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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4.01.24
마오쩌동과 6.25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큰 아들 모안녕.png
마오쩌동과 6.25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그의 큰 아들 모안녕(毛岸英)

 

9월 15일. 유엔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조선인민군은 포위되고 만다. 

 

이승만은 평양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호언(豪言)한다. 

 

그러나 38선은 미국과 소련 진영을 가르는 엄연한 분계선이었다. 만일 미국이 38선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에 대한 도전만이 아닌 소련과 중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중대한 도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9월 30일 인민일보에 “미국은 조선의 정세를 구실로 해공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대만성을 침략하였으며, 소위 대만의 지위 문제는 미국이 조정하는 유엔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또한 조선에서 파견된 미 공군이 수차례에 걸쳐 아국의 요녕성 상공에 침입하여 사격과 폭격을 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군이 중국의 상선을 포격하게 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난폭한 제국주의 침략행위로 자기들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다.”라고 단호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군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맥아더는 9월 30일 전군에게 38선을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진공을 개시한다.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중순에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온다.

 

중국으로서는 사실상 38선은 중국이 출병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결정하는 마지노선이었다.

 

38선을 넘는 미군.png
38선을  넘는 미군

 

ㅡ 마오쩌둥, 미 제국의 공격에 맞서 조선인민해방전쟁에 참전하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한국학술정보(주), 2008)에서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8일 북경에서 펑더화이(彭德懷)에게 전보로 출병 명령을 한다. 

 

“팽덕회, 고강, 하진년, 등화, 홍학지, 해패연 동지 및 중국인민지원군 각급 지휘관 귀하

1. 조선인민해방전쟁을 돕고 미제국주의의 공격에 맞서 조선인민, 중국인민과 동방 각국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명령한다. 신속히 조선국경 내로 출동해 조선 동지들과 함께 침략자들에 맞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라. (중략) 3. 팽덕회 동지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겸 정치원으로 임명한다. (중략)

 

5.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국경에 들어가 조선인민, 조선인민군, 조선노동당(공산당), 기타 민주당파와 조선인민의 영도자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중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 아울러 군사기율과 정치규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이것은 군사적인 임무를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초인 셈이다. 6.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어려운 사정을 면밀하게 고려하라. 뜨거운 정열, 용기, 세심함과 감투정신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라. 지금 전반적인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반면 침략자들에게는 불리하다. 동지들이 용감하게 현지의 인민들과 힘을 합쳐 침략자들을 무찌른다면 최후의 승리는 바로 우리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10월 하순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 가정과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 保家衛國)‘라는 구호로 항미원조지원군(지원군)을 편성하여 압록강을 건너 참전한다.

 

마오쩌둥의 출병 결정은 중국인민해방전쟁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는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지원과 상호협력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 또한 항미원조운동을 시작한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북한(조선)을 돕자는 항미원조운동이 전개되면서 인민들이 하나로 단결했다. 1950년 10월까지 전체인구의 47퍼센트에 달하는 2억 2,379명이 세계평화와 미국의 침략 반대 서명에 참여했다.”『중국현대사』(책과 함께, 2021)

 

항미원조를 지원하기 위해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 노동자들.png
'항미원조'를  위해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 노동자들

 

항미원조 전쟁을 『모택동 전집』과 홍학지의 전쟁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을 통해 전술과 작전을 요약하면 5차례에 걸친 전역과 작전 수칙 그리고 제2 전선(빨치산) 활용으로 나눌 수 있다.

 

5차례에 걸친 전역은 제1차 전역(1950년 10월 25일~11월 5일까지 11일간), 제2차 전역(11월 25일~12월 24일까지 약 1개월간), 제3차 전역(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까지 10일간), 제4차 전역(1951년 1월 12일~4월 21일까지 87일간), 제5차 전역(1단계 1951년 4월 22일~30일까지 9일간, 2단계 1951년 5월 16일~22일까지 6일간)으로 구분한다.

 

ㅡ 펑더화이, 5차례에 걸친 전역에서 항미원조지원군을 지휘하다.

 

마오쩌둥은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격파하기 위해 중국인민해방군 최정예 부대인 제4야전군 소속 38, 39, 40군을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1950년 10월 25일 지원군 제40군이 평안북도 운산군 온정지구에서 국방군(대한민국 국군)과 전투를 개시함으로써 항미원조 전쟁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지원군의 11월 5일 제1차 전역은 예정되지 않은 조우전이었으나, 승리로 조선 북부 지역의 전세를 안정시켰다. 미군은 비로소 중국의 개입을 확인하고 서둘러 청천강 선으로 후퇴했다.

 

그리고 지원군은 제2차 전역에서 정확한 전술로 유엔군 3만 6천여 명의 병력과 특히 미군 2만 4천여 명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양양을 제외한 38선 이북의 모든 영토와 38선 이남의 옹진, 연안 두 반도를 되찾았다. 이 전역으로 조선인민군이 잃은 대부분 지역을 회복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의 ‘성탄절 총공세’를 ‘성탄절 총퇴각’으로 만들었다. 이 전역은 항미원조 전쟁에서 승리의 기초를 놓았다.

 

제2차 전역의 상황도(중국측 자료). 이 전역에서 유엔군 3.6천여명을 섬멸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png
제2차 전역 상황도(중국측 자료). 이 전역에서 유엔군 3.6천여명을 섬멸하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눈속에서 매복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png
눈속에서 매복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그러나 제2차 전역 첫날 11월 25일 참전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미 공군기의 네이팜탄으로 전사한다. 마오는 전과 보고를 위해 일시 귀국한 펑더화이에게 “많은 희생자들 중의 하나다. 피로 맺은 조선과의 영원한 우호 관계를 위해 그의 시신을 환국시키지 말라.”라고 일렀다 한다. 현재 마오안잉은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제2차 전역에서의 승리와 성공은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지원군은 일부러 약하게 보이게 하면서, 적을 방치하고 교만하게 하여 깊이 유인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12월 16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국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미군을 당시 2백 50만 명에서 3백 50만 명으로, 1년 이내에 비행기 탱크 생산능력을 각각 4, 5배 늘리겠다고 천명했다.

 

미군은 전장에서 38선까지 물러났으나, 더 이상 물러나지는 않았다.

 

미군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백 50킬로의 정면과 폭 60킬로에 이르는 두 갈래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1방어선(또는 A선)은 임진강 어귀 대동리에서 시작해 문산, 주월리를 거쳐 38선 부근의 장존리(강원도 양양)에 이르는 선이었고, 제2방어선(또는 B선)은 고양에서부터 의정부, 가평, 춘천을 거쳐 동덕리(강원도 강릉시)를 연결하는 선을 만들었다.

 

1951년 1월 5일의 전선 상황.png
1951년 1월 의 전선 상황

 

지원군은 2차 전역 승리 뒤 승리한 기세로 추격을 거듭했다. 1950년 12월 30일 저녁을 이용하여 일거에 38도선을 돌파하는 3차 전역을 전개한다. 그리고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한강을 건넜다. 인천항을 빼앗고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내쫓았다.

 

그리고 지원군은 3갈래 기동방어선을 구축한다. 첫 번째는 한강을 따라 양평, 횡성을 거쳐 강릉에 이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원에서 이천, 여주, 평창을 거쳐 삼척으로, 세 번째는 37도선을 따라 평택에서 충주를 거쳐 삼척에 이르는 것이었다.

 

ㅡ 마오쩌둥, 항미원조 전쟁에 작전 수칙 등으로 인민전쟁 전술을 사용하다.

 

1, 2차 전역을 끝낸 지원군은 1950년 12월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조선에서 지켜야 할 작전 수칙을 예하 부대에 하달하고 지원군을 교양했다.

 

⑴ 정책 기율 수칙

 

① 조선인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산 하나, 물 한 방울도 아끼고 보호한다. ② 북조선의 정책법령을 준수한다. ③ 조선 인민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한다. ④ 학교, 문화, 교육기관, 명승고적을 보호한다. ⑤ 공장과 모든 공공 건축물을 보호한다. ⑥ 사사로이 민가에 들어가지 않고 인민의 것은 한 가지도 들고나오지 않는다. ⑦ 법을 지키는 한 교당, 사원 종교단체는 간섭, 침입하지 않는다. ⑧ 독자적으로 교섭하지 않고 편의에 따라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지 않는다. ⑨ 3대 기율과 8항 주의를 엄격히 집행한다. (참조 : 지춘란(4), 의료 요원으로 적군과 아군 차별 없이 간호하다.)

 

⑵ 단결 수칙

 

① 우리 당, 정, 군, 민과 긴밀히 단결, 제국주의 침략군을 소멸시킨다. ② 조선 인민의 영수 김일성 장군의 지도를 존중한다. ③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존중한다. ④ 조선정부의 각급단위의 지도를 존중한다. ⑤ 조선 인민을 애호하고 우방의 당, 정, 군, 민의 전체 활동인원을 존중한다. ⑥ 조선인민군의 각종 경험과 우수한 전투기(사례) 등을 겸허히 학습한다. ⑦ 오만함, 야만스러움, 불합리함을 반대하고 정성스럽고 온화, 겸허하며 예절이 주도면밀해야 한다. ⑧ 조선인민군의 부상병, 병자 및 기타 연계를 잃어버린 인원은 구호하고 초대하여 원래 소속 부대로 편히 보낸다. ⑨ 적극적으로 배합 작전하고 포로나 전리품을 다투지 않는다.

 

이러한 작전 수칙은 마오쩌둥의 항일전쟁과 중국인민해방전쟁에서 축적한 경험을 보강한 것이다. 마오가 항상 강조한 당·군과 농민이 물과 물고기처럼 밀착해야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수어(水魚)이론'이자 ‘인민전쟁론’이다. 

 

항미원조를 지지하는 중국 인민.png
항미원조를 지지하는 중국 인민들

 

지원군에 대해 6·25전쟁 시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 문화선전성에 소속된 비전향장기수 신현칠(1917~2012)은 “우리 전쟁 때 북녘땅에서 모택동이 지도한 인민해방군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전당, 전 인민을 지도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인민의 군대 인민을 해방시킨 군대라는 것이 그 모든 병사에게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라고 필자에게 과거 쓴 메모를 보여주었다.

 

ㅡ 조·중지도부 김일성 수상과 펑더화이 사령관과의 제2전선 구축

 

펑더화이 사령관은 참전 후, 완전 전쟁 승리를 위해 제2전선 후방부대를 병행 활용한다.

 

1950년 11월 13일, 펑더화이는 항미원조 제1차 전역을 총결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1차 당위원회에서 조선인민군에 대해서는 UN군 배후에 침투하여 제2전선을 구성하여 UN군의 후방 병참선을 교란함으로써 전체 작전에 기여하여야 한다고 발표한다.

 

"우리들은 현재 적 후방을 정찰하고 적의 병참선을 공격할 항공정찰 수단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조직적인 유격전을 시행하여 적 후방의 운수와 교통을 습격·파괴하고,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며, 적정을 정찰함으로써 직접 배합작전을 시행해야 한다. (중략) 각군은 현 정찰조직을 활용하여 인민군 부대와 지방공작인원과 함께 적 후방에 들어가 활동한다면 그 작용은 매우 클 것이다.

 

남조선 후방에 들어가 적후보장 유격활동을 하는 것은 중대한 전략적 의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적의 점령지역을 축소하고 아측의 점령지역을 확대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자기의 인력과 물력(物力)을 확립하고 자기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다. 적의 인력과 물력을 쇠약하게 만듦으로써 전략상 적의 병력을 분산하고 주전장(主戰場)과 배합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다. 현재 조선 전황을 보건대 남조선에서 유격전쟁을 전개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며 인민군은 적 배후에서 그러한 역량을 갖고 있다." (「彭德懷軍事文選」)

 

여기에 김일성 수상도 11월 17일 제2군단장 최현에게 제2전선 유격 활동 등 차후 작전 방침을 설명하고 임무를 주었다.

 

"앞으로 진행할 작전에서 우리는 주타격방향을 전선서부에 두고 전반적 전선에서 반공격으로 넘어가며 주력부대들과 적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2전선부대들과의 배합작전을 적극 벌려 적의 기본집단들을 청천강, 장진호반, 함흥, 청진일대에서 포위소멸하고 공화국북반부의 전지역을 적의 강점으로부터 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 성과를 38선 이남으로 계속 확대하여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촉진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작전적방침입니다." (「김일성전집」제12권)

 

김일성과 팽더화이.png
김일성과 팽더화이

 

6·25전쟁 시기 빨치산은 지역 입산자와 부역자 그리고 후퇴 시 남겨진 조선인민군과 부대를 찾지 못한 조선인민군과 의용군, 항미원조지원군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조선인민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후퇴 당시 통과하는 지역마다, 부대 일부를 남겨 놓고 이들에게 유격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렇게 조직된 유격대는 철원, 고원, 문천, 안변, 구월산 유격대 등을 들 수 있다. 

 

ㅡ 지춘란 횡성에서 빨치산에 배속되다.

 

지춘란이 빨치산에 배속된 것은 이런 제2전선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다. 

 

지춘란 판결문에는 “4284.2.15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유격대인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되어”라고 되어있다. 그녀가 편입될 당시는 제4 전역, 이른바 ‘2월 공세’라 불리는 ‘횡성전투’가 치열할 때였다.

 

횡성전투.jpg
횡성전투

 

이름 높은 격전지 횡성 일대에서 지춘란은 박종근 제3지대에 배속된 것으로 보인다.

 

유격대 제3지대장 남도부 유품 발굴에 참여한 임경석 교수의 『한겨레21』 연재 역사극장에 당시 상황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다행히 1951년 1월13일 곤란이 타개됐다. 중국 지원군 참전 이후 재반격에 나선 북한군 제2군단 부대들과 남대리 지구에서 조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1월20일에는 총사령관의 명령서도 접수할 수 있었다. 제3유격지대를 편성해, 곧 있을 북한군과 중국 지원군의 총공격에 호응하는 제2전선을 구축하라는 내용이었다. 지대장으로는 박종근이 임명됐다. 경북도당 위원장과 제3지대 사령관을 겸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즉각 제3지대 편성 사업에 착수했다. (중략) 박종근은 도당 집행부를 이끌고 강원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자기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제3지대를 속히 편성하려면 북한군 정규군의 인적·물적 원조를 받아야 했다. 제2군단 본부가 주둔한 횡성군 동쪽 끝에 있는, 해발고도 500m의 고원지대였다. (중략) 1951년 2월14일 박종근은 제3유격지대를 이끌고 서둘러 둔내면을 출발했다.” 
(『한겨레21』, 제1349호(2021.2.1.) 

 

이것으로 추론컨대 지춘란은 간호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전투 부대에는 소속되지 않고 야전 병원에 근무하다 후방부대(빨치산)에 편입된 것 같다.

 

부족한 필자가 남도부 부대 마지막 생존자 구연철과 부군 황금수 그리고 각종 자료에서 추론한 지춘란의 빨치산 배속이유이다.

 

첫 번째로는 이론과 실력을 겸비한 의료 성원이었다. 중국인민해방전쟁에서 칠흑 같은 야밤에도 정확하게 주사를 놓고 치료를 감당하는 능력이 있을 정도였고, 중증 병동 책임도 맡은 경험이 있다. 

 

둘째는 무엇보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체포 후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그녀는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라고 말했다. 또한 판결문에는 체포된 후에도 추호도 개준한 바 없이 법정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당을 철저히 믿고 혁명사상과 책임감이 투철했다. 제3지대 지대장 남도부는 “여하한 난관과 애로에 부닥치더라도 조금도 동요 없이 당을 위하여 충실히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라고 평가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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