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8.27
조약돌.jpg
파도리 조약돌.

 

시창작은 시적 대상이 갖는 의미를 확장하는 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상 그 자체만 이야기하면 시가 아니라 실용적인 글이 된다. 바다를 이야기할 때 바다 그 자체에 대해서만 논한다면 보고서가 될 것이고, 돌을 말할 때도 돌 자체에만 국한하여 기록하면 관찰문이 될 것이다.

 

시에서는 바다를 말하면서 바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불러오고 돌을 언급하면서 돌 그 이상의 뜻을 부여해야 한다. 더 큰 의미, 더 중요한 의미로 확장하여 상상의 세계를 넓혀 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판을 키우는 것이다.

 

어지러운 바람은 귓전으로 흘리고
조약돌 하나만 집어 들고 왔다

 

밀려와 발목을 어루만지는 
바다의 언어들이
설익은 생각들을 다독일 때

 

모가 닳지 않았던 시절이
하얀 포말로 일어선다

 

때로는 쓰다듬고 
때로는 몰아치는 파도의 말씀에 
깎이고 부서지던 상처들

 

얼마나 다듬어졌나,
얼마나 더 닳아야 하는가

 

쌈지에 간직한 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며 
가만히 매만져 보는 파도리 조약돌

 

(지창영, 「파도리 조약돌」)

 

이 시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조약돌을 본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장면으로서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창작 과정을 거치면서 상상의 세계가 넓어졌다.

 

조약돌은 단순히 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적 화자 자신이다. 울퉁불퉁 모난 돌덩이가 매끈한 조약돌이 되기까지 깎이고 부서진 것처럼, 화자도 그런 과정을 거쳐 다듬어졌고 앞으로 더 다듬어져야 하는 것이다. 바다 역시 보이는 면에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몰아치면서 모난 부분을 깎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하는 선배, 스승 또는 부모와 같은 존재다. 바다가 스승이 되고 돌이 화자가 됨으로써 상상의 영역이 사람의 문제, 삶의 문제, 정신적 성장의 문제로 확장된다. 판이 커진 것이다.

 

상상을 확장하려면 적절한 장치를 써야 한다. 언어의 조합도 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바다의 언어들’은 바다를 말하는 존재로 변화시킴으로써 상상의 세계를 넓혔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바다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결합하여 바다를 말하는 존재로 승화시킨 것이다. ‘파도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파도의 말씀.jpg
바다의 언어들

 

화자를 시적 대상과 일치시키는 것도 상상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조약돌 하나만 집어 들고’ 와서 ‘쌈지에 간직한 채’ ‘가만히 매만져 보는’ 행위를 묘사함으로써 조약돌은 곧 나와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의인화는 상상을 확장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기법이다. 몇 가지 예를 뽑아 본다(작가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필자의 시). ‘국방색 짙어가는 넝쿨손이/ 썩어가는 비목을 부둥켜안는 한낮’(「적군묘지에서」)은 식물이 낡은 비목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고 ‘부둥켜안는’다고 함으로써 애달픈 사람의 심정을 표현했다. ‘문명의 도시를 벗어나/ 언덕으로 산으로 줄달음치는/ 거구의 사내’(「송전탑 1」)는 송전탑을 사내로 의인화하여 상상의 세계를 넓혔다. ‘대양의 섬들을 향해/ 소복의 포말들 일어나/ 머리 풀며 울고 간다’(「남해 편력」) 역시 바다를 사람처럼 표현했다.

 

비유도 상상의 확장에 유용한 기법이다. ‘낡은 책장 사이에/ 빛바랜 잉크처럼 찍혀 있는/ 하루살이를 바라본다’ ‘그 한 점이/ 블랙홀 되어/ 나를 붙든다’(「하루살이」)에서는 책장 사이에 끼어 죽은 하루살이를 블랙홀로 묘사하여 또 다른 의미의 세계를 연다. ‘아가의 호기심은 원심력/ 엄마의 조바심은 구심력’(「두 개의 별」) 역시 비유적 표현으로서 엄마와 아기를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하는 별들로 상상한다.

 

과장법과 제유법도 상상의 확장에 도움이 된다. ‘지하세계에 산향(山香)이 가득하다’(「지하철 통로에서」)는 지하철 통로를 지하세계로, 더덕 향을 산향으로 과장했다.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송경동, 「손」)은 죽을 뻔한 생명을 건져 준 든든한 동료 노동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신체의 일부인 손을 내세워 사람을 대신했으니 제유법이다.

 

때로는 시적 대상 자체만 묘사하는 것 같지만 암묵적으로 상상을 확장하는 경우가 있다. ‘고공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강상기, 「담쟁이」)는 언뜻 보아 담쟁이만 묘사한 것 같지만 사람의 일을 연상하게 한다. ‘고공투쟁’ ‘절망’ ‘희망’ 등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가 그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한순간만이라도 뜨겁게 살고 싶다/ 타서 죽을지언정/ 어둠 속을 헤매지는 않겠다’(강상기, 「불나방」)에는 의인법도 없고 별다른 수사법도 보이지 않는데 화자의 결의가 느껴진다. 불나방과 화자가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을 뿐이다.

 

담쟁이.jpg
담쟁이

 

상징과 배치를 통해서도 시적 상상을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친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한국 현실을 보면서 ‘태극기를 단 급유선이 욱일기를 단 군함을 따라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태극기와 욱일기는 한국과 일본군을 각각 상징한다. 일본 군함을 앞에 두고 한국 급유선을 뒤에 배치하였으므로 한국이 일본군국주의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기분 나쁜 상상이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위에 언급한 몇 가지 기법 말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시적 대상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수사법을 살펴보면서 연구하는 한편 시인들의 작품을 음미하면서 무엇이 어떻게 확장되는가에 주목해 보면 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눈으로 대상을 보고 나의 상상으로 그 세계를 확장해 보는 것이 실력 향상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선택한 대상을 보면서 상상의 판을 키워 보자.

 

지창영 시인.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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