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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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형식적으로는 다인종 평등사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을 이끌어가는 세력은 백인이다. 그중에서도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불리는 앵글로 색슨계의 백인 기독교도가 미국 사회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와 분석에는 구명도 있다. 와스프라고 다 똑같은 와스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와스프 중에서도 금수저 와스프, 은수저 와스프, 흙 수저 와스프가 있다. 일반적으로 미국을 이끄는 핵심세력이 와스프라고 할 경우, 금수저 와스프를 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금수저 와스프들이 정치, 언론, 경제, 종교 등 미국의 상하부 구조를 지배하는 와스프 중의 와스프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암살 미수 사건 직후에 열린 7월 말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흙 수저 백인'의 상징 인물 J. D.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그가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깜짝 지명하자, 미국 안팎의 많은 미디어가 트럼프가 외연을 확장하기보다 자기 색깔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선택이라고 해석했다. 8년 전 대선에서 '기독교도인, 보수주의자, 공화당원'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마이크 펜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할 때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을 염두에라도 두었지만 이번에는 이마저도 내팽개치고 더욱 오른쪽으로 더욱 대중영합주의로 달려가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분석이 나왔는가를 이해하려면, 밴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한다. 가장 알기 쉽게 말하면, 밴스는 흙 수저 백인의 애환을 다룬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흐름 출판,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2017년 8월)의 저자다. 힐빌리는 쇠락한 공업지대(일명, 러스트 벨트)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일컫는 속어다. 다른 표현으로는 백인 쓰레기를 뜻하는 '하이트 트래시' 또는 햇볕에 그을려 목이 빨갛게 됐다는 의미의 '레드 넥'이 있다. 한국에 빗대자면, 달동네나 쪽방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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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스는 힐빌리가 모여사는 대표적인 도시인 오하이오주의 미들타운 출신이다. 게다가 마약 중독자 어머니의 한 부모 가정이라는 불우한 환경에서 유년 및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해병대 입대를 계기로 각성해, 오하이오주립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우등 졸업한 뒤 변호사와 사업가, 정치가(현재 오하이오주 상원 의원)로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표현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 환경이나 구조로 볼 때 미국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는 가물에서 콩 나기보다 어렵지만 말이다.

마침 이 책이 나온 2016년, 트럼프는 한때 중산층 마을이었다가 세계화와 함께 가난한 마을로 전락한 중서부 지역의 러스트 벨트 하층 백인들을 집중 공략하는 선거전을 효과적으로 펼쳐 대통령에 당선했다. 덩달아 중서부 러스트 벨트의 비참함을 다룬 이 책도 <뉴욕타임스>와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장기간 오르면서 전 미국인의 관심을 끌었다. 2020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제작됐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나는, 밴스가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런 책과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다. 밴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에야 부랴부랴 영화와 책을 찾아봤다. 보통은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지만 이번의 경우는 어찌하다 보니까 영화를 먼저 봤다. 영화는 아무래도 책을 축약해 가시화할 수 있는 것 중심으로 전하다 보니 빠진 부분이 많다. 책과 함께 읽으면 빠진 부분을 보충할 수 있어 좋다.

책과 영화 모두 저자인 밴스를 영웅화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아마 밴스가 정치에 뛰어들기 전에 출판 또는 제작됐으니까 '정치적인 오염'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얘기보다 힐빌리의 비참한 생활, 즉 가정 폭력과 가족의 해체, 마약 중독, 윤리와 문화의 붕괴, 공교육 붕괴, 복지 제도의 문제 등 미국 하층 백인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일종의 사회 고발서나 실태 보고서라고 할 만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주목한 곳은, 한때 민주당 지지자였던 백인 하층민이 왜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공화당 지지자가 됐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때 민주당의 견고한 지지층이었던 애팔래치아산맥과 남부 지역 사람들이 어째서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충실한 공화당 지지자가 되었는지 설명하려고 많은 정치학자가 무던히 애를 썼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시민 평등권 운동을 포용한 민주당을 탓하며 인종 관계를 지적하기도 했고, 사회보수주의가 해당 지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을 장악했기 때문이라며 종교적 신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를 이루는 견해는 수많은 백인 노동자가 내가 달먼(*동네 식료품 잡화점 이름)에서 본 것과 똑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 1970년대 누구 말마따나 복지 제도에 기대 놀고먹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돈을 받으며 사회를 비웃는다! 우리 같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조롱 받고 있다'라는 인식이 백인 노동 계층 사이에 팽배해지면서 공화당의 대선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기 시작했다."(234~235쪽)

일부 대목을 인용한 것이지만 사회 복지 바우처로 살아가는 게으른 가난뱅이 이웃을 보면서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당에 환멸을 느꼈다는 얘기가 곳곳에 나온다. 저자가 가장 물질적,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외할머니도 이런 이유로 민주당 지지에서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사람 중 한 명이다.

밴스가 주의회에서 시간제 일을 하면서 느꼈다는 고리대금업 철폐 움직임도 비슷한 사례다. 당시 주의회의 많은 의원들이 고리대금업을 악으로 보고 근절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한 그가 볼 때는 돈을 빌릴 곳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고리대금업이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전혀 무시한 발상이었다. 정치인들이 이상에만 매몰된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다.

백인 하층민들이 보이고 있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미들타운의 수많은 아버지들과 다르게 오바마는 훌륭한 아버지다. 미틀타운에서는 출근할 직장이라도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야 멜빵바지를 입고 일터에 나가는 반면, 오바마는 정장을 입고 출근한다. 대통령 영부인은 우리더러 자녀들에게 특정 음식을 먹이면 안 된다고 말하고, 우리는 그런 영부인을 미워한다.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우리도 영부인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314쪽)

흑인이면서 잘난체하는 모습이 하층 백인들의 질시와 분노,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는 얘기다. 이런 심성의 작용 때문인지, 대다수 백인 하층민들은 오바마가 외국 출생이고 미국을 파괴하려는 이방인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다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과 반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자신들보다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보는 흑인에게 '정치적 올바름'에 관해 교육받는다는 것이 더욱 큰 부정과 반발로 나타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밴스가 부통령으로 지명된 뒤 미국 대선 구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1차 텔레비전 토론에서 참패한 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에서 사퇴하고 흑인(아버지)과 인도(어머니) 혈통의 카멀라 해리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와 함께 밴스가 '트럼프 대 바이든'에서 '트럼프 대 해리스'로 바뀐 대선 구도에서도 위력을 발휘할지를 놓고 분석과 논란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밴스가 8년 전에는 트럼프를 비판하더니 이번에는 트럼프 지지로 돌변했다든가, 해리스를 애를 낳아키워 본 적이 없는 '고양이 어머니(캣맘)'으로 폄하한 발언이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등의 폭로성, 비판성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역시 핵심 문제는 해리스가 밴스가 가지고 있는 백인 하층민을 포함한 소외된 자에 대한 소구력을 상쇄할 수 있을지일 것이리라. 나는 이 책을 읽고 해리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우위의 대선 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트럼프가 밴스를 부통령으로 택한 것은 미국 대통령선거의 특성에 맞춘 영리한 전략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세계화와 정보화, 자본주의의 금융화 물결 속에서 소외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는 힐빌리의 상징인 밴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것은, 미국 대선의 열쇠를 쥐고 있는'스윙 스테이트(경합 주)'를 확실하게 잡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유권자가 직접 뽑지 않는다. 각 주별로 먼저 선거인단을 뽑은 뒤 이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다. 선거를 하기 전부터 민주당, 공화당 우위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이른바 '확정 주'는 대선 향방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표심이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경합 주)가 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지금 힐빌리들이 모여사는 이른바 '러스트 벨트'는 대체로 '경합 주'와 일치한다. 러스트 벨트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를 비롯해 미국 철강 산업의 메카인 피츠버그,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멤피스 등이 있는 중서부와 북동부 일부 지역을 칭하는데, 주로 치면 미시간, 인디애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이다. 현재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국 미디어가 꼽고 있는 경합 주는, 애리조나, 미시간, 네바다, 위스콘신,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7개 주다.

민주당이 후보를 조 바이든에서 해리스로 바꿨다고 해서, 과연 민주당에 등을 돌린 백인 하층민의 마음이 민주당 쪽으로 돌아올까? 적어도 <힐빌리의 노래>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해리스가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마련해 놓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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