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7.10

신석정.png

 

사람에게는 말이나 문자보다 그림이나 영상이 더 선명하게 각인되게 마련이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나 단원 김홍도의 <씨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등은 지난 시대의 그림임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시가 독자에게 그림처럼 다가올 때 더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래서 시에서는 추상적인 언어나 설명보다 이미지가 살아 있는 표현이 중요하다. 

 

시에서 말하는 이미지란 상(象) 또는 심상(心象)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해서 마음속에 그려지는 그림과 같은 것이다. 보이는 것(시각적 이미지)이 대표적이지만 그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에는 소리(청각적 이미지)도 해당하고 촉감, 냄새, 맛 등 사람이 느끼는 모든 감각이 연관될 수 있다.

 

사람은 살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등 감각적 활동을 하는데, 그 경험은 마음속에 축적된다. 독자의 마음에 깃든 감각적 경험을 선명하게 불러낼수록 시의 메시지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신석정 시인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살아 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 시인.png
신석정 시인(1907~1974)

 

이 시를 음미하다 보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가 나는 모습,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가 붉게 익은 모습,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모습 등이 눈앞에 펼쳐진다. ‘구슬피 들려오는’ 물소리도 느껴지고, ‘꿩 소리’, ‘꿀벌이 잉잉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고, 능금을 ‘또옥 똑’ 따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독자들의 마음속에 목가적인 이상향을 그려 주는 한편, 그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먼 나라’임을 반복하여 인식시켜 준다. 일제에 부역했던 여러 문인과 달리 끝까지 지조를 지킨 시인 신석정은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그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아무런 위협도 없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생각해 보자. 우리 현실은 그와 동떨어져 있다’라고 하면 추상적인 설명에 그친다.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므로 호소력이 떨어지며 오래 기억되기도 어렵다. 위 시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를 충분히 제시해 주고 그것이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일깨워 주면 메시지는 훨씬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되며 오래 기억된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은 1932년이지만 우리 시대에도 호소력이 있다. 시에 그려진 이미지들이 살아 있기에 오늘의 현실에서 음미해도 충분한 감동이 있는 것이다. (관련 글은 https://url.kr/RjY7Lx 참고)

 

신석정 시비.png.jpg
공원에 있는 신석정 시비

 

사람의 마음은 이미지의 창고다. 독자의 마음속에 보관된 이미지를 시로 깨워 보자. 추상적이고 막연한 언어로는 깨울 수 없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시는 글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해 보자. 창작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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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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