데니히

 

이와 관련된 주요 정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잉여곡물 징집제를 실시하였는데, 무장 식량 징수대를 조직하여 농민 수중의 ‘잉여곡물’을 강제로 징수하였다(시행 과정에서 심지어는 농민의 식량까지 징수했다). 중앙집권적인 공업관리체계를 구축하고 모든 대·중·소형 기업을 국유화 하였다. 각 산업부문에 위로부터 아래로 총관리국을 설립하였으며 기업에 대한 중앙집중식 수직적 지도를 실시하였다. 기업에서는 1인 수장제 원칙을 실행했다. 

 

시장과 개인 유통을 점차 제한하여 종국에는 완전히 취소시켰으며, 경제관계에 있어 물물교환을 시험적으로 도입하였다. 국가 각 부문에서 무화폐 결제를 실시하고, 부기 상의 결산으로 최종적으로는 화폐를 취소할 계획을 추진했다. 보편적 노동 의무제와 노동 군사화를 도입했다.

 

내전 및 외국의 무장간섭 기간에 트로츠키는 군사인민위원이자 최고군사위원회(1918년 9월 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로 개칭) 위원장으로서 걸출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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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사람들이 농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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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수된 제품을 하역하고 있다., 모스크바 보즈네셴스키 광장 (지금의 혁명광장) (1919년)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체결 이후 외교인민위원에서 공식 면직된 뒤에 이 자리를 맡았다. 그의 해임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의 그에 대한 문책이라기보다는, 당과 레닌의 그에 대한 중시와 신뢰를 보여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정규군인 홍군 편성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통일된 지휘 관리 체계가 있어야 하며, 엄격한 군대 규율과 함께 제정 러시아 시기의 노련한 군사 전문가를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전쟁 중에 트로츠키는 제정 러시아 정부의 교통 장관으로부터 노획한 전용 열차를 타고 전선을 순시했다. 이 전용 열차는 두 대의 기관차가 견인하였다. 열차에는 라디오 방송국, 전신국, 인쇄기, 발전기, 도서실,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차고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차에서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현지의 군사 및 정치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전보 문건을 검토하고 명령과 글을 구술하였다." 필요한 곳이 있으면 이 전용열차는 어디든 향하였는데, 이는 그로 하여금 당과 군 내부에서 높은 명성을 얻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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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의 사열을 받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트로츠키(왼쪽부터 셋째).

 

스탈린은 내전과 외국 무장간섭 기간에 대단히 바빴다. 1918년 5월 29일과 30일, 스탈린과 슐랴프니코프는 특별 권한을 가진 남부 러시아 식량 사업의 공동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스탈린은 북 코카서스(볼가강의 차리친)로 향했으며, 슐랴프니코프는 쿠반으로 갔다. 남쪽은 러시아의 곡창지대이지만, 이때 이곳은 코사크인들의 엄밀한 포위속에 있었고, 만약 이 지역이 함락되면 그것은 곧 기아의 도래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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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차리친에서 스탈린

 

6월 4일, 스탈린은 그의 아내 나제슈다 알리루예바(그들은 이 해 상반기에 결혼했다)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차리친을 향해 출발했다. 차리친은 당시 소비에트 북 코카서스 군구 사령부가 있었는데, 스네사레프(Snesarev) 전 제정러시아 대장이 사령관직을 맡았다. 떠나기 전에 레닌은 육군 인민위원회에 400명(그 중 반드시 100명의 라트비아 보병을 포함할 것)의 부대를 차출하여 스탈린을 호송토록 지시했다. 6월 6일 스탈린은 차리친에 도착했다. 이튿날, 그는 레닌에게 전보를 쳐 그곳은 "혼란스럽고 투기가 성행한다"고 하면서, 이미 일부 조치를 취하였으며, 일주일이 지난 후 모스크바에 100만 푸트의 양곡을 운송할 것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이곳에서 식량 수집을 위한 긴박한 작업을 벌였는데, 7월 12-16일 모스크바에 5대 열차 분량의 식량을 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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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슈다 알리루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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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의 기갑 기차, 홍군 전사가 차리진으로 통하는 요새를 보위하고 있다 (1918년 9월 15일)

 

스탈린은 차리친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추가적인 권한을 요청했다. 7월 7일 새벽 1시, 레닌은 스탈린에게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모스크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전보를 쳤다. 그들은 7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 대사 밀바흐를 암살하고 제르닌스키 등을 체포했다.  이 때문에 "각지는 이미 반혁명분자들의 도구가 된 이들 비열하고 미친 모험가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한다.……당신은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을  진압하고, 상황을 자주 보고하라"고 레닌은 썼다. 또 그에게 바쿠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샤오우미엔과 밀접한 연락을 유지하라고 했다.  새벽 1시 35분, 스탈린은 차리친에서 레닌에게 답전을 보내 그곳의 군사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군사 분야에 있어 특별 권한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급히 전선으로 가야 하기에 중요한 일만 기록합니다.
(1) 차리친 이남의 노선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읍니다. 나는 꾸짖어야 할 모든 사람들을 독촉하고 꾸짖고 있읍니다. 곧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안심하기 바람니다.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누구를 막론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식량은 곧 운반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군사 ‘전문가들’(그들은 밥통들이다!)이 빈둥거리지 않았더라면 선로가 차단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선로가 회복된다면, 그것은 군사 전문가들을 잘 대우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2) 차리친 이남에는 운송할 곡물이 많이 적재되어 있습니다. 철도가 개통되면 우리는 직통열차로 식량을 당신에게 보낼 것입니다.
(3) 당신의 통지는 이미 받았습니다. 발생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예방키 위해 모든 준비를 다 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요, 우리 손은 결코 떨고 있지 않습니다…


(4) 이미 서신을 지닌 사자를 바쿠에 파견하였습니다.
(5) 투르키스탄의 상황이 좋지 않으며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남부 러시아 지역에서 조기에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군사적 성격의) 특권을 누군가(또는 나)에게 부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스탈린전집> 4권 106-107쪽, 인민출판사

 

당시 레닌은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을 분쇄하는 반란 및 기타 사무를 지도하느라 바빴기에 스탈린의 요청에 제때에 대답하지 못했다. 7월 10일 스탈린은 다시 다급하게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트로츠키가 차리친사령부와 상의하지 않고 직접 그 산하 단위 지도자를 임명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다.

 

(1) 트로츠키가 트리포노프 (돈강 유역), 아프토노모프 (쿠반 지역), 코페 (스타브로폴)에게 아무런 고려 없이 위임장을 마구 발부한다면......한 달 후 북코카서스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며, 이 변방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트로츠키의 지금 행동은 안토노프의 어느 시기 행동과 같습니다. 현지인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마음대로 위임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에트 정권에 망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확실히 기억시켜 주십시오.


(2) 만약 우리에게 비행기와 조종사, 장갑차, 6인치 구경포를 주지 않는다면 차리친 전선은 지킬 수 없으며, 철도도 장기적으로 상실할 것입니다.


(3) 남쪽에 식량은 매우 많이 있지만, 이 식량을 얻으려면 반드시  군용 열차, 각 집단군 사령관 등의 방해를 받지 않는 건전한 기구가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식량 징수자들을 도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식량 문제와 군사 문제는 자연히 얽혀 있습니다. 일의 이익을 고려하면, 나는 반드시 군사 전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점은 내가 과거에도 제기했지만 대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 결정해서 형식적 절차를 밟지 않고 사업에 지장을 주는 집단군사령관과 정치위원들을 해직시킬 것입니다. 일에 도움이 된다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물론 나는 결코 트로츠키의 공문이 없어도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스탈린전집> 4권 108-109쪽, 인민출판사.

 

스탈린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이런 편지를 보고 레닌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7월 19일, 최고군사위원회는 북 코카서스군구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스탈린이 의장을 맡고 보로실로프와 셰이·콘·미넨 등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은 트로츠키의 서명을 거치지 않았는데, "본 전보는 레닌의 동의를 거쳤다"고 명기되어 있다. 그 임무는 "질서를 확립하여 각 지대를 정규군으로 만들고, 정확한 지휘를  실시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축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임명에 앞서 스탈린은 일부 군사지휘관과 옛 군사전문가를 해임 조치를 취했다. 7월 11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보낸 전보에서 자신이 군사적 책임을 맡았으며, 이미 일을 질질 끌거나 직무에 적합치 않은 지휘관과 군사전문가의 직무를 해제했다고 밝혔다. 다음날 그는 트로츠키에게 다른 보고서를 썼고 이 보고서를 레닌에게 복사해 보냈다. 그는 보고서에서 스네사레프를 비판하고 "부진하다"며 경질을 요구했다. 16일에는 레닌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군사 지도자 스네사레프는 태업에 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반혁명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스네살레프가 세운 차리친을 방어하는 도시 방어 계획은 해로운 계획이라고 말했다.

 

1918년 7월 중순, 차리친의 정세가 비교적 안정되었다. 스탈린은 스스로 주장하여 옛 군사전문가로 구성된 북 코카서스군구 사령부 대다수 인원의 직무를 해제한 후, 그들을 체포하여 볼가강의 바지선에 감금했다. 트로츠키는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보에서 "무시하겠다"고 답했다.  최고군사위원회는 아이 오쿠로프를 비롯한 조사단을 차리친으로 보내 이 일을 전문적으로 조사했다. 결국 스네사레프는 풀려나 서부 방어구역에 책임자로 파견됐다. 하지만 체포된 나머지 사람들은 배와 함께 볼가강에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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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게 비상 전권을 부여한 위임장

 

그 후 스탈린은 스네사레프의 도시방어 계획을 포기하고 공격 전략을 채택했다. 8월 1일부터 불확실한 진공이 시작되었는데, 8월 4일 찰리친과 중앙과의 연계가 중단되었다. 부대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마지못해 원래 방어구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8월 4일 레닌에게 보낸 서한에서 패배의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군사위원회는 매우 혼란한 잡상인들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혼란의 원인은 일부는 전 군사지휘관들의 소극적인 태만 때문이며, 다른 일부는 그들이 군구 각 부문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에 의한 파괴 음모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차리친 전선 또한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8~9월  협약국의 지원을 받는 데니킨의 '지원군'은 홍군 주력과 연락이 끊긴 일부 북 코카서스 부대를 공격했다. 독일의 지원을 받는 크라스노프의 코사크 부대는 보로네지와 차리친에 압력을 가했다. 이 두 부대는 장비가 비교적 정교하며 전투력이 강했다. 스탈린은 레닌에게 무기 보급을 요청하는 편지를 여러 차례 썼다.

 

8월 13일, 다시 차리친이 계엄 상태에 처해있다고 선포했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의 지휘 아래 적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스탈린은 8월 31일 레닌에게 "우리 전선의 상황이 좋습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으로 믿습니다(코사크가 완전히 와해되고 있습니다)"며 기분 좋은 편지를 썼다. 그가 편지를 쓴 날은 레닌이 저격받은 다음 날이었다. 8월 30일, 레닌은 사회혁명당 테러 분자인 반 카플란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편지 말미에 "내 사랑, 경애하는 이리치의 손을 꼭 붙잡으며"라는 애틋한 표현을 사용했다. 

 

같은 날엔 보로실로프와 함께 스베르들로프 전(全)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레닌이 다행히 생명을 건진 것을 축하 했다. 그러면서 "북 코카서스 군구 군사위원회는 이 비열한 암살 행위에 답하기 위해, 부르주아와 그 앞잡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공개적이고 일상적이며 대중적인 반테러 작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8월 26일부터 9월 6일까지 소비에트군대는 전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코사크 군대는 돈강 오른쪽으로 쫓겨났다. 9월 6일, 그는 다시 한번 인민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차리친 지역의 소비에트 군대의 공격이 이미 승리했습니다……적은 완전히 격퇴되어 돈강을 건너 후퇴했습니다. 차리친 정세는 견고합니다.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9월 12일, 스탈린은 모스크바로 출발해 레닌에게 남부 전선 상황을 보고했다. 17일, 북 코카서스 군구는 남부전선으로 개편되였다.  제정러시아 시기의 포병장군 P. B. 세르긴이 사령관으로, 보로실로프를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스탈린은 새로 조직된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에 임명됐다. 성원은 미닌(당시 차리친 소비에트 의장), 세르긴, 보로실로프가 포함되었다. 나중에는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인 메호노신이 추가됐다.

 

하지만 차리친 지역의 상황은 스탈린이 생각한 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사크 부대는 다시 차리친을 포위했다. 스탈린은 9월 22일 차리친으로 돌아왔다. 새로 조직된 이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 내부는 처음부터 의견 차이를 보였다. 스탈린, 보로실로프, 미닌은 차리친에 남자고 하였다. 반면 세르긴, 메호노신은 사령부의 위치를 ​​차리친 북쪽의 코즈에 두자고 주장했다. 

 

의견 차이의 본질은 스탈린, 보로실로프, 미닌이 홍군 건설과 관련하여 짜르 군사전문가들을 사용할 데에 관한 당의 노선을 이행하기를 꺼렸다는데 있다. 그들은 사소한 결정이라도 반드시 군사위원회에서 집단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세르긴과 메호노신은 당이 군대를 집단 지휘하는 제도를 부정했으며, 작전 업무는 당연히 사령관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29일, 스탈린은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전선군 사령관의 활동문제에 관해 토론했다. 세르긴은 회의에서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낭독했다. 거기에는 작전 업무는 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스탈린, 보로실로프, 미닌은 앞뒤로 발언하면서 이 규정에 반대하고 집단지도 원칙을 견지했다. 메호노신은 이 문제에 대해 지금 잠시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가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와 상의한 후 다시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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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르들로프 (1918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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