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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는 고요하고 싶어도,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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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서기장이 될 무렵을 전후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연방  내에서는 대외무역 독점 문제를 놓고 1년 넘게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외무역 독점제도는 10월 혁명 승리 이후 레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1918년 4월 인민위원회는 대외무역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곧 발발한 내전과 외국의 무력개입으로 대외무역 독점제도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내전이 대충 끝난 후인 1920년 말이 되어서야 외국과의 무역이 재개되었다. 대외무역 관리를 일원화하고 대외무역 독점제도를 실시하기 위하여 상공업인민위원회를 '대외무역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21년 러시아공산당은 신경제정책(NEP)을 실시하고 일정 범위 내에서 국내 상거래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이때 러시아연방의 일부 지도자들은 대외무역 문제에서도 독점을 완화하거나 포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1년 10월 28~31일, 리가에서 열린 발트해경제회의에서 러시아연방대표단 프바 밀류틴은 소비에트러시아의 대외무역 비국유화계획을 제기하고, 이 계획을 외교인민위원 치첼린에게 편지를 썼다. 대외무역 비국유화를 선언하면 개인 상인이 국가보다 해외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용이하다고 말했다. 치첼린은 편지를 써서 밀류틴의 의견을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보고했다. 레닌은 11월 9일 치첼린의 서한을 비판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밀류틴의 이 전혀 쓸 데 없는, 근거 없는 계획을 통째로 부결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음날 정치국은 레닌의 제안에 따라 밀류틴의 제안을 거부했다. 

 

신경제정책(NEP)으로 이행과 해외와의 무역왕래가 확대됨에 따라 대외무역 법령에 대한 얼마간의 수정과 보충이 날로 필요해졌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정치국은 최고국민경제위원회에 대외무역 국가독점에 관한 총체적 구상을 제기토록 위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副)대외무역인민위원 안마 레자바(An M. Lezava )의 <대외무역요강>이 발표되었다. 이 ‘요강’은 반드시 대외무역 독점제를 유지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인민위원 크라신) 의 감독하에 일부 국영과 합작사 간 연합회사에 독립적으로 수출 권리를 줄 것을 건의했다. 이 ‘요강’은 레닌의 동의를 얻어 1922년 1월 4일 최고국민경제위원회에서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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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NEP)

 

그러나 재정인민위원 소콜리니코프는 이 요강에 대해 반대하면서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가트러스트, 합작사 및 기타 단위의 권한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레자바의 요강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1922년 2월, 


"내가 보기에 클라신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어떤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또한 문제는 독점제에 관한 요강이 아니라 실제로 독점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독점제에 관한 말은 결국 쓸데없는 넌센스이다."*

 

* <소련공산당 역사문제 > 1963년 제10기 31쪽 참고하고, <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자료> 1982년 제3집 100쪽 인용.

 

레닌은 카메네프, 스탈린, 지노비예프와 대외무역 독점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3월 3일,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카메네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또 오랫동안 생각했다. 나의 결론은 클라신이 의심할 여지 없이 정확하다는 것이다.대외무역 독점제에 있어 우리는 지금 레자바가 '요강'에서 줄곧 실행할 것을 건의한 양보선을 넘어서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은 모든 귀중품을 사서 운반해 갈 것이다."

 

그런 다음 레닌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은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대외무역 독점제를 절대 파괴해서는 안 된다.
(2) 내일 레자바의 요강을 통과한다;
(3) 즉시 (우리는 이미 많은 시간을 상실했다)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단 명의로 강경하고 냉혹하고 엄격한 성명을 발표한다: 경제 방면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무릇 고의로 우리를 속이거나 (또는 독점을 회피하는 등등) 하는 사람은 '테러 수단'에 의한 반격을 받을 것이다; 이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완곡하고, 공손하게 암시해야 한다."*

 

* <레닌전집> (2판) 42권 459, 460-461쪽, 인민출판사.

 

이튿날인 3월 4일,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일부 수정을 한 레자바의 요강을 통과시켰다.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단은 이를 바탕으로 3월 13일 <대외무역에 관한 결정>을 통과했다.

 

하지만 러시아공산당 당내와 소비에트 정부  내에서는 대외무역 독점제에 관한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5월 15일, 레닌은 독일 주재 러시아연방 전권대표 N. N. 크레스틴스키가 보고한 자료를 받아보았다.  그 자료에 따르면 대외무역 독점문제에 대한 당내 이견은 외국 자본가와의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레닌은 이날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정치국 위원들에게 문의하는 형식으로 다음 사항을 제안한다: "중앙위원회는 대외무역 독점을 확인하며, 최고국민경제위원회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합병에 관한 연구와 계획을 일률적으로 중단하기로 한다. 각 인민위원은 비밀리에 서명해야 한다 ." (위 레닌, 185, 526쪽)

 

1925년의 코카서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좌측부터 아나스타스 미코얀,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png
1925년의 코카서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좌측부터 아나스타스 미코얀, 이오시프 스탈린,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같은 날, 그는 스탈린과  프룸킨(Mo. I. Frumkin) 대외무역인민위원에게도 편지를 썼다.

 

레닌은 서한에서 "대외무역 독점 약화에 관한 모든 논의, 상담, 위원회 등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영 상업은 항상 패배한다는 프룸킨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백화점은 다른 모든 상점들을 이겼다. 그런데 그것이 국영 상업보다 나은 점은 무엇인가?" (레닌전집 2판 52권, 440쪽)

 

프룸킨은 5월 10일 레닌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4~5개 상품의 도매 무역만 계속해서 국가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수중에 독점하고, 기타 제품은 일부 이윤을 국가에 넘겨주고 국가가 자금을 투여하지 않은 '합영회사'가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국영 상업이 적자를 내고 자유 경쟁에서 민간 상업에 패배할 것이라고 그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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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과 소비에트러시아연방의 곡식 생산량 변화 곡선

 

레닌은 5월 15일 비서에게 보낸 지시에서 스탈린과 프룸킨에게 자신의 편지에 대한 의견을 첨부한 뒤 그 편지를 다시 되돌려 줄 것을 요청했다. 5월 17일 스탈린은 레닌의 편지 밑에 레닌의  의견에 답해 국영상업이 "자유경쟁 시장에서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밝혔지만, 그는 또한 “비자유경쟁 시장에서는" 국영상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온실 식물로 변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 단계에서 대외무역 독점을 약화시키기 위한 절차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약화는 여전히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5월 22일 중앙정치국은 레닌이 제출한 대외무역 독점 확인에 관한 결의 초안을 통과시켰다.

 

바로 이때 레닌이 병으로 쓰러졌다. 레닌의 와병 기간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조달 및 무역 기능을 축소하고, 감독과 조정 작업만을 수행하며, 관세정책을 실시하면서 시장 동태 등을 연구하는 기구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정치국은 또 카메네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문위원회를 설립하고, 상술한 건의에 따라 결의를 기초하기로 결정했다. 클라신은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이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회부해 토론할 것을 요구했다. 7월 14일, 그는 헤이그에서 스탈린과 프룸킨에게 편지를 보내 카메네프 위원회가 기초한 결의는 근거가 부족하고, 당의 "제11차 전국대회" 결의 및 레닌의 지시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8일 중앙위원회는 카메네프 위원회의 방안을 통과시켰다.

 

1922년 10월 2일, 레닌은 건강상태가  얼마간 호전되어 고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복귀했다. 5~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레닌과 트로츠키가 결석한 상태에서 대외무역 독점을 약화할 데 관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통과시켰다. 

 

1. 대외무역 독점 측면에서 그 어떤 변화도 선포하지 않고, 특정 유형의 상품을 일시적으로 허용하거나 특정 국경에서 수출입을 허용하는 노동국방위원회의 몇 가지 결정을 채택한다.

2. 노동국방위원회는 상술한 조치를 즉각 실시할것을 제안하며, 수출을 허가할 화물의 총명세서 및 수출입 항구와 변경명세서 제출을 연기하지 말아야 한다.

3. 노동국방위원회가 최근 2주일 내로 수출입항, 국경, 상품 목록을 입안하기 위해 소콜리니코프, 보그다노프, 프룸킨, 레자바 동지가 성원인 위원회를 구성하는 동시에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대표를 참가시켜야 한다.  (레닌전집 2판 43권, 535쪽)

 

클라신과 중앙소비협동조합 연맹 이사회 회장 레미 힌추크(Le M. Hinchuk) 및 기타 많은 경제 일꾼들은 모두 이 결정에 반대했다. 10월 12일, 레닌은 스탈린을 불러 담화하면서 이 같은 중앙위 전체회의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같은 날 레닌은 또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중앙위원들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사실상 대외무역 독점을 파괴하는 것"이라며, "문제는 전체회의를 서둘러 개최한 것이다. 진지한 논쟁을 전혀 벌이지 않았다. 성급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2개월 연기하여 이 문제를 해결토록 한다. 즉 다음 전체회의가 열릴때까지 결정을 연기한다. 이 기간 우리의 무역정책 경험에 관한 종합되고 검증된 자료를 수집하도록 한다."고 제안했다.  (레닌전집 2판 43권, 220, 221, 222쪽)

 

10월 13일,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중앙위원들에게 레닌의 편지와 클라신이 제출한 "대외무역인민위원부의 대외무역제도에 관한 요강"을 배포했다. 다수 위원들은 레닌의 제안에 지지를 표명 했지만, 일부 핵심 요원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부할린은 10월 15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에 보낸 서한에서 대외무역 독점을 취소하라는 요구에 논거를 제시하려 시도하고, '고관세 정책'으로 독점제도를 대체할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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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중앙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 "레닌 동지의 편지는 대외무역 문제에 관한 10월 6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정이 옳다는 견해를 포기하도록 설득하지 않았다...그러나 레닌 동지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정의 집행을 연기할 것을 결연하게 건의한 점을 감안해, 나는 다음 전체회의가 레닌 동지 참가하에 문제를 다시 토론할 수 있도록 연기하는데 찬성한다"고 말했다.


지노비예프는 자신의 성명에서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대외무역제도 문제에 관한 결정을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10월 16일, 중앙위원들은 레닌의 건의에 대해 투표를 진행하고 찬성 14표, 반대 1표 (지노비예프가 반대표 던짐)로 "다음 전체회의로 연기해 이 문제를 결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 

 

* 이상, <레닌전집>(2판) 제43권, 535-536쪽, 인민출판사.


대외무역 독점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레닌은 상당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반드시 강력한 지지자를 찾아야만 했는데 이때  트로츠키가 생각났다. 트로츠키는 1922년 8월 초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서 대외무역 독점제 폐지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는 데 찬성한다고 밝힌 바 있다. 12월 12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보낸 메모에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중앙위원회-역주) 전체회의에서 독점을 수호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당신은?" (레닌전집 2판 52권, 547쪽)

 

같은 날, 트로츠키는 레닌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대외무역 독점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대외무역 독점에 대한 반대자들은 그것에 대한 정면 공격이 아닌 복잡한 우회적 행동을 취하고 있다. 다른 한편, 대외무역 독점제를 바꾸고 보완하는 방법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 일종의 위험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독점제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독점제를 해치는 방법을 채택하려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국가계획위원회는 반드시 전반적인 경제 수요에 따라 대외무역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맑스-레닌주의 연구자료> 1982년 3집, 9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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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트로츠키

 

레닌은 이 편지를 받은 즉시 프룸킨과 스토모니아코프 (베를린 주재 소비에트 러시아 상무전권대표) 에게 아래 편지를 썼다. 

 

오늘 나는 트로츠키 동지의 편지를 받았는데, 지금 동봉한다. 국가계획위원회의 마지막 몇 줄을 언급하는 것 외에는 편지의 모든 내용에 동의한다. 나는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써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을 알릴 것이며, 그가 나의 병세를 감안해 전체회의에서 나의 입장을 변호해 줄 것을 요청할 것이다. (위 자료, 93쪽)

 

12월 13일, 레닌은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나는 당신과 의견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어쨌든 곧 열릴 전체회의에서 대외무역 독점을 보류하고 강화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우리의 공통된 관점을 수호하기 위해 나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 문제에서 양보할 수 없다. 프룸킨과 스토모니아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이 문제에서 우리가 실패하면 당대회에 문제를 제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말했다.(레닌전집 2판 52권, 548쪽) 같은 날, 레닌은 또 <대외무역 독점에 관하여>라는 편지를 전화로 구술해서 스탈린으로 하여금 곧 소집될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레닌은 편지에서 부할린의 관점을 반박하고, 대외무역 독점을 수호하는 중요성에 관해 힘써 천명했다.

 

* 레닌이 이 같은 편지를 스탈린에게  전달 부탁하는 것은 그가 서기장 직책을 맡아 당내 서한 등의 전달 업무를 총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ㅡ역자주

 

12월 15일, 레닌은 또 비서 릴리아 포디에바에게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레닌은 "나는 우리가 이미 완전히 합의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전체회의에서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성명해 달라"면서 "만약 우리의 결정이 통과되지 않으면, 우리가 소비에트 내부의 당 조직에 부탁해서 이 문제를 당대회에 제출토록 할 것이라고 성명해 달라"면서 이 문제에서 계속 동요하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레닌은 또 프룸킨으로부터 이 문제를 즉각 해결해야 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프룸킨의 편지를 받은 레닌은 다시 트로츠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와 함께 프룸킨의 편지를 동봉하면서 "부탁한 편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문제를 즉각 토론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레닌전집 2판 52권, 550-551쪽)

 

12월 15일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각자 자신의 원래의 관점을 포기하고 대외무역 독점제도를 수호하는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스탈린은 중앙위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근 두 달 동안 축적된 대외무역 문제에 관한 자료들이 대외무역 독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나는 내가 두 달 전에 중앙위원들에게 서면으로 통지한 대외무역 독점 반대 의견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낼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레닌전집 2판 43권, 556쪽)

 

레닌은 자신의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15일 저녁에 다시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술하여 중앙위원회에 전달토록 했다. 거기에서 "트로츠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나의 대외무역 독점문제에 관한 관점을 수호했다."라고 말했다.

 

"대외무역 독점문제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을 결연히 반대한다. 어떤 고려에서든 (내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런 고려를 포함해서), 다음 전체회의 토론으로 미루려 한다면, 나는 단호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첫째, 나는 트로츠키가 나의 관점을 수호하며, 조금도 나보다 못하지 않다고 믿는다. 둘째, 당신과 지노비예프, 듣자니 또 카메네프의 성명은 일부 중앙위원들이 이미 자신의 원래 관점을 바꾸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극단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계속 망설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을 파괴할 수 있다"라고 했다.(레닌전집 2판 43권, 333-334쪽)

 

12월 16일,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의 부탁을 받고 비서인 포디에바에게 전화를 걸어 예미 야로슬라프스키에게 비밀리에 전화를 걸어서 부할린과 피다코프의 발언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능하면 전체회의에서 대외무역 문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발언도 기록해 조용히 레닌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레닌의 이 같은 일련의 작업 때문에 중앙위원들은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대외무역 독점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12월 18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만장일치로 10월 전체회의 결정을 취소하고, "대외무역 독점을 유지하고 조직적으로 강화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재천명한다고 결정했다.

 

레닌은 또 다시 발병으로 인해 이번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12월 13일 오전에 발병했는데, 의사는 그에게 어떤 회의에서도 발언하지 말고 도시를 떠나 완전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했지만 레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15일 늦은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그후 며칠 동안 그의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고르크에 가서 휴양하라고 건의했지만, 레닌은 역시 동의하지 않았다. 18일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레닌의 건강 상태에 관해 토론하고, 특별 결정을  내려 스탈린에게 의사가 레닌을 위해 규정한 작업과 휴식제도 수행 여부를 감독하도록 위임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레닌-역주)와 사업 일군 간 개인적인 접촉 및 서신 왕래를 단절한다." 그러면서 "레닌 동지가 대외무역 문제에 대한 전체회의 결정을 물으면, 스탈린과 의사의 합의에 따라 그에게 결의에 관한 모든 조문을 통보하고, 결의 및 위원회 구성이 모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알려준다. 야로슬라프스키 동지의 회보는 결코 지금 전달할 수 없고, 잘 보존토록 한다. 의사가 스탈린 동지와 합의한 대로 전달할 때 다시 전달토록 한다"고 했다. (<스탈린연구> 1993년 1집, 69-70쪽)

 

레닌은 비록 병세가 심각하였지만, 그는 대외무역 독점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12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결정이 통과된 후에도, 여전히 곧 개최될 전 러시아 소비에트 제10차 대회의 공산당 프랙션그룹에 이 일을 통보하면서, 이 문제를 제12차 당대회에 제출할 것을  제안했다. 12월 21일, 레닌은 의사의 허가를 받고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편지 한통을 크루프스카야에게 구술 했다.

 

마치 겨우 병력을 동원해 총 한 발도 쏘지 않고 진지를 점령한 것과 같다. 나는 멈추지 말고 공세를 계속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당대회에 대외무역을 강화하고 개선하기 위한 문제를 제기하는 제안을 통과시켜야만 한다. 이 일은 소비에트대회의 당 프랙션그룹이 선포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 이의를 표시하지 않길 바라며, 당 프랙션그룹에 알리는 것을 거절하지 않길 바란다. (레닌전집 2판 52권, 553쪽)

 

이날 저녁 트로츠키는 카메네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레닌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며 편지에 담긴 레닌의 뜻을 알렸다. 트로츠키는 전화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은 채, 이 문제를 중앙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당대회 준비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보고서에서 곧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정을 선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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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그의 아내 크루프스카야

 

스탈린은 카메네프의 편지를 받은 즉시 (12월 22일) 카메네프에게 답장을 썼다.

 

카메네프 동지:
귀하의 편지는 접수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보고서에서 노인*이 어떻게 펠스트([Firster]**의 절대적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썼는지를 당 그룹 회의에서 공개하는 것이 아닌, 설명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노인. 레닌의 당내 필명 중 하나.

**펠스트. 독일 신경과 의사.  1922년 3월부터 레닌의 보건의 고문으로 일했다.

***<스탈린연구>  1993년 1집, 70-72쪽 참조.

 

레닌이 대외무역 독점문제에 관해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구술 편지를 크루프스카야가 썼다는 사실을 알고,  스탈린은 12월 22일 전화를 걸어 그녀를 크게 꾸짖으며 의사의 금지령을 어겼기에 감찰위원회에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크루프스카야는 매우 억울해 했다. 12월 23일, 그녀는 카메네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레프 보리소비치:
내가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의사의 허락을 받아 구술한 문자 한 통을 기록했기에, 스탈린은 어제 뜻밖에도 나에게 매우 난폭하고 무례하게 행동했습니다. 내가 입당한 지 하루 이틀이 아닌데, 30년 동안 어떤 동지도 나에게 이렇듯 막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당과 일리치의 이익을 스탈린 못지않게 소중히 여깁니다. 지금 나는 최대한 자제가 필요합니다. 일리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 나는 그 어떤 의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슨 일이 그를 불안케 하며,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적어도 스탈린보다는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루프스카야는 자신이 "사생활에 대해 난폭하게 간섭하고 터무니없는 욕설과 위협"을 받지 않도록 카메네프에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탈린이 감찰위원회로 나를 위협하다니, 나는 감찰위원회가 일치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리석은 분쟁을 일으킬 정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고, 신경은 극도로 긴장돼 있습니다. (레닌전집 2판 52권, 703쪽)

 

카메네프는 크루프스카야의 편지 내용을 스탈린에게 알렸고, 스탈린은 즉시 크루프스카야와 의견을 교환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순전히 레닌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악의는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두 달여가 지나자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레닌은 사건의 경과를 알게 된 후 3월 5일 스탈린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구술케 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거칠게 전화를 받으라고 하면서 그녀를 모욕했소. 비록 그녀는 당신이 한 말을 잊는 것에 동의한다고 했지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그녀에게서 이 일을 알게 되었소. 나는 그렇게 쉽게 나를 반대하는 언행을 잊고 싶지 않소. 자명하오. 나는 내 아내의 언행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바로 나의 언행을 반대하는 것이라 생각하오. 따라서 당신이 자신의 말을 철회하고 사과하는 것에 동의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는 것에 동의하든지 고려해 주시오. (레닌전집 2판 52권, 555쪽)

 

레닌은 비서 볼로디체바에게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도록 하고, 사본을 봉투에 담아 여동생 울리야노바에게 건네주며 크루프스카야에게는 이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크루프스카야가 밖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레닌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결국 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크루프스카야는 볼로디체바에게 레닌의 편지를 잠시 보류토록 하고, 3월 7일에야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했다. 스탈린은 편지를 받자 그날 바로 레닌에게 답장을 썼다.

 

레닌 동지:
약 5주 전에 나는 콘스탄티노프나 동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당신의 아내일 뿐 아니라 당내에 있는 나의 오랜 동지이기도 합니다. 당시 나는 (전화에서) 그녀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의사는 일리치에게 정치에 관한 소식을 알려주는 것을 금하고, 이 방법이 그의 병을 치료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나제스다 콘스탄티노프나는 뜻밖에도 이 시스템을 파괴하였습니다. 일리치의 생명을 가지고 농담을 해선 안됩니다......"


나는 결코 이런 말 속에 어떤 난폭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점이 있다거나, 당신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능한 한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나는 감독의 집행을  스스로 직책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콘스탄티노프나와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는데, 이미 이 일에 있어 말할 가치도 없는 오해 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점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앞서의 말들을 ‘철회’해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 나는 그것들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나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과 크루프스카야의 전화 통화를 가리킨다.

** <스탈린연구> 1933년 1집, 73쪽 참조.

 

스탈린이 답장을 보냈을 때는 레닌의 병세가 마침 다시 악화되었기 때문에, 의사와 크루프스카야는 이 편지를 레닌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임종할 때까지 레닌은 스탈린이 답장을 보내어 사과한 사실을 몰랐다.

 

말년의 레닌.png
말년의 레닌

 

1923년 4월 17~25일 소집된 러시아공산당 제12차 당대회는 대외무역 독점에 관한 필요성을 긍정하였다. 결의는 "당대회는 대외무역 독점제도가 확고부동하며, 그 어떤 위배하거나 집행에 있어 그 어떤 동요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을 무조건 확인한다. 새로운 중앙위원회에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대외무역 독점제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것을 지시한다.”

 

이로써 대외무역 독점제도에 관한 논쟁은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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