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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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계단씩 오르다

 

레닌이 죽은 후 소련당과 인민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레닌을 기념하기 위해 1924년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주재로 전원회의를 열고, <산업노동자 입당에 관하여> 라는 특별결의를 채택했다.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산업노동자 입당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그 완료 시한을 3개월로 정했다. 2월부터 5월까지 기존 당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24만여 명의 산업노동자가 새로 당으로 흡수됐다.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운동의 이유로 지난해 말 당내에서의 논쟁 때 반대파가 대학과 군대에서 더 많은 지지층을 갖고 있어, 그들의 존재는 당에 매우 위험하다고 간주했다. 다른 한편, 새로운 부르주아지계층(농촌의 쿨락, 도시의 네프만*)의 정치적 활동이 증가함과 함께, 당이 소부르주아적 정서에 침식되었기 때문에 이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소부르주아 정서에 대항하고 반대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산업노동자를 대거 당에 흡수해서 당의 대열을 강화하고 당의 성분을 개선해야 한다고 보았다.

 

* 네프만(нэпмaн)ㅡ 일반적으로 신경제정책 하에서 성장한 자본가계급 분자를 가르킨다.

 

대학 특히 군대에서 반대파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24년 1월 셰이크 구세프가 이끄는 붉은군대의 지위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에는 프룬제, 보로실로프, 오르드조니키제, 안드레프, 부브노프, 빈슐리히트 및 슈베르니크가 참석했다.  위원회는 곧  "트로츠키가 이끄는 혁명군사위원회와 육해군 인민위원부의 무장력에 대한 지도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군대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2월 초,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위원회의 보고를 받았다. 스탈린은 이 보고서에 대해서  발언하면서, 붉은 군대의 현재 상황은 전투력이 없기 때문에 군사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3월 초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의 측근이자 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스콜랴스키를 해임하고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군 사령관, 우크라이나 주재 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 전권대표인 푸롱지(Fulongzhi)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는 노농 적군 참모장과 사관학교 학장을 겸임했다.

 

스콜랴스키는 해임되고, 푸롱지가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이로 인해 트로츠키의 군사분야에서의 권력이 크게 제한되었으먀,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정치적 지위는 점차 감소했다. 이점은 13차 당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 대회는 1924년 5월 23일부터 3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며칠 전인 5월 18일,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의 <대회에 보내는 편지>를 포함한 일련의 메모를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들 문서를 전달하는 기록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12월 23일부터 1월 23일까지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병중에서 구술한 메모 총 13개를 전달합니다.  민족문제에 대한 메모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현재 마리아 일리니치나에게 있음).
이러한 메모 중 일부는 이미 게시되었습니다(노농감찰원에 관한 부분, 수하노프에 대한 평가). 미발표 메모 중에는 1922년 12월 24ㅡ25일과 1923년 1월 4일의 구술 노트가 있으며, 여기에는 특정 중앙위원회 위원에 대한 개인적 평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이 죽은 후 이 메모가 다음 당대회에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크루프스카야 (<레닌전집> 2판 43권 ,558쪽)

 

스탈린의 비서 바제노프에 따르면, 또 다른 비서 메클리스가 레닌의 유언 내용을 스탈린에게 알리자 스탈린은 크루프스카야를 저주하며 서둘러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찾아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레닌의 병이 심각해서 일을 처리할 수 없게 된 후 중앙정부의 중요한 결정은 사실상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세 사람이 결정했다. 일반적으로 정식회의 전에 세 사람이 모여 먼저 회의를 했다. 처음에는 지노비예프의 집에서, 나중에는 중앙위원회 스탈린 집무실에서 자주 만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들 세 사람은 함께 방법을 연구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유언'이 당내에서 스탈린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스탈린에 대해 걱정할 것이 없다고 간주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스탈린이 당의 총서기 자리를 유지하는데 동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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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두 마차

 

대회 이틀 전인 5월 21일, 러시아공산당은 긴급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카메네프가 회의를 주재하고 레닌의 편지를 낭독했으며, 이어서 지노비예프가 발언했다. 


 “일리치의 유지, 일리치의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에게 있어서 법이다. 우리 모두는 일리치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의 유언을 실천할 것을 맹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맹세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운좋게도 이 점에서는 일리치의 걱정이 입증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최근 몇 달 동안 공동으로 진행해온 작업의 산증인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저와 마찬가지로 일리치가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만족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총서기와 중앙위원회가 분열될 위험에 대한 (레닌의-주)우려는 발생하지 않았다." (<스탈린 비서 회고록>  108쪽.)


카메네프는 즉시 지노비예프의 의견에 동의했다. 트로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만하고 무시하는 표정으로 회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모두 잠자코 있었는데, 카메네프가 표결을 통해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그는 "스탈린의 중앙위원회 총서기 유임에 찬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손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결과는 찬성 30표, 반대 10표, 기권 10표였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트로츠키, 파타코프, 라덱이었으며 다른 몇몇은 기권했다.

 

전원회의는 레닌 문서접수위원회의 보고를 들은 후 다음과 같이 결정을 내렸다.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뜻에 따라 낭독 문서는 대표단이 별도로 낭독할 수 있도록 대회에 전달돼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복제될 수 없으며, 일리치 문서접수위원회의 위원들은 그것을 대표단에게 읽어줄 책임이 있다." (<레닌전집> 2판 43권, 558쪽)


이렇게 하여 레닌의 편지는 공개도, 당대회에 전달되지도 않았다. 5월 23일, 당의 제13차 대표자대회가 개막되었다. 이것은 레닌이 서거한 후 열린 첫 번째 당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73만 5,881명의 당원(신입 당원 24만 1,591명 포함)을 대표하는 748명의 의결권 대의원과 416명의 발언권 대의원이 참석했다. 총회의 주요 의제는 중앙위원회의 결산보고서(지노비예프), 중앙위원회의 조직보고서(스탈린), 중앙감사위원회의 결산보고서(쿠르스키), 중앙감독위원회의 결산보고서(쿠비셰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산보고서(부할린), 국내 상업 및 협동조합(카메네프, 크르자노프, 안드레예프), 농촌사업(칼리닌, 크루프스카야), 당 조직문제(몰로토프) 등이었다. 트로츠키는 어떤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며 그저 평범한 대표일 뿐이었다.

 

지노비예프는 총회에서 먼저 중앙위원회에 대한 요약 보고를 했다. 그는 당이 신경제정책(NEP)을 시행한 이래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신생 부르주아계급이 성장 발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 '신생' 부르주아계급의 존재는 사실이며 우리는 신경제정책과 함께 오는 정치적 현실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노비예프는 신생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당의 정책을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고 그 발전 추세에 주의를 기울이고 더 이상 양보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지노비예프는 당내 상황을 언급하면서 트로츠키와 반대파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논쟁시 중앙위 다수파에 대한 반대파의 비난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대회(속기록)>, 8~112쪽 참조)


이어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의 조직 보고를 했다.  레닌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추진된 당원 흡수 운동을 열거하고, 당의 일상적인 조직 사업에 관해 보고한 뒤 그는 이제 당이 논쟁 끝에 반석처럼 굳어졌으며, 당의 무게중심은 정치국과 조직국에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전원회의는 “노동계급의 지도자, 즉 노동계급의 정치지도자를 양성하는 가장 큰 학교로 변모했다. 새로운 인재, 내일의 노동자계급의 지도자가 우리 눈앞에서 성장하고 있다", 따라서 "반대파가 논쟁하는 과정에서 당이 와해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전집>6권, 169~193쪽)

 

대회는 제13차 대표회의에서 채택된 <논쟁 총결산 및 당내 소부르주아 경향에 관하여> 결의안을 승인했다. 회의에서 새로운 논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반대파 지도자인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진스키(Preobrazhensky) 등은 위 결의안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견해를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프레오브라진스키는 연설에서 당 중앙위원회가 반대파에 대해 레닌식으로 대하지 않았다며 <논쟁 총결산 및 당내 소부르주아 경향에 관하여> 결의안의 재검토와 취소를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관점을 거듭 강조했는데, 그것은 '소농경제는 필연적으로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향해 발전한다'는 것이다.  1923년에 나타난 판매위기의 원인은 경제에 있어 무계획성이다. 따라서 전체 국민경제를 통일된 전체로서 관리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해야 한다. 계획 원칙에 입각해 소자산계급의 자발적 세력과 투쟁하고, 신경제정책 시기에 새로 탄생한 자본가계급과 투쟁하여야 한다. 외부에서 직접세의 징수를 통해 농산물을 강제로 취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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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오브라진스키(1886_1937)

 

프레오브라진스키는 소비에트가 자본을 축적하고 소농경제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전에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 시기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관점은 바로 그의 유명한 ‘사회주의 원시축적’ 이론이다. 얼마 후에 그는 <공산주의과학원학보> 1924년 제8호에 <사회주의 원시축적 법칙> 이라는 글 (1926년에 또 이 글을 독립된 한 장으로 해서 그의 <신경제학> 책에 수록했다.)을 발표하여 이 이론을 진일보 발전시켰다. 그는 러시아와 같이 생산력이 낙후되고 소농경제가 우세한 국가는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자금축적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그때문에 노동자계급이 정권을 취득한 후에는 반드시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과 비슷한 사회주의의 원시적 축적 시기를 거쳐야 하며, 이 시기의 주요 임무는 소농에 대한 수탈을 통해서 공업화를 위한 자금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가 낙후할수록 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노동자계급이 사회혁명 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축적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는 유산은 더욱 적어진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는 소농으로부터 자본주의일때보다 일시적으로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기에 국가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사용하여 부등가교환의 기초에서 비국영 성분을 일정 희생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농민에 대한 수탈을 통해 원시적 축적을 달성함으로써 사회주의 생산을 위한 물질적 전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프레오브라임스키는 공산품 가격과 철도 운임을 높이고 농산물 가격을 낮추는 '부등가교환'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에 대한 고금리 대출, 지폐의 대량 발행을 통한 통화팽창을 통해서 국가공업을 일으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고, 공업화의 속도를 다그칠 것을 주장했다.(프레오브라진스키의 <신경제학>, 삼련서점 1984년판, 34~100쪽 참조)

 

트로츠키는 회의 발언시 말투가 이전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그는 회의에서 채택한 소부르주아 경향에 대한 대회 결의안의 “어떤 부분은 부정확하며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1923년 12월 5일 당 중앙정치국의 결의를 다시 거론하고, "당 기관의 관료주의화와 그로 인해 발전한 당의 대중 이탈 위험을 피해야 한다"면서, 단순히 파벌과 집단을 금지하는 방법만이 아닌 당내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파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 여러분, 우리 중 누구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당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당은 영원히 정확하다. 왜냐하면 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위해 그 기본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역사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당 앞에서 이 모든 비판, 모든 성명, 경고, 항의, 그리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동지 여러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나는 반대파가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과 함께 있고 당에 의지하는 것만이 옳다. 왜냐하면 역사는 정의를 실현하는 다른 길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대회(속기록)>, 261~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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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제13차 당대회에서 발언하는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이 말은 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과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는 의향을 표시했지만, 그는 또 다른 극단으로 옮겨가 당이 영원히 옳다고 말했다. 그의 이 같은 논조에 대해 스탈린은 일침을 가했다.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조직보고에 관한 결론 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로츠키는 당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당은 종종 실수를 범한다......당이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면 당을 교육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임무는 이러한 실수를 발견하고, 실수의 근원을 폭로하면서, 당과 노동자계급에게 우리가 어떻게 실수를 저질렀는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이런 실수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스탈린전집>6권,200쪽)

 

크루프스카야는 발언에서 당내에서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을 보류하며 단결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점은 삶의 새로운 과제에 착안해 모든 것을 논의하는 것이기에, 과거의 그런 논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당은 전반적인 측면과 개별 문제에 대해서 누가 옳고  그른지 분명히 했다. 여기 당대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반대파와 당의 핵심 사이의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한다. 나는 지노비예프 동지가 부적절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생각한다....그들이 반대파에게 도전하여, 그들에게 이 연단에서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호소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이런 태도를 취하면서 '이 강단에서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반대파는 함께 일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성명은 트로츠키 동지의 발언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는 파벌이든 집단이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반대파가 앞으로 완전히 한마음으로 당과 보조를 맞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필요한 성명이다.(<러시아공산당 제13차 당대회(속기록)>, 261~262쪽)

 

그러나 회의 참석자들은 그녀의 연설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 정치보고에 대한 총화 발언을 할 때 여전히 트로츠키가 그의 속마음을  완전히 밝히지 않았다고 하면서, 트로츠키의 발언을 ‘의회식’ 연설이라고 비꼬았다. 그는 "의회식 발언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말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전부가 아니거나, 심지어는 전혀 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둘째, 항상 '의회'에서 발언하는 합법적인 기회를 이용해 '창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유권자들에게 들려주려 한다. 트로츠키 동지의 발언은 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위 속기록, 297쪽)

 

이번 당대회는 또한 중앙위원회를 40명에서 53명으로, 후보 중앙위원을 17명에서 34명으로 확대했다. 새로 선출된 사람들은 주로 성(省) 기관의 간부 출신이었다. 트로츠키는 여전히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지지자인 라딕 등은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당대회 직후인 6월 2일 열린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구두 성명을 내고 자신의 총서기직 해임을 요구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고인이 된 지도자(주-레닌)의 비판적 견해와 그의 바램만 염두에 두면 된다면서, 성명을 철회하라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정치국원, 조직국원, 서기처의 서기장으로 다시 선출됐다. 부하린은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위원으로, 트로츠키는 정치국원에 선출됐다.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자신이 고립되었음을 느끼고 단 한 차례만 발언했다. 어조도 과거보다 훨씬 완만해졌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이 그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런 침묵은 너무 짧았으며, 곧 트로츠키에 대한 당내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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