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허영구(전민주노총 부위원장)
등록일 :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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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에 고양시에서 출발해 수도권외곽고속도로,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나들목을 빠져나온다. 식당에 들러 아침밥을 먹어야 하는데 휴게소 간판은 보이나 식당은 캄캄하다. 인제를 지나도 식당이 보이지 않아 제법 큰 면소재지인 북면 원통리에 들어섰는데 역시나 아침을 하는 식당은 없다.

 

2009년 서울-동홍천, 2017년 서울-양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면서 남한 지역을 횡축으로 관통하는 국도 중 제일 북쪽에 이르는 46번 국도(인천-고성)나 44번(양평-양양) 국도 주변의 많은 식당들이 문을 닫거나 폐업한 상태라는 걸 안 것은 설악산을 다녀 온 뒤였다. 그러고 보니 속초 갈 일 있을 때 미시령을 넘던 때가 옛날이 되었다. 다행히 한계령 방향 국도에 들어서기 전 문을 연 식당이 있어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2차선 도로를 달리다 한계령으로 향하는 도로는 1차선이다. 구불구불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운무에 가려진 설악산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초입부터 느낌이 다르다. 한계령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이 따로 없다. 휴게소 주차장은 닫혀 있다. 길가 주차는 불법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어떤 이는 한계령에서 등산을 하려면 오색까지 내려가 주차하고 난 뒤 버스나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약간 난감해지려는 순간 휴게소 식당 주인이 주차할 곳을 안내해 준다. 그 순간 동서울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등산객들이 내리고 있다. 

 

오래전 몇 차례 꼬불꼬불 한계령을 넘을 때 휴게소를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아담하다. 전날 저녁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자정 무렵 잠을 깬 뒤 뒤척이느라 수면시간이 부족했고 손수 운전까지 하다 보니 매우 피로한 상태였다. 목표는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봉까지 8.3km를 왕복하는 것인데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많이 힘들면 한계령삼거리(2.3km)에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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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출발지점이 920m이니 산 높이의 절반 이상이고 주변의 멋있고 확 트인 경치를 보니 힘이 생긴다. 오전 9시 20분, 등산을 시작한다. 설악산(雪嶽山,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 높이, 1,708m)은 1965년 천연기념물 지정, 1970년 5번째 국립공원(지리산, 경주, 계룡산, 한려해상에 이어)으로 지정되었다. ‘큰 산’이라는 의미의 ‘악(嶽)’자이나 일반적으로 ‘험(준)한’산으로 이해한다. 설악산은 그중에서도 ‘더 크고 험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설악산은 여의도 면적의 47배에 달하며 인제군, 고성군, 양양군, 속초시에 걸쳐 있다. 인제 방면은 내설악, 한계령~오색방면은 남설악, 속초시•고성군•양양군 일부 등 동쪽은 외설악이라 부르며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30여 개의 봉우리가 있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코스가 가장 최단거리(편도 5km)이다. 이번에는 좀 더 거리를 늘려 남설악 지역인 한계령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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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과 함께 설악의 단풍을 만난다. 골짜기가 붉게 물들고 있다. 과연 소문난 대로 ‘설악산 단풍’이다. 사진으로 담기에 바쁘다. 한계령삼거리까지 가는 등산로도 만만치 않다.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한다. 힘이 들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풍광에 매료되어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멈출 수 없다. 좌측으로 귀때기청봉의 골짜기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설악산의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다고 으스대다가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삼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는 전설과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바람이 매섭게 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사진을 찍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7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노인 4명이 올라온다. 배낭과 걸음걸이가 가벼워 보인다. 한계령삼거리까지   가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삼거리에서 같이 휴식을 취하며 사진도 찍어주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청봉까지 간다고 한다. 같은 머리띠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산악동호인 모임인 것 같은데 보기 좋았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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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에도 취했지만 거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배낭을 짊어진다. 왼쪽은 귀때기청봉과 대승령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대청봉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등산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험했다. 산을 다니다 보면 어느 산이나 ‘암릉구간’을 만나기도 하지만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서북능선 구간은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흩어놓은 것 같다. 자료를 찾아보니 ‘너덜너절 헤졌다’는 의미의 ‘너덜바위’가 있는 구간이라 한다. 그러니 속도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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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청(1,604m)에 도착해 뒤돌아보니 저 멀리 가리봉(1519m), 주걱봉(1401m), 바로 건너편에 귀때기청봉(1,578m)이 보인다. 설악산은 1982년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산양 등) 보전지역으로 지정·관리되었다. 그런데 지난 41년 동안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여왔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환경부 허가로 강원도와 양양군이 2026년까지 완공할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두 번째 설악산 케이블카는 오색에서 끝청(1,430m) 사이에 설치될 예정이다. 그 동안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조그마한 마음이라도 보태려고 “설악산 케이블카, NO!” 피켓을 준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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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등산로다. 발걸음이 무겁고 힘에 부친다. 그러나 설악의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이 에너지를 충전시켜 준다. 아예 불타는 듯 선혈 가득한 단풍이라 해야 할 듯 하다. 원래 설악산은 지리산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중추인 금강산의 남쪽산으로 한국전쟁 전에는 38선 이북에 속해 있었다. 1953년 휴전 직전까지 치열했던 매봉·한석산 전투, 펀치볼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설악-금강 축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수 많은 사람들의 피가 뿌려진 백두대간의 중추다. 그리고 분단의 현실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벌써 단풍이 지고 있다. 며칠 전 영하로 내려갔다는 설악산 아니던가? 눈잣나무, 털진달래, 아름드리 구상나무, 수 많은 다람쥐들, 산양똥 등 설악산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50여 년 전 고교시절 설악산에 수학여행 왔을 때는 기념상품으로 팔기도 했던 산솜다리(일명, 에델바이스)는 이미 멸종된 듯 하다. 오후 3시쯤 드디어 중청이다. 7.7km를 5시간 넘게 걷고 또 걸었다. 600m 앞에 대청봉이 근엄하고 웅장하게 앉아 있다. 발아래 내설악과 외설악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진다. 커피 한잔 하면서 멀리 북쪽을 바라보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산맥이 금강산일 듯하다. 

 

중청산장에서 숙박하는 등산객들이 둘러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립공원 직원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하산하라고 권고한다. 마지막 힘을 다해 정상에 선다. 멀리 속초 바다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계곡의 구름들이 연기처럼 하늘로 치솟는다. 높은 봉우리와 고개를 넘기 위한 용틀임처럼 보인다. 넘지 못하면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몇 가지 내용의 인증샷을 찍고 서둘러 하산한다. 오후 4시라 다시 한계령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3년 전 이맘때 대청봉에 올랐다가 내려갔던 오색방향으로 향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수많은 돌계단이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 하산한다. 그나마 붉은 단풍과 계곡의 물소리,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보면서 피로함을 잊는다. 

 

오후 6시 넘어서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핸드폰 불빛에 의해 거친 돌계단을 내딛는다. 저 아래 불빛이 비치기는 하는데 발거음이 무거우니 목적지는 멀게만 느껴진다. 1시간 30분 정도 더 걸어서 겨우 오색분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10시간의 여정이 끝났다. 내 뒤로는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산은 온통 어두운 적막에 잠겼다. 마침 빈 택시가 있어 다시 주차해 둔 한계령으로 향한다. 휴게소 영업도 끝났다. 결국 44번, 46번 국도와 서울-양평고속도로를 달려 가평휴게소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한 뒤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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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장덕수 시, 하덕규 작곡, 양희은 노래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작곡자 하덕규는 홍천에서 태어나 한계령 아래 고성군 토성면 천진마을에서 자랐는데 열 살 때 어머니와 헤어졌고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힘들 때나 어머니가 그리우면 한계령을 찾았다고 한다. 

출발하기 전 들었던 노래 <한계령>보다 산행일기를 쓰면서 다시 듣는 <한계령>이 가슴을 저민다. 

 

(496회, 설악산, 한계령-대청봉, 2023.10.1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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