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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샤오치(1898-1969)와 부인 왕광메이

 

류샤오치는 1898년에 태어나 1969년에 사망했다. 마오쩌둥과 같은 후난성 출신인데 마오쩌둥보다는 다섯 살이 적다. 그는 적지 않은 기간 마오쩌둥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끝내 마오에 의해 국가주석직에서 해임당하여 실권한 뒤 문화대혁명 때 병사했다.

 

1981년에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으며 훗날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그를 기려 이렇게 말했다. “류샤오치 동지는 중국혁명과 건설에 전심전력, 노심초사하였다.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외교와 당의 건설들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다. 그는 전당과 전군은 물론 전국 인민들의 깊은 흠모를 받고 있다”

 

류샤오치가 태어난 닝샹현(寧鄕縣) 탄즈충(炭子冲)은 마오쩌둥의 고향 샹탄현 샤오산(소산), 펑더화이의 고향 샹탄현 우스 마을과 각각 30킬로 거리에 있다. 인근에서 공산당 주석과 후계자, 그리고 최고 군사지도자가 태어난 것이다.

 

류샤오치는 1919년 중학을 졸업하고 1920에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1921년에는 소련의 모스크바 동방 공산주의노동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이해 창립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 귀국한 그는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장시성의 안위안(安源)의 탄광으로 가서 리리싼과 함께 광부들의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안위안 광부클럽의 주임을 맡았으며 1925년에 전국 총공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상하이, 광저우, 우한에서 반제투쟁을 벌이고 홍콩·광저우 대파업 투쟁과 우한과 한커우의 영국 조계 반환투쟁에 참가했다.

 

1927년 중공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공합작이 결렬된 뒤 허베이, 상하이, 동북에서 당의 비밀사업에 종사하였다. 193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적색노련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어 현지에서 근무했다. 1931년 중국공산당 6차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어 귀국했다.

 

그는 전국 총공회의 당서기를 맡았고 당내의 폐쇄주의와 모험주의 노선에 제동을 걸었다. 류샤오치는 “국민당 통치지역에서는 군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장기간 은신하며 역량을 비축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 시기 리리싼과 취추바이 등을 대표로 하는 당내 지도부의 모험주의와 의견을 달리한 것이다.

 

1932년에는 장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서 노동운동을 지도하며 푸젠성 당서기를 맡았다. 1934년부터 장정에 참가했는데 1935년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다.

 

1936년에 화북에서 중공 북방국 서기를 맡았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화북에서 군중을 고무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며 항일근거지 확장에 종사했다. 1938년에는 중공 중원국 서기를 맡아 화중 지역의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투쟁을 벌였으니, 험지에서 종횡무진한 것이다.

 

1941년 국민당이 환남사변을 일으키며 공산당 신사군을 공격, 주력을 궤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류샤오치는 화중으로 가서 신사군 정치위원겸 화중국 서기를 맡아 천이(陳毅) 등과 함께 무너진 군을 재건하였다. 1943년 옌안으로 간 그는 중공 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아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장제스와 국공담판을 벌일 때, 류샤오치는 옌안에서 중국공산당 주석대리를 맡았다. 1947년 국민당군이 옌안을 점령하자 중국공산당은 지도부를 나눴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지도하고 류샤오치와 주더는 화북에서 전국의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운동을 지도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뒤 그는 정부 부주석을 맡았으며 1954년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1956년에는 중공중앙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1959년에 류샤오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방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천만명이 아사하는 가운데 마오쩌둥은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류사오치는 조급한 집단화와 경제계획에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갈등관계에 있는 소련과의 관계복원을 원했다. 마오쩌둥, 덩샤오핑, 천윈 등 지도부는 인민공사를 합작사로 되돌리고, 자영농지를 허용하며, 작은 개인기업을 허용하는 등으로 경제회복을 꾀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당이 대중을 멀리할 뿐 아니라 지식분자의 “우파경향”, 농민의 “자본주의로 가는 자발적 경향”과 “소련의 수정주의로 빠져드는 경향”을 방조하거나 방치한다고 생각하였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리지 않아 “사실상 밀어낸”것으로 되었다.

 

1959년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해임한 뒤 암암리에 반격을 꾀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뒤 류샤오치가 중소동맹 복원을 건의하자 마오쩌둥은 그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한 것처럼 자신을 밀어낼 것으로 생각하였다.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자, 상황이 좀 더 분명해졌다. 1968년 류샤오치는 “당내 주자파, 반혁명분자”가 되어 타도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는 모든 직무에서 축출되었으며 후계자 자리는 린비아오에게 돌아갔다. 그는 당에서 제명된 뒤 가택연금이 되어 홍위병들의 습격과 폭행을 당했다.

 

이후 송나라의 고도 카이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당뇨병, 폐렴이 악화되어 1969년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980년 공산당의 류샤오치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복권되었다.

 

출처 : <노동자신문>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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