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       서평: <범도>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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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고 2023년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인물 중 한 사람을 꼽으라면, 틀림없이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단연 첫손가락에 들 것이다.

모든 국민이 알고 있듯이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지난해 어느 때보다 더욱 큰 유명세를 치렀다. 윤석열 정권이 육사 교정에 세워진 그를 비롯한 5명(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 이회영)의 독립운동가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 계기가 됐다.

윤 정권은 다섯 운동가 중에서도 홍범도 장군을 꼭 짚어 대대적인 항일 역사 지우기 여론전을 펼쳤다.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지만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으니, 육사에 흉상을 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 그들은 그런 점을 중점적으로 공격하면 대중에게 먹힐 줄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실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전 국민적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한때 윤 대통령의 멘토로 불렸던 이종찬 광복회 회장마저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독립군·광복군 영웅 5인의 흉상 철거 방침에 대해 "반역사적 결정"이라면서 옮기려면 차라리 파손을 해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분노했다. 대다수 국민의 정서를 잘 반영한 통렬한 일갈이었다. 홍 장군 등이 벌인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 지우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항일운동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천명한 헌법에도 명백하게 반하는 짓이다.

하지만 윤 정권의 몰 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인 작태에 분노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홍범도 장군에 관해 내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큰 줄거리는 알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하다는 허전함 같은 것 말이다. 

마침 지인으로부터 홍 장군의 전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 <범도>(문학동네, 방현석 지음, 2023년 6월)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연말연시를 이용해  통독했다. '포수의 원칙'이라는 부제가 달린 1권(629쪽)과 '봉오동의 그늘'이란 부제의 2권(670쪽)으로 된 두꺼운 책이다.

머슴살이에서 포수로, 포수에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로, 무장투쟁 지도자에서 이국 땅에 있는 극장의 수위로 변신하며 생을 마칠 때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생이 1300쪽 되는 두 권의 책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다 읽고 난 뒤 마음속으로 리를 두 번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한 번은 홍범도 장군의 삶에, 또 한 번은 그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 준 방현석 작가에게.

이 소설이 나온 것은 2023년을 뜨겁게 달궜던 홍 장군에 관한 이념 논쟁과 전혀 무관하다. 홍 장군 흉상 철거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이 책이 먼저 출간됐다. 방 작가는 이 소설을 13년 전, 즉 2010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자료를 뒤지고, 주인공의 발자취를 따라 민주와 중앙아시아, 러시아 답사를 다녔다. 오로지 이 소설의 집필에 매달린 지 꼬박 세 해가 지났다"라고 말했다.

이 소설의 탄생이 지난해 홍 장군 흉상 철거 논쟁에서 자유롭다는 얘기다. 그런 논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홍 장군의 삶에 감명받은  방 작가가 홍 장군의 전 생애를 있는 온전하게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고, 그 결과가 이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피하겠다. 다만, 이 소설은 홍범도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그에게만 초점을 맞춰 쓴 영웅담은 아니다. 그가 호랑이를 잡던 포수에서 의병으로, 의병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면서 한반도의 산야와 만주 벌판, 연해주를 떠돌면서 각종 인간 군상과 만나고 부대끼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홍 장군의 얘기 못지않게 그의 주변에 모였다 흩어진 개성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날줄과 씨줄처럼 조밀하게 묘사돼 있다. 

홍 장군의 상징처럼 돼 있는 봉오동 전투 얘기도, 전체 17장 중에서 제16장(보급대장 김성녀) 한 장으로 압축돼 있다. 읽다가 봉오동 전투 얘기가 생각보다도 너무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깜짝 놀랐다. 이것도 작가가 홍범도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을  피해 애국과 희생, 헌신과 양보, 용기와 순정으로 점철된 그의 전 생애를 부각하려고 하는 배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방 작가도 이 책이 나온 뒤 홍 장군 흉상 철거 문제가 터지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의외의 사건으로 소설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작가와 출판사에겐 '행운'이겠지만, 작가가 본 홍범도가 말하는 홍 장군과 와 윤 정권이 말하는 홍 장군의 모습이 180도 다른 것을 본 뒤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홍 장군은 일제의 탄압에 밀려 러시아 연해주로 쫓겨갔고, 또 거기서 스탈린에게 중앙아시아로 추방됐다. 말년을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 수위로 지내다가 1943년 1943년 10월 5일, 향년 75세의 나이에 숨졌다. 그의 유해는 2021년  8월 국내로 봉환돼,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작가는 이 책 말미에 쓴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탈고한 뒤 국립묘지를 찾아 홍 장군 등 독립운동가의 묘를 참배하면서 모욕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사람들보다 더욱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친일 부역자의 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모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나는 그(홍범도)가 아니어서 대전과 동작동에서 모욕감을 견디기 어려웠다. 백 년 전, 그와 백무아(소설 속 홍범도의 연인)가 억압과 차별, 불의를 향해 발사한 마지막 한 발의 탄환은 아직 탄착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일격필살의 저격수였던 그들의 탄환은 빗나간 적이 없으므로 반드시 표적의 중앙을 관통할 것이다."

작가는 마치 윤 정권의 홍 장군 흉상 철거를 예견이라도 한 듯,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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