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철의
등록일 : 2024.09.05

장지락-김산.jpg

장지락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본명이다.

김산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불굴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로 일제와 맞서 싸웠으나 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자신이 투신하여 활동한 중국 공산당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는 1983년이 되어서야 중공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장지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2008년 정부수립 기념식 때 그의 아들 고영광을 초청하였다.

 

한위건은 ‘아리랑’에서 장지락의 복당을 막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김산이 칼을 가지고 가서 한위건에게 “5분 안에 돌중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한이 울자, 그는 칼을 놓아둔 채 나와 한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실은 한위건의 입당을 장지락이 먼저 막았고 나중에는 한이 장의 복당에 반대하였다.

 

두 사람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서로 대립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제와 국민당의 밀정이 횡행하는 가운데 벌어진 비극이었다. 중국 공산당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국민당의 밀정으로 오인받아 희생되기도 하였다. 결국 김산은 옌안의 정풍운동 시기에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이자 간첩” 혐의를 쓰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한위건.jpg


한위건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는 1896년 함경남도 홍원(현 신포시 신풍리)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용원사립학교를 졸업한 뒤 오산학교에서 수학하고 경성관립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3.1 운동 직후 그는 경성부에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위건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의 일본 방문을 비판하며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 ‘신대한(新大韓)’에 참여하였다. 1920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참가하여 총무를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을 벌였다. 1924년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귀국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 한위건은 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신간회 발기에 참가하였다. 그해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했고 1928년 2월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한위건은 중국에 머물며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며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가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티에푸(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썼는데 공산주의자협의회, 학생공산당,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북평은 베이징의 당시 이름이다)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위건은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허베이성 베이핑시(北平市) 당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공 허베이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는 리리싼, 왕밍등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에 맞서 노선투쟁을 벌이다 출당되었다. 한위건은 ‘화선(火線: 전선이라는 뜻)’을 발행하여 당의 극좌노선을 비판했다. 그는 국민당 지역에서는 합법활동으로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티에푸 노선은 우경 청산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며 한위건을 허베이성 선전부장직에서 해임하고 곧 출당하였다. 그의 아내 장수안(張秀岩)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공산당과 연결이 끊겼지만, 그는 1935년 텐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공산당은 장정 중에 마오쩌둥이 지도부가 되어 왕밍, 보구등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을 변경했다. 1936년 봄 한위건은 중공 북방국 서기 류사오치에 의해 허베이성위원회 서기겸 톈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1937년 5월 옌안(延安)에서 당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 지구 대표로 참석했다. 그때 한위건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었다. “화북당이 한때 중앙의 모험주의 노선에 날카롭게 반대하였다. 그 영수가 바로 리티에푸 동지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탁상공론을 일삼는 이들로 주관주의자들이다. 다른 이는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공론보다 시기, 지역, 조건을 고려하여 활동하는데 유물변증법의 혁명관이라 할 만하다. 류샤오치와 리티에푸같은 사람들이다.”

 

옌안에서 한위건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본래 지병이던 폐결핵에 장티푸스가 겹쳤다. 당은 한위건을 허베이성위원회와 텐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으나 옌안에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1937년 7월 10일 한위건은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은 한위건(리티에푸)의 추도회를 열었으며 신중화보에 그의 약전을 실었다. 한위건의 유체는 옌안 칭량산(清凉山)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한위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장지락과 한위건은 다같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 둘 다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국민당에도 맞서 싸웠다. 한사람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 다른 이는 투쟁하다가 병마에 시달려 요절하였다.

 

장지락은 불행하고 한위건은 영광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지락은 님웨일즈에게 거듭 한탄하였다. “광동 코뮨에서 조선독립의 정수라 할 만한 동지들이 모두 죽었다.” 이처럼 혁명 과정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여 투쟁할 뿐이고, 죽고 사는 것 또한 조건과 선택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 이철의

철도노동자로 일하며 40여 년간 기차와 전철을 운행했다. 1988년 철도노조 민주화에 참여하고 노조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공공부문 노동운동에 복무했다. 20여차례 배낭을 메고 중국 곳곳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어를 익혀 <나, 평더화이에 대하여 쓰다>와 <모택동과 한국전쟁>을 번역하였다. 철도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해남으로 귀농하여  글을 쓰고 있다.
 

출처 : <노동자신문>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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