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지창영(시인)
등록일 : 2024.08.07
무인점포.jpg

 

시를 한 편의 영화로 생각해 보자. 관람객에게 공개되는 영화는 깔끔하게 편집된 최종본이지만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장면이 잘리기도 하고 선별된 장면이 붙여지기도 한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면을 남기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잘라낸다. 극적 효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장면은 골라서 이어 붙인다.

 

시를 창작할 때도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감이 더 잘 잡힐 것이다.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장면을 선별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아깝더라도 과감히 잘라낼 필요가 있다. 그러는 한편, 필요한 장면은 이어 붙인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눈치보지 않고
플레이보이 콘돔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익숙한 손길로 슬롯에 코인을 쑤셔넣고
한줌 욕망을 넘버로 찍으면
점지된 알을 낳는 둔탁한 소리

 

음부에 손을 집어넣다 말고
홀연 누이를 생각한다

 

구멍가게 누이는 늘 반겨 주었는데
할머니는 어떠시냐며 안부도 물었는데
때로는 오줌싸개라 놀리기도 하지만
엄마 심부름으로 산 수세미 위에 
눈깔사탕 하나 살짝 얹어 주기도 했던

 

붉어진 얼굴 들지 못해
지그시 눈을 감으면
타임머신은 몇 세기를 지나쳐 왔는지
말하고 계산하는 기계들의 뉴월드

 

어둠은 세상을 짓누르는데
외계인 기지처럼 홀로 눈부신 
자본주의 캠프

 

커피 캔 하나 집어 들고 
차가운 유리문을 나서면 
24시간 꺼지지 않는 
성형광고 모델의 사이보그  미소

 

눈웃음도 따뜻하던 
구멍가게 누이는 어디로 갔나

 

(지창영, 「무인점포에서」)

 

이 시는 문명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고 쓴 것으로서 무인점포와 그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을 선별하고 추억 속의 장면을 이어 붙여서 완성했다. 

 

1연에서는 무인점포 안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중에서 다른 장면은 배제하고 콘돔에 주목했다. 쾌락에 집중되는 현시대의 모습을 꼬집기에 적합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콘돔 이름을 굳이 플레이보이라고 밝힌 것도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쾌락 추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무인점포에는 껌, 화장지, 음료수, 과자, 술 등 여러 품목이 있지만 이들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끌어들이면 오히려 메시지를 선명하게 부각하는 데 방해가 된다. 도움이 되지 않는 장면은 잘라내야 한다.

 

2연에서는 무언가를 구입하는 장면인데, 굳이 어떤 물건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장면을 어딘가 모르게 저속해 보이도록 꾸몄다. ‘쑤셔넣고’ ‘욕망을’ ‘찍으면’ ‘알’이 나온다는 표현은 돈으로 쾌락을 좇는 시대의 흐름을 대변한다. ‘코인’이니 ‘슬롯’이니 ‘넘버’ 등의 외래어를 넣은 것은 주체성을 상실한 세태를 풍자하기 위함이다. 

 

3연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장면이다. 시적 화자는 불현듯 과거의 공간과 인물을 생각한다. 이는 4연의 장면을 이어 붙이기 위한 접합부로서 일종의 풀칠이라고 할 수 있다. 3연이 있어서 4연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

 

4연은 추억 속의 장면으로서 구멍가게 누이와 연관된다. 구멍가게는 무인점포와 대비되는 공간으로서 인간성이 있고 정감이 있는 곳이다. 

 

구멍가게.jpg

 

5연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접합부 기능을 한다. 역시 풀칠이다. 과거를 회상하다가 왠지 부끄러워진 화자는 다시 현실을 바라본다. 얼굴이 왜 붉어졌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았다. 구멍가게 누이 생각만으로 그랬는지, 어느덧 타락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 누이와 또 다른 사연이 있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면 그만이다. 어쨌든 다시 현실을 바라보니 낯설다. 그야말로 ‘뉴월드’다.

 

6연은 현실 세계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화자의 마음 상태를 묘사했다. ‘외계인’과 ‘자본주의 캠프’를 연결함으로써 무인점포가 화자에게 이질적인 공간임을 표현하면서 문제의 핵심이 자본주의임을 명확히 했다.

 

7연에서는 화자가 구입한 것이 커피 캔임이 밝혀진다. 알고 보면 화자는 길거리에서 콘돔을 사면서까지 환락을 좇을 만큼 타락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차가운 유리문’은 정이 흐르던 구멍가게와는 달리 현실은 차갑다는 점을 암시한다. 점포 밖에는 구멍가게 누이의 따뜻한 미소와 대비되는 성형미인 광고만 빛난다.

 

8연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배치하여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세상, 즉 인간미 흐르는 세상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했다.

 

독자가 이 시를 음미하다 보면 화자의 시선과 느낌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편리성과 쾌락에 매몰된 자본주의 세상과, 조금은 불편해도 인간미가 흐르던 과거의 세상을 대비해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되도록 의도를 가지고 장면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고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10퍼센트를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고 80퍼센트를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해 냄으로써 120퍼센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하는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고급 독자가 볼 때 그 맛을 한껏 음미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을 선보일 필요가 있다.

 

시창작 초보 단계에서는 대개 가위질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렵게 발굴하고 묘사한 장면이기 때문에 애착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는 독자와 공유하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붙들고 있는 장면이 메시지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를 냉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듯 시적 장면을 구성해 주면 독자의 마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를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감독은 여러 장면을 과감히 버리고 가장 필요한 장면만 남겨 이어 붙인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과감한 가위질로 최적의 장면만 남기고 엄선된 장면과 장면을 풀칠로 이어 붙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지창영 시인.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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