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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영구의 '산길 순례'
허영구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록일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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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5월인데 초여름 같은 날 오후 오랜 기간 언론운동을 하고 있는 지인과 사직공원에서 출발해 인왕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황학정 국궁장을 지나면 삼거리에 인왕산 호랑이상을 만난다. 여러 차례 왼쪽 한양도성을 따라 인왕산을 오른 탓에 오른쪽 부암동이나 수성동 방향으로는 처음이다. 

 

부암동 방향으로 2차선 도로가 보인다. 윤동주 문학관, 창의문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 걷다보니 석굴암 가는 표시가 나온다. 나무로 된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아카시를 비롯해 만발한 봄꽃들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 온다. 청와대, 경복궁을 비롯해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도로에서 420m 거리이고 계단이 590개라 했는데 이러저러한 이야기 나누면서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인왕산석굴암에 당도한다. 불경소리 은은하다. 먼 옛날 지각 변동 때 정상에서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포개져 있다. 스님 한 분이 바깥에서 신도들과 한가롭게 대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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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아래 작은 방이 만들어져 있는데 들여다보니 천정에 연등이 달려 있고 벽면에 불상이 있다. 석굴암이라 하면 대개 불국사 석굴암만 생각하지만  전국 여러 곳에 석굴암이 있다. 인왕산에도 석굴암이 더 있다고 한다. 인왕산석굴암에서 오른쪽 좁은 등산로를 따라 가니 천향암(天香庵)이 있는 이 곳 역시 바위 아래 기도하는 곳이다. 

 

석굴암 뒤쪽이 바로 인왕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잘 보이지 않은 지점에 석굴암이 위치해 있다. 정상 바로 아래 널찍하고 가파른 암벽에 글씨가 새겨졌던 흔적이 거무스레하게 보인다. 암벽 등반하는 모습도 보인다. 

 

1939년 제7대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 지시로 암벽에 가로세로 5m크기로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을 새겼는데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산행의 출발지였던 사직단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성역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맥을 끊기 위해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뀌었듯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전망대에서 북악산, 남산, 멀리 관악산까지 바라보니 좋다. 다시 등산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데 정상 암벽에서부터 늘어뜨린 것처럼 보이는 밧줄이 보이고 그 옆에 ‘인왕산 도시자연공원 백호 암벽 등반장’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한 때 군인들의 훈련 장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도로로 내려오기 직전 큰 바위에 사람이 새겨진 모습이 보인다. 이제까지 산에서 보던 불상과는 다른 모양이다. 주변에 안내판도 없다. 나중에 지인이 기사(한겨레, 2020.1.22. 김규원기자)를 보내왔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위쪽의 바위에 새겨져 있어, 하나는 산신과 동자, 호랑이, 다른 것은 부부 산신, 1900년대 전후 망국에 불안하던  민중 신앙자취, 전문가 이야기로 수준, 상태 좋아 문화재 지정 검토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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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 방향으로 내려간다. 겸재 정선의 그림 <수성동(水聲洞)> 안내판에는 “시내와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 골짜기를 그린 그림이다. 수성동 계곡에는 안평대군(1418~1453, 세종과 소헌황후의 셋째아들, 예술가)이 살던 비해당터와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정말 돌다리가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 또 다른 안내판이 보이는데, <수성동계곡과 옥인 시범아파트>다. “이곳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수성동’ 그림으로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1971년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한 경관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40년이 지난 2012년 ,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 곳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수성동 계곡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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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으로 서울시 테마산책길 중 ‘진경산수화길’ 안내판이 보인다. “진경산수화길 코스는 한국 고유의 화풍을 만든 겸재 정선(1676~1759)이 살았던 터를 돌아보며 그림에 얽힌  역사를 알아가는 서울시 테마산책길이다. 주요지점은 윤동주 문학관을 시작으로 백운동(백운동천), 청송당터, 겸재 정선 생가터, 백세청풍, 자수궁터, 송석원터, 수성동계곡 등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말할 때 그의 청하(현재, 경북 포항시 청하면)현감 시절(1733~1735)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유명한 <금강전도>는 물론이고 보경사가 위치한 내연산 폭포와 삼용추 그림도 청하 현감 당시에 그렸다. 나의 초등학교 친구인 현 포항시립미술관장은 그 지역이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최근 이 지역에도 둘레길 코스를 만들고 일을 터, ‘진경산수화길’이 추가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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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니 우리은행이 보이고 청와대, 자하문과 경복궁역, 광화문으로 향하는 큰 길을 만난다. 시위나 행진할 때 열심히 다니던 길이다. 물론 이 길에 서면 항상 서쪽으로 멋진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다. 예전에 서울 주변 산의 지리를 잘 모를 때는 북악산인가, 삼각산인가 했던 적이 있는데 이젠 많이 익숙하고 친근해졌다. 

 

산 하나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정상에 오르는 수많은 등산로를 따라 걷고 자연환경은 물론이고 역사까지도 이해해야 한다. 한 분야에서만 전문가였던 사람이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위험하거나 불통이 될 수 있다. 귀를 열고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매우 짧은 산행이었지만 인왕산을 좀 더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482회, 인왕산, 2023.5.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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