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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환 열사  분신 후   '택시 완전 월급제  실시'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3.10.12) 


한 쌍의 부부 활동가와 그들의 가정을 파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사건에 대해, 그리고 한 명의 동지를 분신케 만든(비록 그 한 원인일지라도) 사건에 대해 우리는 엄숙한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원인을 철저히 파헤치고, 화근을 뽑아내지 않는다면 이 같은 비극은 다시 재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한 내부 투쟁이야말로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않는 진정한 길이다.

 

□ 양규서 함계남을 지운다면 꼬뮌이 미래도 희망이 없습니다.

 

당신의 귀를 막아도 속삭입니다. “아빠를 혼자 두면 안 돼요.”
당신의 눈을 감아도 떠오릅니다. 옥탑에서 내려다보는 분노의 눈빛!

 

규서가 귀를 막아도 호통 칩니다. “돈 받으려고 아이 데리고 올라갔다.”
계남이 눈을 감아도 비웃습니다. “노조 상근자는 노동자가 아니야”

 

공공운수노조 명부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노동당 명부에서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신의 조직에서도 지울 수 없습니다. 양규서! 함계남!

 

기계의 소모품은 버릴 수 있지만 지치고 아픈 상근자는 버릴 수 없다!

 

뜨거운 감자는 시간이 지나면 되지만, 썩은 살은 그대로 두면 안 된다!

 

논쟁을 멈춰도 옥탑에선 절규는 계속됩니다.
내부 고발자가 유령이 된다 해도 치부는 더 뚜렷해집니다.

 

지금 당신이 용기를 낸다면
과로에 지치고 운동권 갑질에 고통 받는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세상을 바꿔 꼬뮌이도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불편한 진실을!
맞서 싸우세요. 조직 내 모순에!“ 


(2023.08.12. 토론 온라인 중계방 SNS에 올라온  글 중에서)


1. 비적대적 모순도 적대적 모순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의료노동운동이 발 딛고 서 있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하는 지난 10월 의료연대본부 산하 서울대병원과 경북대병원 지부가 파업에 들어가기 직전 이향춘 본부장의 기자회견 내용이다. 기자가 이번 파업의 주요 쟁점 또는 주요 요구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첫 번째는 인력충원입니다. 병원은 만성적인 인력부족 상태입니다. 국립대병원은 인력증원 시 기재부 승인이 필요한데 기재부의 과도한 인력통제로 승인비율이 36.9%(2022년 기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노사가 합의한 인력도 기재부의 불승인으로 현장에 인력충원이 안되다 보니 노사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안전이 환자의 안전과 직결됨에도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를 확대하고 있으며, 만성적인 인력부족은 환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습니다.……현장은 간호인력 부족으로 인해 만성적인 과다업무량과 시간외 근무, 자살, 직장내 괴롭힘의 문제가 발생되고 있으며 간호사들은 줄지어 사직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죠. 정부가 고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법 제정 및 제도 개선을 시기별로 구체화해서 마련해야 합니다.”  (공공운수노조,  2023.10.10)
 

이렇듯 병원노조의 주력인 간호인력 자체가 부족한 형편이니, 그것에 기반한 상급 단체의 상근 인력 또한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양-함 대책위는 본 사건 당사자이자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 조직국장인 함계남씨의 업무 부담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본 사건 상근자가 대부분의 조합원이 소속돼 있는 002사업장(서울대병원을 지칭하는 듯-주)의 조합원 관리, 간담회와 교육, 교섭, 투쟁, 선거관리와 기타 행정 등을 담당해왔다. 지시할 수 있는 장교는 20명인데, 이를 집행하는 사병은 4.5명인 것과 같은 구조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근속이 길고 역할분담의 특성상 본 사건 상근자에게 일이 집중된다. 더구나 선출 간부와 전임자는 특정한 직업군에 집중돼 있어 폐쇄적이고 경직적인 업무 관행에 대해 큰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상근자에게 과도한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

(2023.08.03. "2차 공공운수노조 사업장 내 상근자 처우개선을 요청하는 활동가 간담회" 내용 중)

 

이렇듯 의료연대본부 산하 병원들의 전반적으로 열악한 경제 사정(특히 간호인력 부족으로 나타난)과 이로 인한 상근자들의 과도한 업무 부담은 이 사건의 배경을 형성한다. 우리는 양-함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 반드시 이 같은 객관 상황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 사건에 있어 가해자 격인 의료연대본부나 피해자인 함계남씨 모두 나름의 사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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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농성 중인 양규서씨를 가족들이  밑에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렇듯 의료노동운동이 처해 있는 열악한 환경을 감안하는 것이 이번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수는 있지만, 다른 한편 자칫 그것은 우리의 눈을 가려 사태의 진상을 보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즉 이 같은 환경을 빌미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조직 내 심각한 ‘관료주의’ 문제를 은폐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모순 구도를 설정하도록 유도한다. 즉 ‘상근 활동가의 노동권’과 ‘활동가성’ 간의 모순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모순 구도를 설정할 경우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위 ‘노동권’(즉 상근자의 권리)이 주요한 측면인가 혹은 ‘활동가성’(즉 상근자에 대한 운동성 요구)이 주요한 측면인가라는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약칭 '노정협')은 이 사건에 대해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단체라 할 수 있다. 노정협 또한 이 같은 모순 설정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다만 이는 우리 내부의 모순이기에 성격상 비적대적이며, 해결 방식 또한 균형감각을 갖고 상호 소통과 타협을 통해 풀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 주장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이번 사태에 대해 일각에서는 상근 활동가의 노동권 중심으로 접근하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활동가성 중심으로 접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일도양단해서 규정하지 않고 통일적으로 바라봐야한다고 판단한다.


노동권 중심의 접근은 상근자의 처우를 노동자의 기본권,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여 상근자의 열악한 처지를 살펴보고 개선효과를 가질 수 있으나, 노조 상근자라는 위치가 노사 간 문제도 아니고 채용권을 발휘한 전임자들이 사용주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노조전임자가 요구하는 상근자의 활동과 그 과정에서의 과도노동이 전임자의 개인적 사욕,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조합원, 노동자의 권리확보, 확대를 위한 초과노동이기 때문이다.


활동가 중심의 접근은 상근 활동가가 직장인이 아니라는 것,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이 사회를 변화, 근본 개조하기 위한 투쟁에 복무하는 역할과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의미가 있으나 상근자의 처지나 근무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 헌신과 책임만을 관료적으로 강요할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이 과정에서 활동가의 자긍심과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제안] 민주노조 운동이 집단지성과 지혜를 모아 공공운수노조 고공농성을 조속히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3.08.04.)

 

이 같은 모순분석은 일견 상당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모순 구조를 설정할 경우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것은 이번 사건에서 두드러진 공공운수노조라는 거대한 산별조직이 개별 활동가에 대해 가한 무자비한 억압, 즉 ‘관료주의’ 문제를 비켜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이 문제가 이번 사건의 초점임에도 부차화하게 된다. 이 관료주의 문제를 가장 주요한 측면으로 부각시킬 때만이, 왜 우리 운동이 이토록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또 그럴 때만이 조직과 노선의 문제, 즉 ‘활동 주체’인 인간의 문제가 전면에 보이기 시작한다. 


공공운수노조는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 문제의 주체이다. 그럼에도 마치 이 산별노조가 활동가성 즉 ‘변혁성’을 요구하는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다. 우리는 항상 어떤 문제를 다룰 때 구체적인 인간 즉 ‘주체’를 떠나서 논의를 전개할 수 없다. 맑스가 얘기한 대로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우선에 놓고 다루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물신숭배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의 물신숭배는 공공운수노조를 마치 무색무취의 객관적 사물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주체, 정확히 말하자면 매 시기 특정 정파가 집행 권력을 장악하여 움직이는 인간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지금까지의 사건 전개가 보여주는 바는, 이번 문제는 일반인들이 선의를 가지고 기대하였듯이 단순히 당사자들이 한발씩 양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양규서 씨가 고공농성을 결심하기 전인 6월 9일, 아내 함계남에 대한 선처를 활동가적 양심과 우정을 담아 의료연대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간곡히 부탁했을 때 해결되었어야만 했다. 또 그가 폭풍우를 무릅쓰고 고공농성을 시작했을 때도 늦지 않았다. 좀 더 양보하더라도 8월 25일 1차 합의가 이루어진 후에는, 다시 상대를 짓밟기 위해 이 합의를 무시하고 징계를 추진하는 사태가 절대 일어나지 말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방영환 동지가 분신한 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공운수노조는 스스로 ‘징계’를 철회하고 사태를 원만히 수습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열사가 분신한 후에도 사태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징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느 한쪽의 주장을 용납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결국 상대방을 철저히 부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비타협성’과 ‘적대성’ 바로 그것 아닌가? 사태는 이미 노정협이 생각하는 선을 훨씬 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선 거대한 조직의 힘을 동원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쳐 헌신해온 두 사람의 활동가에 대해 끝까지 징계해서 결말을 보겠다고 작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했다는 이유로 다른 한 사람의 활동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마침내 그가 분신을 택하는데 커다란 동기를 부여했다. 이런 사건에 대해 ‘비적대적’으로 풀라고 권고한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경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막연한 선의(善意)에 기대어 문제의 원만한 해결만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다. 이미 곪을 대로 곪아 터진 대중조직 전반의 ‘관료주의’와 철저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투쟁할 각오를 다지는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관료주의’의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 이 작업은 잠시 미루고,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을 소개토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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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영환 열사 추모대회가 서울용노동청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 (2023.11.02)  

 

  ‘상근자 노조’를 설립하여 선출직 간부로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항상적으로 지켜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양-함 대책위 대표인 김장민 동지가 이 견해의 적극적인 옹호자인데, 필자는 편의상 ‘상근자 노조론’이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 이 주장의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오늘날 노동조합은 혁명조직이 아닙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김장민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전국 단위의 총연맹에 소속돼 있습니다. 개별 노동조합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투쟁을 하고 있으며, 총연맹은 법제도 개선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노동조합도 자본주의 타도라는 혁명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협상을 위한 수단일 뿐 자본주의를 철폐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김장민,  "<공공운수노조 사태>  노동조합은  혁명조직도 특권조직도 아닙니다", 2023.09.10)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 의도는 아래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해진다.

 

“3. 노동조합이 혁명조직으로서 노조 관료가 혁명가로서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일단 노동조합은 혁명조직이 아니니 혁명조직인 것처럼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노동조합의 선출 간부나 상근 간부 역시 혁명조직의 활동가가 아니니 혁명가처럼 특권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혁명조직이나 혁명가라고 해도 특권을 당연히 누리지 못합니다. 


노동조합이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싸우는 조직인 것처럼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노조관료 역시 때로는 투쟁하지만 결국은 자본과 협상을 목표로 하는 개량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다른 단체보다 우월한다든지, 노조관료가 다른 활동가보다 대접받아야한다는 논리는 불가능합니다.”  (위의 글)

 

김장민씨는 상근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상근자에게 무조건적인 헌신만을 요구하지 말고 대중조직으로서 일정한 규칙에 입각한 대우를 해줄 것을 바라는 의도이다. 노동조합 상근자나 활동가들도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또 이런 주장은 그가 그간 양-함 두 동지를 대변해 대책위 활동을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한편에선 이해가 간다. 하지만 변혁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같은 발상은 위험하다. 자칫 변혁적 노동운동을 개량적 노동운동으로 끌어 내릴 수 있다.


이 견해는 무엇보다 한 측면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고 혁명조직은 혁명조직이라는 식, 혹은 노조활동가는 노조활동가이고 혁명가는 혁명가라는 양분법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혁명조직도 아닌 노동조합이 마치 혁명조직인 것 마냥 ‘특권의식’을 가지려 한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현실에서 긴밀한 상호 침투와 상호 전환을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운동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치조직에서 조직원을 노동조합에 파견하고 일종의 ‘프랙션’(fraction, 정당이 대중 단체의 내부에 조직하는 당원 조직)으로서 활동케 하면 김장민씨의 이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은 당장 무너지게 된다. 당연히 정치조직의 활동가는 노조를 급진적으로 바꾸도록 노력할 것이다. 비록 계급정당이 없는 지금의 한국적 노동운동 현실 속에서도, 각각의 정치조직에서 파견된 개별 활동가는 그 같은 변혁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응당 그러하여야만 한다. 


만약 상근자들이 자신의 권리 찾기에 충실하게 된다면, 결국 운동은 필연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운동은 그간 스스로 자신을 활동가(변혁운동가)로 규정해온 무수한 상근자들의 자기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발전해 온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운동의 후퇴가 대동하는 조합원 수의 감소는 결국 이들 상근자들의 고용 자체마저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조합이든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상근자든 근본적인 해결책은 자본주의의 부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근자 노조론’은 간과하고 있다.


2. 관료주의 배후의 변질된 변혁세력

 

양-함 사건의 핵심은 소위 ‘활동가성’의 깃발 뒤에 은폐된 관료주의와 ‘분파주의’의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다.


필자는 앞서 공공운수노조를 마치 무색무취의 객관 사물로만 취급하는 ‘물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번 사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름 아닌 권위주의분파주의이다. 권위주의는 관료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이 같은 권위주의와 관련해선 지난 울산함성의 관련 보도("양규서-함계남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다" 참조)를 통해 명백하므로 여기선 주로 아직까지 별로 드러나지 않은 분파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도록 한다.


양-함 사건을 원만히 수습하는데 있어 결정적 장애가 되었던 것은 1차 합의를 무시하고 공공운수노조와 일부 산하조직이 양규서, 함계남, 방영환에 대한 보복징계 절차에 착수한 일이다. 그것은 공공운수노조 사무처 분회(이하 사무처 분회)가 2023년 9월 1일 26명이 참석한 임시조합원총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조합원인 양규서를 징계할 것을 공공운수노조 사무처장에게 요구하기로 결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공공운수노조 중앙집행위원회는 이러한 사무처 분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9월 6일 양규서 조합원을 징계에 회부키로 결정했다. 양-함 대책위의 표현을 빌자면 “노동관계법상 노동조합이 자신의 조합원을 사용주에게 징계해달라고 요구하고 사용주가 이를 수용한” 상식 밖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무처 분회가 양규서 조합원에 대해 징계를 요청한 사유는 ‘반조직적인 행위’ 때문이다. 9월 1일 공공운수노조 사무처분회 임시총회자료집을 보면 “조합원이 내부 토론을 거치지 않고 분회를 공격하는 ‘행동’이 반조직적 행위임을 명시”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양규서씨가 사무처 노동조합 소속이므로 사무처 분회가 자신의 규정에 따라 징계절차를 진행하면 된다”는 대책위의 주장을 논박하기가 어렵다. 엉뚱하게도  ‘사용주’ㅡ- 사실 이렇게 상근자와 노조와의 관계를 규정해선 안 된다ㅡ-에 해당하는 공공운수노조에 자신의 조합원을 징계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예 ‘고용(채용)’ 관계를 끊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무처 분회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조합원을 징계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을까? 그리고 이러한 요청을 공공운수노조가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얼핏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 같은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공공운수노조 내부의 속 사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글 처음에 의료노동운동의 열악한 환경에 대하여 기술했는데, 이런 조건은 의료노조가 공공운수노조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공공운수노조 전반의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문에 현장에서 올라온 선출직 간부(전임자)뿐만 아니라, 채용된 상근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다른 산별노조에 비해 공공운수노조는 특히 농후하였다. 양-함 대책위 문건을 보면 이 같은 ‘고달픈’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서 중간에 그만둔 상근자들이 그 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고 전한다.


이 같은 일종의 고달픈 노동조건 속에서 그것에 따르지 못하는 상근자들은 낙오되기 쉽고, 이들에 대해 당사자 스스로 자진사퇴를 거부하면 조직은 집단 따돌림 등 배타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여기서 함계남, 양규서와 같이 나름 개성있는 활동가(특히 혼자가 아닌 부부가 함께 근무하는 케이스)와 만나게 되면, 조용히 수습되어 왔던 기존 사례와는 다르게 이 억압적 조직문화(권위주의)와의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 ‘분파주의’가 결합 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처럼 조직 성원에 대해 일방적 희생만을 요구하고 마치 상근 활동가를 ‘고용인’으로 취급하는 조직문화 속에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그 테두리 내에 들어오는 사람만 식구처럼 감싸주는 ‘분파주의’가 기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만약 ‘권위주의적’ 조직문화만이 이번 사건의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서로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더 큰 확전을 의미하는 사후 ‘징계’ 요구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사무처 분회 자체 내의 징계가 아니라 ‘사용자’ 격인 공공운수노조를 향한 징계 요청은 사실상 그 징계 대상인 양씨와의 ‘고용관계’를 끊으라는 주문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공공운수노조는 이후 양 씨에 대해 ‘4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는데, 공공운수노조 내에선 이는 중징계에 속하기에 관행상 ‘그만두라’는 의미로 읽혀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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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서 정직4개월 결정 공문 (2023.10.31)


공공운수노조 내부의 ‘분파주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현 공공운수노조 집행부는 구 전노운협 계열(혹은 현 전태일대학 계열)과 구변혁당 계열(지금은 노동당에 합류하여 당권파로 변신)간의 일종의 연합 집행부라 할 수 있다. 현장 출신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 구 전노운협 계열은 의료노동운동과 수도권 일대 교육운동 분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구축하였는데, 그들은 이를 기반으로 공공운수노조의 집행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25만 여명에 이르는 한국 최대의 산별노조를 움직일 수 있는 전문 상근역량을 스스로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러한 역량을 외부로부터 수혈받아야만 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진보연대' 출신의 활동가들이 상당수 영입되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최근 사회진보연대의 우경화에 반발하며 변혁당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현재 공공운수노조 상근자들은 구 전노운협계열, 사회진보연대계열, 그리고 구 변혁당계열 3파로 구분될 수 있다.


그중에서 구 전노운협계열은 현재 집행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에, 그것을 탄생시키는데 공헌한 구변혁당계열이 사무처 내의 주도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을 이용해 사무처 내에서 그들은 자기편은 감싸는 한편,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상근자에 대해선 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양-함 부부의 경우,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소위 무당파 인사이기에 이들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함계남씨가 부상 후 자진 사퇴를 거부하고, 그들 부부가 ‘시간외수당’까지 요구하면서 기존 사무처 내 ‘통제 시스템’은 자칫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이 때문에 그들 부부는 더욱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다 구변혁당계열이 몸을 담고 있는 현 노동당 내부 사정과 얽히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한 내부 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한 활동가의 증언을 들어보자.

 

“공공운수노조 내에서 구 변혁당계열인 000부위원장과 사무처 △△△국장은 양-함 대책위 내에 현재 노동당 내에서 자파와 경쟁 관계에 있는 모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사무처 내에서 통제가 안 되는 양 씨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자칫 양 씨의 옥탑 농성에 굴복해 공공운수노조가 ‘합의’를 해줌으로써 자신들의 사무처 내 통제 기반이 와해 될 것을 우려했다. 이번 기회에 아예 한꺼번에 정리해 버리겠다는 생각에서 조금 무리수를 두게 됐다. 사무처 분회를 동원해 공공운수노조에 양 씨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여 꺼져가던 불을 다시 지핀 것이다.” 

 

이 동지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사건 경과에 비추어 볼 때 여러 면에서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에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특히 왜 사무처 분회가 굳이 일단락 되어 가는 사태를 뒤집고 이들 부부에 대한 징계를 추진했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유서에도 나와 있듯이 방영환 열사는 원래 양규서 씨와 친구 사이였다. 그가 옥탑 농성할 때 텐트도 쳐주고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영환 열사의 유서에는 특별히 양규서 씨를 지목하며 “나의  벗 친구 규서야, 우리의 투쟁이 공정하다는 것을 꼭 이루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평소 택시지부 일부 간부들에게는 방영환 동지가 눈에 가시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공공운수노조 내의 이런 기류에 편승해서 택시지부가 징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방영환 열사가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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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성운수 앞에서의 촛불 추모 집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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