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송온난(宋温暖)/ 김정호 번역 
등록일 : 2024.07.13
중국인민지원군이 환송 속에 철군하고 있다.png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 주민의 환송 속에 철군하고 있다.

 

[개요] 1957년 말부터 1958년까지 북-중은 중국인민지원군(이하 지원군) 철수에 합의하고, 지원군은 총 25만 명으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철수했다. 사령부 등은 폐지되고 일부 장병은 각 본부에 배치되거나 제대하고, 일부 문예단체는 지방과 군대에서 인수하였다.

 

1953년 휴전 직후부터 지원군은 북한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1957년 말까지 아직 수십만 명의 지원군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지원군 부대는 어떻게 귀국했을까? 귀국 후 행방은?

 

1. 김일성이 제시한 두 가지 철군 방안

 

1957년 11월 2일부터 20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1958년 안에 지원군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뒤 지원군 철수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2월 16일 제시안 첫번째 방안은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서한을 보내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동시 철수를 제안한다. 둘째, 중국 정부는 위의 제안에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1958년 말까지 철수를 선언한다. 셋째, 조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방북과 북-중 공동보도문 발표에 이 문제를 포함한다.”였다.


김일성은 11월 25일 마오쩌둥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철군에 관한 두번째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먼저 양측의 철군을 제안하고, 북한 정부가 그것에 대해 동의와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2차 방안은 분명 1차 방안에 비해 북한이 자발적 요구에서 중국 측 제안에 따르는 것으로, 중국은 수동적 입장에서 주동적으로 바뀐 것이었다. 김일성의 이 같은 변화는 1안이 북한의 주동적 지위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중국을 불편하게 할 것을 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국에서 답변도 하기 전에 두 번째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958년 1월 24일 마오쩌동은 김일성에게 답장을 보내 김일성의 첫 번째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편지를 보내는 방식 보다, 북한 정부가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바꾸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유엔'과 '유엔군 출병국'을 구분해서 유엔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취지였다. 이후 북-중 양측은 철군 방안에 전격 합의하고, 1958년 2월 조우언라이(周恩來)가 이끄는 대표단의 방북 기간 중 북-중 양측은 철군 문제에 대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지원군 철군 작업이 시작됐다.

 

펑더화이와 김일성.png
펑더화이와 김일성

 

2. 양용(杨勇)이 제시한 철수 및 배치 건의

 

이미 1958년 1월 28일 지원군 사령관 양용(楊勇)은 이 사건에 대해 국방부 장관인 펑더화이(彭德怀)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양용은 철군의 정치적 파장을 키우고 유엔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기 위해, 3월 중순부터 최전선에 있는 16군, 23군*부터 철수를 시작하자고 건의했다. "상황에 특별한 변함이 없으면" 다른 부대의 철수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1개 군(军) 병력은 대략 3만~10만 명 정도이다. 한 군대의 수는 국가, 군대의 종류, 임무에 따라 다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군은 일반적으로 3-6개 사단 또는 사단에 해당하는 부대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중국의 편제에서 1개 군은 3~4개의 보병 사단, 1-2개의 기갑 사단 또는 탱크 연대, 포병 부대 및 기타 지원 부대로 구성된다.


지원군 1급 지도기관의 경우, 양용은 보고서에서 덩화(邓华)가 펑더화이에게  일찍이 지원군을 철수시킨 후 지린성 창춘(长春)에 지헤이 군구(吉黑军区, 길림성-흑룡강성 군구) 설립을 제안했던 일을 언급했다. 양용은 그럴 경우 " 북한과 가까워 유사시 재 입북이 편리하고, 동북에 부대가 많아 일부 부대의 훈련 임무를 분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단점은 한 쪽 방향 만을 배려할 수 있고, 기동하기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또 동북 지역은 하나의 전역( 战役)방향인데도 두 개의 지휘 기관이 있어 지휘가 편리하지 않고, 현재의 간소화 정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원군 1급 지도기관을 '선양(沈阳) 군구와 통합'하는 방안도 부정했다. 그는 지원군 1급 지도기관은 전쟁으로 단련되고 지휘 및 훈련 경험을 축적해서 "기관 간부의 자질이 양호하고 조직이 건전하다"고 지적하면서,  대안으로 우한(武汉) 군구와 통합하여 기동 지휘 기관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이 기관을 독자로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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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

 

3.최종적인 철군 및 배치 방안

 

펑더화이는 양용의 보고서를 읽고 마오쩌둥에게 전달했다. 2월 3일 마오쩌둥은 보고서를 본 후 "펑더화이 동지에게 돌려 줄 것. 이 보고서는 본 적 있음"이라고 메모 지시를 하고,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2월 13일, 제143차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쑤위(粟裕, 고위 장군)의  제안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먼저 철수한 부대는 동북에 주둔하고, 두 번째로 철수한 부대는 화북에 주둔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한 부대는 화중(华中)과 쓰촨(四川)에 주둔한다"라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원군 5개 군(각각 제1, 16, 21, 23, 54군)은 귀국 후 거취가 대략 확정됐다. 1차로 철수하는 지원군 부대는 동북지역에 머물면서 유사시 북한을 방어하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 본토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부대의 철수 순서에 대해서 중앙군사위는 "먼저 최전방, 그 다음 서해안, 맨 나중이 중간"이란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 "일선 부대를 먼저 철수시키는 것은 지원군의 철군에 따른 파장을 빠르게 확산시키는 동시에 적의 동태를 살피고, 중간 부대를 맨 나중에 철수시키는 것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방침에 의하면:


1진으로 철수하는 부대는 육군 23군, 16군 등 6개 사단과 일부 포병, 탱크, 공병, 자동차부대, 공병지휘소와 19군단 사령부 등 8만 명으로, 3월 15일부터 4월 25일까지 완료했다. 그 밖에 20군단 지도부는 이미 3월 12일 북한을 철수했고, 16군과 23군은 귀국 뒤 선양 군구에 편입돼 각각 지린과 헤이룽장성을 방어했다.


2진으로 철수한 부대는 육군 54군, 21군 등 6개 사단과 일부 탱크, 포병, 고사포병, 병참, 공병부대, 탱크 지휘소 등 10만 명으로, 7월 11일부터 8월 14일까지 완료했다. 제54군은 귀국 후 충칭(重庆)에 주둔했다. 21군은 귀국 후 베이징 군구에 편입되어 산시(山西)에 주둔했다.


3진으로 철수한 부대는 지원군 본부, 육군 1군 3개 사단, 포병 지휘소 및 지원군 병참부, 병참지원 부대 등 모두 7만 명으로 9월 2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완료했다. 귀국 후 제1군은 우한 군구에 속한 허난 카이펑(河南开封)에 주둔했다. 이로써 지원군 총 25만 명이 세 차례에 걸쳐서 모두 철수를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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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의 지원군 환송


지원군 직속 기관에 대한 배치는, 양용 사령관이 구상했던 '우한 군구와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9년 1월 지원군 사령부, 정치부, 후방부 제도가 모두 폐지되었다. 직속기관 간부들은 대부분 인민해방군 각 본부에 배치되어 일했다. 정치부 문화공연단, 경극단, 연극단, 곡예단, 평극단, 병참부 정비소는 각각 산둥성, 베이징군구, 선양군구, 장시성(江西省) 및 기타 지방 및 군 단위에서 접수했다. 또 일부 장병은 귀국 후 제대했다.

 

2024.07.09

(원문보기)  https://baijiahao.baidu.com/s?id=1804081666166348755&wfr=spider&for=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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