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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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혁명광장의 중앙레닌박물관(1936년5월15일 준공)

 

1923년 가을, 소련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관료주의 문제다. 이 역시 레닌이 만년에 매우 관심을 가졌던 문제다. 당시 당내에선 당 제도가 온전하지 못해 민주주의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으며, 임명제가 선거제를 대체하고 있었다. 관료주의가 성행해  당 기관들은 일을 질질 끌었으며, 서로 책임을 미루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당 중앙과 국가기관은 감량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팽창했다. 1918년 8월 통계에 따르면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당 중앙과 지방 직원은 모두 23만 1000명이었다. 중간에 몇 차례 감량했지만 1922년 10월에는 오히려 24만 3000명으로 늘어났다. 

 

레닌은 "용감히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하지만, 태업이나 반태업을 하며 공문서 더미에 파묻히는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른다. 이런 역량 대비는 종종 우리의 생기발랄한 사업을 문서의 망망대해 속에 수장시킨다."고 지적했다. 또 1922년 3월, 레닌은 11차 당대회에서 정치보고를 할 때 인민위원회와 노동국방위원회 소속 각종 위원회만도 120개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16개에 불과하며, 결국 이들 위원회는 엉망진창으로 판명되었다. 누가 책임을 지고 자신이 무엇을 책임져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런 관료주의 현상이 매우 심각했는데,  " 관료는 소비에트 기관뿐 아니라 당 기관에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레닌전집> 2판 43권 248, 112, 385쪽)

 

다른 한편, 신경제정책(NEP)을 실시한 이래로 경제는 비록 일정한 발전을 가져왔지만, 상품은 아직 그리 풍부하지 않았다. 당시 이상하게 시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많지 않았음에도 제품이 적체되는 현상이 출현하여 이른바 '판매 위기'가 발생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공업과 농업 제품 간의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공산품이 필요하였지만, 그 가격이 너무 높아 살 수가 없었다. 제12차 당대회에서 공업과 농업 제품 간 협상가격차 해소를 요구하는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관철되지 않아 협상가격차는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는 농민들의 불만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불만도 점점 커졌다. 1923년 가을, 일부 기업들이 임금을 지급하지 못해 노동자들의 폭동과 파업이 발생했다.

 

*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ㅡ 공업생산물과 농업생산물 간의 가격 격차가 마치 가위가 벌어진 모양으로 확대되어 간다는 데서 붙여진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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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즉각 당내에 반영되었다. 과거 ‘노동자반대파’ 분자였던 미야스니코프(G. Miyasnikov)등은 새로이  ‘노동자진리파’를 조직했다. 그들은 당 기관에서 관료주의가 범람하고 노동자의 이익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며, 신경제정책은 노동자 대의에 대한 배신이며 일반 자본주의 관계의 부활이라면서 당의 현행 정책 변화를 요구했다.

 

당면한 엄중한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1923년 9월 23~25일에 소집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3개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협상가격차’위원회, 임금위원회, 당내 상황위원회였다. 제르진스키가 회의에서 보고를 했는데, 그는 당내에서 당 생활이 정체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임명제가 선거제를 대체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위험하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당의 정치지도력을 마비시킬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원회의는 제르진스키를 당내 상황위원회를 지도하도록 임명하고, 어떻게 당내제도를 개선할 것인지 구체적 방안에 대해 연구하도록 했다. 리코프로 하여금 ‘협상가격차’ 위원회를 지도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책임지고 강구하도록 했다. 전원회의는 또한 혁명군사위원회 확대 및 내실화 문제를 토론하고 스탈린, 보로실로프, 오르제니키제를 이 위원회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트로츠키는 혁명군사위원회 확대와 내실화 문제에 대해서 결연히 반대했다. 중앙위원회에 자신의 모든 직무와 직함을 해임하고, 그가 일반 병사 자격으로 독일 혁명에 투신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독일공산당은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도하고 있었으며, 혁명 승리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러시아공산당 중앙은 일찍이 여러차례 회의를 소집하고, 독일공산당의 투쟁을 직접 지도했다. 러시아공산당의 주요 지도자인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는 그동안 러시아혁명이 세계 각국 혁명의 지지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독일 혁명이 발발한 후,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 혁명에 커다란 희망을 걸었다. 

 

트로츠키가 회의에서 사임하고 독일에 가서 혁명에 참가하겠다고 하자, 지노비예프도 나서서 그에게 맞장구를 쳤다. 중앙위원회가 그의 모든 직무와 직함을 면제하고 트로츠키와 함께 독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스탈린이 일어나 정중하게 말했다. "중앙위원회는 이런 귀중한 생명이 둘씩이나 모험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레닌그라드 출신인 코마로프 중앙위원이 끼어들었다.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트로츠키 동지가 저렇듯 능청스럽게 연극을 하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결국 트로츠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나를 이 비열한 코미디언 목록(중앙위원회-주)에서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한다"라고 한 뒤, 펄쩍 뛰어 소매를 뿌리치며 항의의 표시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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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는  1920년대 중반까지 혁명적 정세가 나타났다

 

9월 전원회의 폐막 직후 트로츠키는 10월 8일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다. 당이 ‘관료화’되고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민주주의가 결핍하고 서기국 위계질서가 모든 것을 지휘한다고 비난했다. 당 업무에 대한 GPU(국가정치보안국)의 간섭에 항의하고, 특히 그는 혁명군사위원회를 개편할 이유가 없으며, 개편의 진짜 이유는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서한에서 국내 경제가 지금 극도로 악화되고 있고, 경제에 대한 리더십이 없으며, 혼란이 위에서 온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은 앞으로 나아갈 프로그램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산업에 대한 강력한 중앙 집중화"(일부 대형 공장의 폐쇄)와 "농민에 대한  압박정책"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밝혔다.

 

10월 11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어, 여기서 다음번 회의 때까지 트로츠키 편지를 배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10월 14일과 16일 카메네프가 주재한 모스크바위원회 상무국과 지노비예프가 주재한 페트로그라드위원회 상무국은 각각 회의를 개최하고 트로츠키 편지를 논의한 후 이에 대해 비판했다.

 

일주일이 지난 10월 15일, 당의 저명한 활동가 46명이 중앙정치국에 서한을 썼다. 이것이 유명한 <46인 성명>인데, 여기서 성명은 당내에 자유토론의 분위기가 결핍됐다고 비난했다. "당은 날로 서기라는 특권층과 ‘일반인’으로 분열되고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당내에는 이미 파벌독재가 형성되었고, "당은 잘 짜여진 관료기구로 대체됐다. 이 기구는 평상시에는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위기와 같은 고비의 순간에는 고장이 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심각한 사태 앞에서 전혀 그 업무를 신뢰할 수 없는 기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비판했다. ‘성명’은 또 당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처리하는 데 있어 매우 무능하다면서, ‘정치국 다수파’의 정책을 바꿀 것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 서명한 사람은 과거 ‘민주집중파’ 성원인 오신스키, 사프로노프,  노동조합문제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했던 프레오브라젠스키, 셀레브리아코프 등이 들어 있다. 또 피다코프, 스미르노프 (전 군사반대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 무라로프 (모스크바군구 사령관), 베로보로도프 (러시아연방 내무인민위원) 등도 서명했다. 어떤 사람은 서명할 때 ‘성명’에서 지적한 당면 정세를 조성한 원인에 관한 분석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은 그중에서 실질적인 건의에만 찬성한 채 서명했다. 이들은 통일된 사고와 통일된 조직을 가진 파벌 집단은 아니었다.

 

1923년 10월 25~27일,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주최 하에 모스크바에서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하르코프 등 10개의 가장 큰 당 조직 대표들이 참가한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전원회의는 트로츠키의 10월 8일 편지와 <46인 성명>에 관해 논의했다. 전원회의는 토론을 거쳐 <당내상황에 관하여>란 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는 트로츠키가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저질렀으며, “정치국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객관적으로 당의 단결을 위태롭게 하고 당에 위기를 초래하는 파벌적 성격"이라고 지적했다. <46인 성명>에 대해서는 "파벌 분열 정책의 한 단계이며, 이 성명에 서명한 사람의 본의가 어떻든 이 정책은 파벌적 성격을 띠고 있다."*라고 규정했다.

 

*  <소련공산당대표대회, 대표회의와 중앙전원회의 결의 집성>제2분권,  350쪽.

 

처음엔 큰 논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연석회의 결정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트로츠키의 편지와 <46인 성명>도 당내에서만 회람토록 했다. 하지만 11월 7일, 지노비예프가 갑자기 [프라우다]에 <당의 새로운 임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당내생활이 마치 죽은 물처럼 민주주의가 결핍하고 "거의 모든 중요한 문제가 위에서 결정된 후 내려온다."고 비판하였다.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일반 정치, 경제 및 기타 문제에 관한 당내의 자유 변론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라우다]는 이 글을 발표할 때 '편집자 주'를 달아 전체 당이 이글에서 제기한 문제에 관해 광범위한 변론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정치국 다수파가 어느 시점에서 대변론을 벌일지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11월 13일부터 [프라우다]는 정기적으로 당내 민주주의문제 논쟁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와 글들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트로츠키 옹호자의 글도 있고  반대자의 글도 있었다. 논쟁 쌍방은 모두 당내에서 형성된 국면이 일종의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인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호소했다. 12월 2일,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 적색플레스니아구 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당의 임무에 관하여>란 보고를 했다. 여기서 그는 당내생활의 결점, 당내의 논쟁 및 당내생활의 결점을 초래한 원인과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에 관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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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다

 

논쟁은 한 달가량 지속되었다. 12월 5일, 러시아공산당은 중앙정치국과 중앙감찰위원회 주석단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스탈린, 트로츠키, 카메네프가 공동으로 작성한 <당 건설에 관하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결의안은 "파벌이 생기지 않도록 당의 지도기관이 당내 광범한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각종 비판을 파벌의 발현으로 간주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실하고 규율성이 강한 당원을 침묵과 파벌의 길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당원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의 범위 내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문제를 토론하고 결론을 내릴 때는 '당의 규율'을 남용하여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결의안은 또한 당내 민주주의 실현을 보장키 위해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서 하부기구를 자주 쇄신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능력 있는 간부들을 지도직에 발탁"할 것을 제안했다. (메드베데프, <역사를 심판하라>, 64쪽)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관한 논쟁은 여기서 일단락된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2월 8일, 트로츠키는 적색플레스니아구 당 조직 회의에서 <당 회의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다른 당 조직에 배포했다. 이어 그는 당 기관지에 <새로운 방침>을 총 제목으로 삼아 <소집단과 파벌조직의 형성>, <당내 신구 두세대에 관한 문제>,<당의 사회적 성분>,<관료주의와 혁명>,<농민을 ‘과소평가’하는 문제> 등의 일련의 글을 연달아서 발표했다. 이 글들은 1924년 1월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새로운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트로츠키는 관료주의가 이미 ‘보편적 현상’이 되어 당의 통일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그것은  파벌 집단이 생겨난 원인 중의 하나이기에, 노동자 민주주의 방침을 발양 해야만 파벌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정) 당 기관이 당 위에 군림하여 당 대신 문제를 고민하고 결정을 하는 만큼 '기관 혁신'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트로츠키는 그밖의 신구 두 세대간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청년은 당의 가장 확실한 믿을 수 있는 척도이며, 당의 관료주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당내 민주주의 범위 내에서 자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야만 고참 근위대(노혁명가-주)라는 혁명적 요소를 간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성세대는 경직되어 자신도 모르게 관료주의의 가장 완벽한 구현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현재의 고참 근위대(노혁명가)가 이미 변질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 '고참 근위대'의 변질은 역사상 한두 번이 아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와 정당이라는 최근의 가장 뚜렷한 역사적 실례를 들자면, 우리는 윌리엄 리프크네히트, 베벨, 싱거(Singer), 빅토르 아들러(Victor Adler), 카우츠키, 라파르그(Lafargue), 게드(Guesde) 등이 모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직접 가르친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지도자들ㅡ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은 완전하게ㅡ이  변질되었다. 모두 의회 개혁과 당과 노조 기관이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기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 이상  <트로츠키연구>, 삼련서점 1979년판, 416-465쪽 참조.

 

트로츠키의 <새로운 방침>이 발표된 후 당내에서는 더욱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할린 및 기타 일부 사람들은 잇달아 담화와 전문을 발표하여 <새로운 방침> 관점에 비판을 제기하고 트로츠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탈린도 12월 15일 [프라우다]지에 글을 올려 트로츠키 견해에 혹평을 가했다. '고참 근위대'의 변질에 관한 그의 논문의 목적은 "중앙의 대다수, 즉 볼셰비키 고참 근위대 지도 핵심의 위신을 파괴하는 것"이며, 당의 이익에 이익이 되지 않고 반대파에게만 유리할 뿐이라고 말했다. 트로츠키가 "우리 당의 이 두 기본 대오 사이에 균열을 만들어 확대하려는 것"이며, 고참 근위대와 청년들을 대립시키고, "당의 통일을 흔들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히 여기에는 꿍꿍이 속셈이 있다. 그것은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외교적 수완으로 반대파 야당의 중앙을 지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탈린전집> 5권, 313-315쪽 참조)

 

12월 18일, 트로츠키는 [프라우다]에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거기에서 "최근 [프라우다]에 발표된 일부 논문에 대해 나는 응답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이 당의 이익에 더욱 부합되며,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방침에 관한 논쟁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날 [프라우다]는 정치국의 <당내 투쟁을 첨예화하는 데 반대한다>라는 결정을 발표했다. 당시 떠돌던 트로츠키에 대한 (여러사람의) 반박이 그와 지도기관에서 함께 협력하고 일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가능한 모든 것을 다해서 이후 융합 작업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923년 12월 28일부터 1924년 1월 4일까지 [프라우다]는 트로츠키가 당내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에서 레닌주의에서 이탈했다고 비난하는 사설인 <파벌 활동을 타도하자>(부하린이 기초)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때부터 논쟁은 트로츠키에 대한 정치국원 다수의 일방적인 비판으로 바뀌었다.

 

트로츠키파의 언행을 규탄하는 회의도 곳곳에서 열렸다.


1924년 1월 16-18일,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대회가 소집되었다. 스탈린이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회의에서 <당 건설의 현재 임무에 관해>라는 보고를 할 때 트로츠키가 범한 잘못을 사례로 들었다.  트로츠키는 당의 기관과 당, 청년과 당 간부를 대립시켰다. 그들이 “그룹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파벌 활동을 하는 것이고, 그룹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은 곧 파벌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당의 와해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벌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스탈린은 10차 당대회 때 통과시킨 바 있는 당의 통일에 관한 결의 중 당시 기밀에 부쳐졌던 제7조에 대해 공개한다고 선포했다. 이 조항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당내와 전체 소비에트 사업에서 엄격한 규율을 집행하며, 모든 파벌 활동을 단속하고 최고의 통일을 획득하기 위해 당대회는 중앙위원회에 다음 권한을 위임한다. 만약 규율을 위반하거나 파벌 활동을 회복하거나 허용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당에서 제명까지 포함한 당내 모든 처분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중앙위원에 대해서는 그를 후보 중앙위원으로 강등시키고, 심지어는 비상조치를 취해 그를 당에서 제명할 수 있다. 무릇 중앙위원과 후보중앙위원, 중앙감찰위원이 이런 비상조치를 취할 경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후보중앙위원 전원과 중앙감찰위원 전원을 참석시켜야 한다. 이런 당내 최고지도자 전원회의에서 3분의 2 이상이 어떤 중앙위원을 후보 중앙위원으로 강등시키거나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판단할  경우 이 조치는 즉각 집행돼야 한다."*

* 이상 < 스탈린 전집> 6권 7-24쪽 참조; <소련공산당대표대회, 대표회의와 중앙전원회의 결의 집성> 제2분권 65-66쪽.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트로츠키를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 제안은 대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회는 스탈린의 보고에 기초하여 <논쟁 총화와 당내 뿌띠부르주아계급 경향에 관하여>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반대파가 "볼셰비즘을 수정하려고 시도할 뿐 아니라 공공연히 레닌주의를 위배하고, 아주 뚜렷한 뿌띠부르주아계급 경향을 갖고 있다", "뿌띠부르주아계급이 프롤레타리아계급정당의 입장과 정책에 대한 진격을 객관적으로 반영한다"라고 비판했다. (<소련공산당대표대회, 대표회의와 중앙전원회의 결의 집성> 제2분권 367쪽 참조)

 

당내의 이 같은 분열은 레닌이 바로 만년에 걱정했던 바이다. 그는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에서 스탈린과 트로츠키 간의 충돌이 당 분열이라는 위험을 가져다줄 것이라 걱정했다. 레닌은 그들이 마찰과 충돌 없이 협력하여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레닌의 이 같은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당내 투쟁에 직면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많은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는 이미 마음은 있어도 힘이 부족했다. 10월 18일, 당내 투쟁의 불길이 타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레닌은 의사의 금지령을 어기고 자동차를 타고 자신이 휴양하고 있던 고르크에서 크렘린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는 크렘린궁에  소재한 자신의 도서관에서 헤겔과 플레하노프의 책 몇 권을 골랐다. 그 후 다시 그가 익숙한 인민위원회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동지들과 만남도 없이 저녁 7시에 말없이 크렘린궁을 떠나서 고르크로 돌아왔다. 떠날 무렵 그는 마지막으로 수도에 작별을 고하듯 크렘린궁의 광장과 대성당, 모스크바 거리, 농업전시관을 둘러봤다. 분명 당내 논쟁이 결국 당의 완전한 분열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르크로 돌아온 후, 그는 종종 신문을 훑어보고 당내 논쟁에 관한 문서를 읽었다. 제13차 당대회가 개최될 때 크루프스카야가 그에게 회의의 진전 상황에 대한 기사를 읽어주었다. 1월 19일과 20일,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에게 회의에서 통과된 결의를 읽어주었다. 결의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회의에서 반대파 문제에 관한 토론이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레닌은 그 말을 듣고 흥분해서 불안해하였다. 의사는 레닌이 흥분해선 안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건강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당부한 바 있다. 보아하니 이번의 흥분은 정말 그의 병세를 가중시킨 듯 했다.  1월 20일 레닌은 몸이 불편해 아침도 먹지 않고, 산책도 나가지 않았다. 21일 오후 5시 30분,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호흡이 끊기고 점차 의식을 잃어갔다. 저녁 6시 50분 레닌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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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레닌은 크루프스카야와 함께 있었다

 

레닌이 임종할 무렵 트로츠키는 아내 나탈리아와 비서 세르무크스와 함께 코카서스 흑해 해변도시인 수후미로 휴양을 가는 중이었다. 1월 21일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같은 날 트로츠키에게 전보를 쳤다.

 

“트로츠키 동지에게 고함. 1월 21일 6시 50분, 레닌 동지가 갑자기 사망했음. 원인은 호흡중추 마비로 인한 것임. 스탈린." 


트로츠키는 막 트빌리시 역에 도착했을 때 전보를 받았다. 즉각 크렘린궁에 직통 전화를 걸어 장례식이 언제 열릴지를 물었다. 스탈린은 "장례식은 토요일(1/26)에 열릴 것이다. 당신은 제 시간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 정치국은 당신의 건강 때문에 수후미로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답변했다. 

 

실제로 장례식은 1월 27일(일요일)에 치러졌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중앙위원회가 자신을 속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토요일 (1월 26일)이라고 할지라도 기차나 군용기를 타고 레닌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시간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통한 심정으로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위해 장례를 치를 때, 그는 햇빛이 화사한 코카서스에서 휴양을 보냈다. 그는 1월 22일에만 레닌을 애도하는 글을 써 전용선을 통해 모스크바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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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각계 인사가 레닌의 유해를 참배하는 모습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할린, 칼리닌, 톰스키 등은 1월 21일 저녁 고르크에 도착해서 레닌의 영정에 참배했다. 그후 그들은 크렘린궁으로 돌아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긴급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회의에서 <전당과 전체 근로 인민에게 고하는 글>을 통과시켜 레닌의 위대한 공적을 평가했다. 또 전원회의는 레닌이 정부기관에서 맡았던 중요한 직무를 누가 계승할 것인지에 관해 토론했다. 토론을 거쳐서 리코프를 인민위원회 주석, 카메네프를 노동국방위원회 주석으로 추천키로 결정했다.

 

1월 26일, 전소비에트 제2차 대회가 개막되었다. 먼저 칼리닌이 발언한 뒤, 크루프스카야와 지노비예프가 발언했다. 스탈린은 네 번째 연설을 했다. 그는 회의에서 <레닌을 애도함> 이란 제목으로, 맹세 형식으로 레닌의 ‘유언’을  집행할 것을  선서했다. 부하린, 카메네프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회의에서 연설 했다. 회의는 스탈린의 제의에 따라 레닌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결정을 하고,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를 지어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도록 했다. 회의는 또한 <레닌 선집>과 <레닌 전집> 출판, 페트로그라드를 레닌그라드로 변경, 레닌 기념비 건립 등 레닌을 영구적으로 기념하는 몇 가지 결정을 통과시켰다. 1월 27일에는 붉은 광장에서 레닌을 추모하는 추모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오후 4시,  소련 전국이 모든 활동을 5분간 중지하고 애도와 기적, 예포 소리 가 울리는 가운데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리코프 등 러시아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들이 레닌의 영구(靈柩)를 능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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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레닌을 애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1924년)


이때부터 소련 역사는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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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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