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전두환 군사정권 하의 80년대 최초의 대기업 노동자 투쟁
등록일 : 20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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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부평 대우자동차 노동자 파업투쟁. 사진출처 :  <노동과 세계> 박준성의 노동자 역사

 

대우자동차 파업은 산업의 중심이 1970년 섬유, 봉제, 전자 등 경공업 중심에서 1980년대 중화학공업으로 넘어가고, 노동조합운동도 경공업에서 기간산업으로, 여성노동자에서 남성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다.

 

 ◆배경

 

1984년 대우자동차는 145억 원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순익을 얻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85년 당시 임금은 갓 입사한 노동자의 초임이 일급 4,270원으로 월평균 13만 원대이며, 4~5년 차 노동자도 4,300~4,500원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1980~1982년 불황을 이유로 매년 상여금을 100%가량 체불하는 등 임금에 대한 노동자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또한 연장근로, 야간근로, 휴일근로 등에 대해서는 노동법에 통상 임금의 150%를 지급하도록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급의 150%를 지급하는 등 위법적인 임금 착취가 있었다. 생산직 사원들에 대한 차별도 심해 심지어 서울 통근버스에는 생산직 노동자는 아예 탑승하지 못하게 하였다. 

 

◆‘노동조합정상화 추진위원회’ 결성

 

이러한 불만이 터진 것은 1984년 8월이었다. 당시 회사 측이 예비군 훈련을 일찍 마치고 오후에 근무를 지시하자 송경평, 이용선 등 10여 명이 이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노조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으나 어용노조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노동자들은 독자적으로 공청회, 집회 등을 개최하며 노조민주화의 열기가 서서히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경평이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점이 밝혀졌으나, 오히려 이를 공개적으로 알리며 노동자들에게 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정당성을 북돋고 노동자들 또한 송경평을 보호하였다. 

 

노동자들은 예비군 문제, 상여금 문제를 제기하고, 군필 복직자들은 ‘군 복직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군복무 기간을 근속기간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싸움을 벌였다. 민주파 대의원들과 노동자들은 1984년 12월부터 월 2회 비정기적으로 <근로자의 함성>이라는 소식지를 1,000부씩 발행하고 공청회, 비상조합원 총회를 열어 조합원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1984년 12월 18일 대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민주파 대의원 12명이 당선되었다. 민주파 대의원들이 집행부 불신임안을 제출하자 집행부는 무기 정회를 선포하였다. 민주파는 12월 24일 ‘노동조합정상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집행부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1985년 1월25일 대의원대회에서 집행부 불신임안은 찬성 17표, 반대 24표로 아쉽게 부결되었다. 

 

◆총파업의 전개, 김우중 회장이 직접 협상에 나서다!

 

임금 교섭을 앞둔 85년 2월 28일 민주파 기관지 <근로자의 함성> 소식지가 배포되는 과정에서 회사 간부와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고, 어용집행부와도 마찰이 지속되었다. 이렇듯 85년 임금인상에 대한 현장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85년 4월 회사 측은 계속 임금 교섭을 연기하고 어용집행부는 이에 대한 미온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이에 4월 15일 ‘노조정상화 추진위원회’ 주도하에 조합원 1,000여 명이 조합사무실 앞에서 파업을 요구하며 연좌 농성을 벌였다. 어용집행부도 어쩔 수 없이 4월 16일 오전 8시를 기해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선언했다.

 

파업은 처음에는 부평공장의 2,000여 명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는데, 4월 18일부터 대우자동차 인천공장과 부산공장으로 확산하고 사무직 노동자들도 동참하였다. 파업 농성 4일째로 접어든 4월 19일 오후 5시 회사 측이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자, 조합원들은 이를 실질적인 휴업조치로 받아들이고 350여 명이 기술센타 3층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경찰이 기술센타 주변을 포위하고 강제 해산 움직임을 보이는 등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4월 23일 11시부터 4월 24일 사이에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직접 나서 기존 어용집행부를 제끼고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파 대표 홍영표 대의원과 단독협상을 벌였다. 4월 25일 새벽 3시경 양측은 합의서에 서명하고 신분보장 각서를 전달하였다. 총 16.4%의 임금인상과 무주택 직원 주택 및 기숙사 건설, 근로복지기금 조성, 위험수당. 유해수당. 고열작업수당 개선, 해고자 인정 등에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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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 노사 협상 타결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5년 4월 25일 자 11면. 협상 후 회장 김우중과 노동자 대표였던 ’학출’ 홍영표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동아일보(사진출처 : 프레시안)


◆성과와 한계

 

대우자동차 투쟁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집권 후 노동계 정화조치로 노동조합 활동이 완전히 위축된 상황에서, 수도권에 있는 대형 사업장이 열흘 간에 걸친 대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을 전면적으로 부활시켰다. 
여타 사업장에 강력한 파급효과를 미쳐 이후 구로지역 연대투쟁이 잇따라 전개됨으로써 노동운동이 침체를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투쟁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이 일반 노동자 대중들과 결합하여 공개적으로 투쟁을 이끈 투쟁이었으며, 이후 학생들이 노동 현장으로 본격 투신하는 물꼬를 열었다. 아울러 사업장 단위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촉발시켰다.

 

( ※  이 글은 <노동자역사 한내>의 "1985년 대우자동차 임금인상 파업투쟁" 자료를 참조하였다)

 

출처 : 현대차 현장신문 <노동자함성> 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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