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ㅡ 서평: <테레비국의 이면>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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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TV 프로그램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유행하는 프로그램과 구성을 복사해 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시에는 국내 방송국의 피디들이 일본에 출장 가지 않고도 일본 방송을 볼 수 있는 부산으로 짐을 싸 들고 가 장기간 머물며 새로운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얻곤 했다. 요즘엔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일본보다 더욱 재미있고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엠지(MZ) 세대에겐 전혀 믿기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신문이 그랬듯이 텔레비전 방송도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빨리 시작했다. 일본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이 1953년,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0년이다. 우리나라는 1961년 12월 국영방송인 KBS-TV가 처음 개국했고, 1980년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을 했으니 대략 일본에 10~20년 뒤졌다. 자연스럽게 시대를 앞서 간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이 좋든 싫든 한국의 선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 방송국의 이면>(신조신서, 나카가와 유키 지음, 2009년 12월)은 붕괴의 위기에 몰린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의 내막을 폭로한 책이다. 텔레비전 업계에서 보도, 오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리랜서 피디로 20년 이상 일한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어떤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에서 헤쳐 나오려고 어떻게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부작용과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들춰냈다.

워낙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탓에 10여년 전에 나온 책의 내용 그것도 일본의 얘기가 우리나라 현실을 이해하는 데 무슨 도움을 주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텔레비전의 주 수입원인 광고가 급감하고 그 여파로 프로그램 제작비가 덩달아 크게 줄면서 시청률도 떨어지는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이 당면했던 삼중고는 바로 지금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처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선 일본 방송의 위기에서 한국 방송이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황금알을 낳는 닭' 노릇을 하던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90년 초,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질 무렵부터다. 그때까지 하늘을 모를 정도로 몰렸던 광고 수입이 급감하기 시작했고 프로그램 제작비 조달에도 그늘이 끼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질이 떨어지니 덩달아 시청률도 떨어졌다. 이런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시청률을 높인다는 명분 아래 재미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프로그램 만들기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재미보다 의미, 쉬운 이해보다 진중한 전달을 중시하는 보도 프로그램에 연성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와 함께 보도와 오락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테레비국.jpg
<텔레비 방송국의 이면>

광고주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는 제작 태도도 강화됐다. 예를 들어 대광고주인 도요타자동차의 내부 비리를 알고도 눈 감거나, 회사원들에게 고금리를 뜯어 생존하는 대부 업체를 비판하기는커녕 '소비자 금융'이라고 우아하게 부르는 관행이 굳어졌다. 또 성공한 기업 얘기를 전하는 기획을 하면서, 이 기업이 대광고주인 한 전자회사의 제품을 쓰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기획이 무산되는 일도 벌어졌다.

제작 현장에서는 이른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 제작의 외주화가 심화됐다. 같은 일을 하는 피디도 외주사 직원은 본사 직원의 몇 분의 1의 임금을 받고, 같이 출장을 가도 정규직은 숙식비가 나오지만 외주사 직원은 맨손으로 때워야 했다.

일본 텔레비전의 열화 과정이 마치 지금 우리나라 방송국의 현실, 종편을 중심으로 하는 저질 방송의 실태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은 '1공영(NHK) 다민영' 방송 체제다. 2공영-1민영의 우리나라와 기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사정으로 일본 텔레비전 방송의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우리나라보다 선정적, 자극적, 상업적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불황이 닥쳐보면서 일본 프로그램의 이런 특징은 더욱 강화됐다. 이 책에는 이런 과정이 매우 자세하고 생생하게 나온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저질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것이 '와이드 쇼'다. 와이드 쇼는 관련 분야에 전혀 전문성 없는 연예인 등이 나와 시사 문제 등 화제를 놓고 떠벌리는 일종의 시사 쇼다. 시사 문제를 쇼처럼 만들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겠다는 의도가 깔린 프로그램이다. 한국과 중국 등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혐한·혐중 내용이 주로 이런 프로그램에서 많이 등장한다. 값싸게 만들 수 있는데다 시청자의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종편에서 정치 지망생이나 3류 비평가들이 하루 종일 나와 정치 현안 등에 관해 '아무 말잔치'를 벌이는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일본 민방에서는 오래전부터 여성 아나운서들이 인기 배우처럼 소비돼왔다. 그들이 인기 운동선수나 연예인과 사귀거나 결혼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됐고, 이것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뉴스거리로 등장하는 패턴이다. 우리나라도 요즘 이런 일본의 풍조가 수입된 것 같아 씁쓸하다.

미국 등 구미에는 없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는 방송계의 독특한 직종이 있는데, 바로 작가다. 일본의 한 방송인이 작가를 '디렉터(피디)가 개을러서 생긴 직업'이라고 정의했다는 데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작가들의 질과 수준이 천자만별이지만, 이들이 피디나 제작 담당자가 할 일을 거의 떠맡는다. 개중에는 아주 높은 대우를 받는 사람도 몇몇 있지만 대부분 피디나 제작 담당자가 할 일을 값싼 임금을 받으며 도맡아 하고 있다. 이것도 일본 방송에서 배워 온 나쁜 관행이다.

물론 일본 텔레비전 방송이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볼 때 가장 많이 배울 곳이 우리나라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방송윤리·프로그램향상기구(BPO, 약칭 방송윤리기구)다. 이 기구는 NHK와 민간방송연맹과 그 회원사가 만든 제삼자 민간 독립기구이다. 방송 사업자나 경험자 이외의 사람만이 이사장이 될 수 있다. 방송계가 돈을 갹출해 만든 기구이지만 의사결정에서 방송 관련자를 엄격하게 배제·제한하고, 이사나 평의회 회원을 뽑을 때도 정부의 입김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껍데기만 민간독립기구의 모습을 취하면서 운영은 정부 예산으로 하고, 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실상 정부기관'과는 질과 격이 전혀 다르다. 방송 인허가권은 총무성이 쥐고 있지만, 방송과 관련한 심의는 BPO의 전권 사항이다.

저자는 "일본의 민방은 겨울의 시대에 들어갔다"면서도 "이 상황은 어떤 의미에서는 디렉터에게 기회"라고 말했다. 인기 연예인과 풍부한 자금 등 제작 과정에서 끼었던 거품이 꺼지면서 디렉터(피디)가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기회가 오히려 커졌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답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좋은 프로그램을 바라는 시청자에 진지하게 보답하려는 제작자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이나 우리나라 모두 방송이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은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방송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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