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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4.08.27

 

하준수 가묘(진달래산천 _ 네이버 블로그).jpg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하준수(가명 남도부) 가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 모든 물질은 정지돼 있지 않고 매 순간 운동하고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생성, 발전, 소멸의 자기 운동의 역사를 갖는다.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 나오는 운동의 정의이다.

 

“물질의 현존 방식이자 내재적 속성. 운동 없는 물질도 물질 없는 운동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철학적 의미로는 운동은 단적으로 변화를 의미한다.(중략)
운동론은 인간 사회를 물질 세계의 연관 전체 중에서 자연에 비해 질적으로 특수하긴 하지만 여전히 객관적인 운동법칙이 타당한 일부로 파악함으로써 그리고 사회도 자연처럼 끊임없이 운동, 발전함을 입증함으로써, 사회 발전 법칙의 의식적 인식 및 이용과 사회진보를 위한 사회적 변혁의 의식적 완수를 지향한다.”

 

빨치산도 마찬가지로 생성, 발전, 소멸이란 운동의 역사를 갖는다. 

 

비록 정전으로 빨치산은 강제 소멸당했지만, 그 정신은 목적 의식적으로 반제·자주 통일 완수를 위해 지금도 살아있다.

 

지춘란은 비록 체포되었지만, 법정 투쟁에서 빨치산으로 군인으로 포로 예우를 당당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은 포로로 인정하지 않고, 빨치산을 ‘공비’라 부르며 비하(卑下)하며 국방경비법으로 지춘란을 처벌했다.

 

ㅡ 빨치산을 ‘공비’라 부르며 비하(卑下)하다.

 

남도부와 지춘란 체포에 대한 동아일보(1954.3.12.) 기사이다.

 

“<괴뢰 유격대 총사령 南道富를 생포: 살인, 방화 등만 천여건> 

 

德裕山 神佛山 八公山 등 경남북도 및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동란 중 계속해서 공비를 지휘하여 민국의 후방교란과 양민살상을 자행해 오던 괴뢰 中將급 공비 제4지구당총사령관 남도부를 위시한 십여 명에 달하는 동 괴수급이 금번 육군특무부대에 의하여 일망타진됨으로써 휴전을 계기로 발악적으로 준동하던 재산(在山) 공비의 주력을 완전 궤멸시킨 일대 개가를 올렸다. 
즉 육군특무부대에서는 작년 10월경부터 金昌龍 부대장의 직접 지휘하에 대구를 중심으로 한 공비 제4지구당이 야전침투를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극비밀리에 활동중 동 12월 중순경 제3지대군사무장 차진철(가명)에 대한 유인공작에 성공하고 동인을 이용하여, 금년 1월 16일에는 제3지대부지대장 유응재를 대구시내 노상에서 체포, 동년 1월 19일에는 대구 모처에 하산 잠복중인 총사령관 부관 홍만식도 체포, 동년 1월 21일에는 주도치밀한 묘법으로 총사령관인 전기 남도부를 대구시내 동인동 민가에 유인하여 야반을 기해서 체포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부대에서는 팔공산 정상에 구축한 적의 ‘아지트’에 특별수사대를 파견, 군의장 괴뢰소위 지춘란(여자)를 생포하고 제4지구당유격대의 주력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소련제 총 4정 카빈소총 2정, 실탄 다수와 수류탄, 쌍안경 기타 불온문서를 압수하였다.”

 

단풍이 물든 팔공산.jpg
단풍이 물든 팔공산

 

여기서 ‘공비(共匪)’란 공산비적(共産匪賊)의 준말로, 중국공산당과 만주 조선 항일부대를 떼도둑·도적·비적(匪賊)이라 불렀다. 그리고 앞에 공산(共産)을 붙여서 중국의 장개석이나 해방 전의 일본 관동군이 공산당을 경멸적으로 ‘공비’라 폄하했다. 

 

한국 또한 마찬가지로 6·25전쟁 시기 빨치산을 ‘일제’가 사용한 ‘공비’라 부르며 도적으로 비하했다.

 

그러나, 남도부와 지춘란은 ‘빨치산’으로 법정에서 당당했다.

 

ㅡ 남도부와 지춘란은 결연한 태도로 당당하게 법정에서 진술하다.

 

부산은 정전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임시수도로 유지된다. 이후 임시수도가 서울로 옮김에 따라 대구 육군본부, 육군특무부대도 서울로 복귀했다. 그리고 남도부와 제4지구당 부대원에 대한 공판은 복귀된 수도 서울에서 진행되게 됐다.

 

남도부 부대원은 엄중한 문초(問招)를 받은 후 검거된 지 9개월이 지난 후에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정에 섰다. 재판은 중앙고등군법회의 주관하에 1954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4회에 걸쳐 진행됐다.

 

재판정에 선 부대원은 남도부, 문일준, 유응재, 이원량, 지춘란 다섯 명이었다.

 

임경석은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서 남도부와 지춘란의 공판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지춘란의 진술 태도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전투 요원이 아니라 간호장교임을 강조했다. 적십자 요원이므로 즉시 이북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남도부도 결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공판 첫날, 법정 선서마저 거부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진술하고 그렇지 않으면 진술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기로 결심했음에 틀림없다. 
사형이 구형된 날, 그는 조금도 뉘우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형 구형을 받고 나니 내가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하여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조를 목숨처럼 아꼈다. 또한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결심과 신념에서 지조를 지켜왔을 따름이다’라고 진술했다.”

 

남도부-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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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보도한 구형(1954.10.16, 위)과 선고(1954.10.18, 아래)  기사

 

남도부는 빨치산 제3지대장이자, 조선인민군으로, 장군으로 끝까지 신념과 지조를 지켰다.

 

지춘란 또한 빨치산 간호장이자, 조선인민군으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정당한 길을 걸어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ㅡ 남도부와 지춘란은 포로 예우를 요구했다.

 

같은 책에서 임경석은 남도부의 마지막을 자세히 설명했다.

 

“1954년 10월 16일 언도 공판이 있었다. 하준수(남도부)·유웅재·지춘란 3인은 사형, 문일준은 무기징역, 이원량은 징역 20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남도부의 총살형이 집행된 것은 이듬해 8월 어느 날이었다. 서울 근교 수색에 위치한 육군 사형집행장이었다. 
처형장에 입회했던 한 수사관에 따르면, ‘그처럼 품위를 지킨 사형수는 처음 보았다.’라고 한다. 
남도부는 눈가리개도 사양했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응시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인민공화국 만세’를 소리쳐 불렀다고 한다.”

 

하준수 ( 네이버 블로그).jpg
하준수(남도부)의 가묘 근처에 있는  영정

 

남도부는 한국 정부의 법정에 서는 것을 거부하고, 포로 예우를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법정 선서마저 거부한 것이었다.

 

전쟁 시기 빨치산은 대부분 소속이 조선인민군, 의용군, 항미원조지원군(빨치산으로 편입된 조선족) 등 군인이었다. 당연히 포로로 취급되어야 했다. 

 

<제네바협정 4조 2항(1949. 8. 12)> (가)항을 적용하면, 6·25전쟁 시기의 빨치산은 포로에 해당한다. 정규군 출신으로 교전 중에 군대에 복귀하려다가 실패한 경우에는 포로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도부와 지춘란은 분명히 군인인데, 한국 정부는 빨치산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의 법인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받았다.

 

“제네바협정 4조 2항(1949. 8. 12)

 

4. 다음의 자들 또한 본 협정에 의하여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

 

가. 피점령국의 군대에 소속된 또는 소속되었던 자로서 특히 그러한 자가 그들이 소속된 교전 중에 있는 군대에 복귀하려다가 실패한 경우 또는 억류의 목적으로 행해진 소환에 불응한 경우에 전기의 소속을 이유로 점령국이 그들을 억류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자. 단, 동 점령국이 본래 그가 점령하는 영토 외에서 적대행위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에 그들을 해방시켰다 하더라도 이를 불문한다.”

 

그러나 지역의 당 일꾼은 군인이 아니라 조선노동당 소속이므로 적용이 모호했다. 일반적으로 이때의 당 일꾼 빨치산은 한국 정부에 반대하여 벌이는 투쟁으로, 내전 형태의 전쟁이기 때문에 빨치산 활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포로로 규정되기보다는 한국 정부의 법으로 처벌됐다.

 

ㅡ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 송환

 

유엔군은 1950년 11월 27일부터 거제도에 총 360만 평이나 되는 대규모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포로는 조선인민군, 의용군, 항미원조지원군(빨치산으로 편입된 조선족) 등이 수용됐다.

 

포로에 대한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특히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5배나 정원이 초과하여 비인간적인 대우로 악명이 높았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제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미군의 포로 정책에 대해 정리했다.

 

“51년 7월경 미군은 포로수용소 정책을 ‘총력전의 새로운 분야’로 규정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의 제3전선(제1전선은 휴전선, 제2전선은 후방의 빨치산)으로 간주한 것이다. 
제3전선은 심리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미군은 강제 수단을 동원해 포로에 대한 재교육울 감행했다. 
이른바 ‘전향공작’이었다. 이는 친공계 포로의 거센 저항을 야기해 유혈극 사태를 빚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우선 송환 희망자 9만 5천여 명이 판문점에서 송환됐다. 송환거부 포로 2만 2천여 명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져 자유의사에 따라 행선지를 결정하게 했다.

 

중립국 송환위원회 위원들이 포로에게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jpg
중립국 송환위원회 위원들이 포로에게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특별기고] 비전향장기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왜 송환돼야 하는가』 통일뉴스(2022.8.21.) 기고에서 포로 송환뿐만 아니라 송환 당위성에 대해 정의했다.

 

“ ‘송환’이라 함은 편의상 한국(조선)정전협정 제3조 51항 c목에서 표시된 우리말 ‘송환’(영문 ‘Repatriation’, 한문 .遣返.)에 따른 것이며 단순한 ‘이산가족재결합’ 차원을 넘어서 ‘반드시 실행되어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라고 주장했다.

 

ㅡ 정전협정 이후 포로 송환과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송환

 

이인모 환영-3.jpg
이인모 노인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

 

정전협정 이후 포로 송환은 리인모 노인이 처음이다.

 

권오헌은 같은 기고에서 리인모 노인과 전쟁포로에 대한 송환을 기록 정리했다.

 

“비전향장기수 중 북녘 조국과 가족 품으로의 송환은 리인모 인민군 종군기자가 처음이다.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로서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해 온 사람도 리인모 노인이 처음이다. 리인모 노인은 조선인민군 제6사단 종군기자로 참전, 진주전선에 배치되고 이후 일시적 후퇴 당시 퇴로가 차단되어 지리산에 입산했고 경남도당일보를 내고 있었다.
수많은 격전 끝에 1952년 1월 체포된다. 빨치산 투쟁에서 가장 장렬했던 대성골 전투 바로 직후였다. 당시 리인모 종군기자는 거제포로수용소로 보내 달라 했지만 국가보안법으로, 뒤에는 사회안전법으로 수십 년 옥고를 치렀다. 
(중략)


리인모 노인 송환이 이뤄진 뒤 같은 전쟁포로 출신이었던 김인서(1929년생)·함세환(1932년생) 두 비전향장기수가 자신들도 조국해방전쟁(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쟁포로임을 주장하며 북녘 조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리인모 노인 송환 추진위를 함께 했던 인권·종교 단체들이 다시 모였다.
1993년 6월 2일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기독교교회협의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천주교인권위원회, 불교인권위원회,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등 6개 단체가 ‘김인서·함세환 노인 송환추진본부(김인서 노인의 당시 이름은 김국홍. 남쪽에서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지은 이름으로 이후 김인서로 통일함)을 발족시키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 뒤 같은 전쟁포로 출신 김영태(1930년생) 노인이 1994년 8월 국제적십자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전쟁참전 중 적군의 세균무기에 감염돼 소속부대를 잃고 지리산에 입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2년 4월 체포된 전쟁포로임을 주장하며 원적지로의 송환을 협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인권·종교단체들은 송환기구 이름을 ’김인서·함세환·김영태 노인 송환추진본부‘로 했다.
(중략)


이 세분들은 다 같이 1950년 전쟁시기 인민군 또는 의용군(함세환)으로 입대 참전했고 정규전과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된 전쟁포로였다. 당연히 정전협정 당시 송환됐어야 함에도 이른바 전시특별법, 국가보안법 등으로 오히려 감옥을 가야 했고, 20년 만기출소 당시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 하여 사회안전법에 의한 감호처분을 받아 모두 34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인모 김일성 만남.jpg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이인모 노인

 

1993년에 리인모 노인이 송환되고 나서, 고향이 조선이고 6·25전쟁 포로인 김영태, 김인서, 함세환은 제네바 협약에 따른 전쟁포로로 취급해야 한다는 견해와 함께, 시민사회종교인권단체의 송환 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송환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국에 가지 못하다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마침내 이분들을 포함한 비전향장기수 63명은 조국인 조선으로 송환된다.

 

지춘란은 판결문에 “괴뢰유격대 제3지대 간호장”이라고 분명히 소속이 나와 있다. 그러나 지춘란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국내법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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