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한일정상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
김장민 (정치학 박사)
등록일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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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해방 이후 한일관계의 문제점

 

2차 대전 종결 직후 미 군정청의 목표는 남에 미국식 체제를 주입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이익을 대변하는 친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목표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 일본 - 한국 순서대로 위계적 군사동맹을 결성하여 중국과 소련을 봉쇄하는 것이며, 한일에 친미보수 독재 체제를 합법적으로 영구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아버지가 되고 일본이 맏형이 되고 남이 막내아들이 되는 미국식 동북아 가정에서 일본과 한국은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사이좋은 형제가 돼야 한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목표에 순응하는 한 일본의 전범, 남의 친일파라도 중용했다. 그 결과 미국의 의도대로 일본에서는 자유당-자민당 보수 독재체제가 영구화됐고, 남에서는 보수양당 독재체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첫째, 미국은 한일 정권 수립기에 자신의 요구에 복종하는 한 과거를 따지지 않았으므로 일본의 전범 처리, 남의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 전범들이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가해자이지만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인양 이중적 태도를 취하면서 침략전쟁을 사실상 비호하고 과거사 정리에 소극적인 것이다. 한국의 친일파 역시 과거사 정리 없이 한일동맹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에서 지금까지 내부 갈등으로 남아 있으나 미국은 친미를 표방하는 전범들과 친일파들을 지금까지 비호해왔다. 


둘째, 미국은 핵심 전범의 처형, 샌프란시스코 조약, 일본 내 친미정권의 영구화 등을 통해 일본에 대한 과거사를 정리한 반면, 과거 일본의 폭력 통치와 수탈, 전쟁범죄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의 요구를 묵살했고, 심지어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압박해왔다. 독도 영유권 문제나 교과서 문제 이외의 과거사 문제란 일본 침략 문제, 강제징용자 문제, 원폭피해자 문제, 사할린한인 문제, 조선인전범 문제, 조선인군인ㆍ군속 문제,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이다(신정화.2015). 


미국의 입장에선 한국은 일본의 전쟁에 협력한 식민지에 불과하고 미국에 의존하여 독립됐기 때문에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청구권이라는 것은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 미국은 피를 흘린 반면, 한국은 이렇다 할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밀 청구서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은 중소를 봉쇄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실현하기 위해 친일파 문제, 과거사 문제 때문에 한일관계에 소극적인 한국의 정권들을 압박하고 졸속적인 한일관계 대타협을 강요해왔다. 


넷째, 미국은 일본을 중러 봉쇄의 병참기지로, 한국을 야전기지로 삼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반공 쇼윈도우 경제성장모델로 실현시켰으며, 한국과 일본을 경제적 공동운명체로 묶었다. 즉 미국은 종전 직후 한일에 경제원조를 하는 대가로 한일 간에 경제협력을 강요해왔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의 기술과 소재, 부품을 수입하여 값싼 완성품을 만들어 미국 소비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미일의존형 수출국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한미일 삼각 경제체제는 한미일 삼각 정치, 군사, 외교 체제의 물적 토대였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성장기, 나아가 IMF 사태와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일본의 자금을 도입할 것을 종용하는 등 노골적으로 한미일 경제공동체를 구축해왔다.

 

현재까지 정치군사외교 분야와 달리 경제분야의 한미일 공동체 구축은 나름 성공적이어서 한국과 일본의 자본들은 미국 자본 아래 서로를 갈구하게 됐다.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의 자본들은 한미일 정치군사외교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한미일의 지배권력과 이해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II. 미국 중심의 한일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강압적 정책들

 

냉전시대,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군사적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결핍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발전을 추진해야만 했다. 그리고 과거사 문제를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 정권은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부정적으로 인식해, 박정희 정권의 경우는 탄압을 통해, 전두환 정권은 ‘극일’을 통해 관리했다.

 

한편, 민주주의 정권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일본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과거사 문제를 일본에 위임하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이 과거사를 합리화하고, 이에 반일여론이 확대되면, 정부는 태도를 변경해 일본에 대해 과거사 청산을 요구했다. 이 결과, 한일관계는 악화했다. 과거사문제에 대한 권위주의 정권의 주된 대응 방식은 관리였으며, 민주주의 정권의 대응 방식은 일본에의 위임에서 반일여론의 주도까지 그 폭이 넓었다(신정화. 2015).


1. 이승만 정권

 

미국의 냉전전략에서 중심적 역할을 요구받던 일본은 이른바 요시다 노선에 입각해, 미일동맹을 주축으로 하면서도 미국의 냉전전략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공산권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성장의 동력을 확보하려했다.

 

이러한 중립주의적 냉전전략은 미국의 우려와 한국의 반발을 초래했다. 반면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경쟁(반공)을 우선하면서도 탈식민지화(반일)를 추구하며,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을 확보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했다.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유산을 극복하고 북한과 치열한 체제경쟁을 수행해야 하는 한국은 어려운 과제를 껴안고 있었다. 즉 한국은 반공(북한과의 체제경쟁)과 반일(탈식민지화)을 동시적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한미일동맹을 추진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지원을 경쟁적으로 받아야 하는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최희식. 2009).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과 경쟁하는 입장이었으며, 미국이 일본을 더 우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한국전쟁 전후로 미국은 이미 한미일공동체를 추진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재건에 전쟁의 병참기지였던 일본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 노력을 요구하며 중개자의 역할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대한 원조에 대해 일본 물품의 구매를 통해 일본 경제 성장과 연계시켰다. 한국부흥에 있어서도 일본이 경쟁입찰에 참가하여 수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 원조에 대한 일본 물품 구입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었으나, 한일관계 개선에는 소극적이었다(최희식. 2009).


1953년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계획을 수립한 이유는 이승만의 북진 정책, 독재 이외에도 1951년 이후 일본과의 회담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도 추가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분개했으며 1955년 8월에는 대일 교역 및 여행 금지 조치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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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한국을 방문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오른쪽)과 이승만 대통령(왼쪽)


2. 박정희 정권 

 

1963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존슨 대통령은 “한일국교정상화가 극동 안정에 막대한 공언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미국의 한일회담 타결 압력은 베트남 정세의 악화와 1964년 중국 핵실험 성공에 의해 최고조에 달했다. 1965년 5월 박정희-존슨 회담에서는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한미 간의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지어져 타결된다. 이때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결정을 배경으로 미국은 한일국교정상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조아라. 2014).


(CBS노컷뉴스. 2021-06-22)에 따르면 미국은 미군감축 카드로 한일협정을 성사시켰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추진한 동아시아 지역통합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일 국교정상화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양자협상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중개와 압력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된 삼자협상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주선과 개입 그리고 압력에 의해 관계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1951년 10월부터 시작하여 1965년 6월 협상을 끝냈다. 무려 14년이 걸렸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이 지속적으로 개입하면서 압력을 넣은 배경은 크게 경제와 안보 문제 때문이었다. 한일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일본 자민당 정권에게도 한일국교정상화를 강하고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압력을 넣는 조건으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끌어들이려고 했다(중앙시사매거진. 2007.4.1).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게는 단지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마련을 위해, 일본정부는 ‘귀찮은 과거’를 빨리 떨쳐버리려는 의도에서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이 체결하였다. 한일 양국간의 이해관계와 미국의 동북아정책으로 인해 완전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미완의 과거청산’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1963년 한일 수교협상 초기부터 진행과정을 파악하면서 주로 일본측 입장을 지지하며 한일 양국에 조기에 수교할 것을 압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1963년 12월4일자 전문에선 “박정희가 한일 관계를 건설적 기반위에 올려놓은 지도자로 한국사에 이름을 구축할 유일한 기회를 맞았다는 개념을 조장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도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면서 미국의 압력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한, 주일 미 대사관에 지시했다. 미 국무부가1964년 8월2일 서울과 도쿄의 미 대사관에 보낸 전문에는 당시 존슨 대통령이 W.G. 브라운 주한 미 대사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한 구두 메시지도 있다. 당시 존슨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일본과 정상적 관계의 구축을 추진할 것을 희망한다”며 “한일 정상화가 성취되지 않을 경우 아시아 자유세계의 입장이 악화할 것을 우려한다”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프레시안. 200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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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 사죄 못 받은 한일협정

 

3. 민간정권 전환 이후

 

1997년 말, 미국은 왜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나? 기자는 외환위기로부터 4년여 뒤인 2002년 봄 김영삼 정부 당시의 최고위 경제 관료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가 털어놓은 경험담. “1997년 11월19일, 일본 미쓰카 히로시 대장성(재무성의 전신) 장관을 만나 협조 융자를 부탁했다. 미쓰카 장관은 돈을 빌려주기 어렵다며 문서를 보여줬다. 미국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보낸 편지였다. 한국에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되어 있더라.”(시사인. 2018.12.12)


동아일보(2019-07-03)에 따르면 외환위기의 배경에는 대미, 대일 관계의 악화로 인해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길들이기를 하려고 한 것도 있다. 1995년 11월 김영삼(YS) 대통령이 일본의 역사 망언과 관련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일격을 날린 이후 독도, 위안부, 한일 어업협정 문제까지 겹쳐 97년 11월 한일갈등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어 빠르게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시절 재경원 차관으로 있으면서 ‘미국의 힘을 빌려야 글로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추진했지만 쉬웠을 리 없다. 외교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대통령이 평소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외교관계를 잘 맺어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왔다”고 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망명기간 미국과 일본의 지도층과 긴밀한 관계를 지녔다. 무엇보다 구제금융 사태를 맞이하여 신자유주의 도입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요구에 순응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즉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2항엔 오부치 총리의 ‘식민 통치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가 명기됐다. 하지만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의적” 사과만을 했을 뿐이다. 위안부, 강제동원 등 일본 국가가 벌인 범죄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현안 쟁점이었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도 포함되지 않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자체가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한-일 간 동반자 관계를 굳히자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파트너십 선언 당일 김대중 대통령이 [오부치 총리에게] ‘앞으로 한국 정부는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해서 건드리지 않겠다’고 발언했다.”(노동자연대. 2023-03-10)


이명박 정부 시기의 대일 관계는 2008년 총선에 압승한 초기에는 협력이 증대되었다. 하지만 2012년 4월 총선에서 대패를 하고 특히 대선을 앞둔 2012년 하반기에 이르러서는 정보보호협정 체결 모색과 보류, 독도 방문, 통화스와프 연장 요청 철회 등 가장 악화된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정부여당의 지지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국회비준에 부담을 느낀 여당이 속도 조절에 나섰고 대선주자들도 유보적이었기 때문이다(신욱희. 2018).


미국이 일본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한 것이 MD정보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면, 미국이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주문한 것은 당연히 MD 구축 과정에서 비밀유지를 위한 정보 보호가 주목적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외교통상부와 김황식 총리는 한일 간 북한 핵에 대한 정보 교류가 주목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월간참여사회. 2012-08-06).


YTN(2016년 10월 28일)에 따르면 韓日 군사정보보호협정은 미국의 압력에 따라 체결됐다. 홍현익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의회보고서에 몇 년 전에 한국의 사드 배치하려면 첫 단계가 한일 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위안부 협상이 재점화한 것은 2015년 10월16일 박근혜 대통령 방미가 계기였다. 미국의 대일본 교섭은 도쿄에 있는 주일 미국 대사관을 거점으로 전문 협상팀이 꾸려져 총리관저·외무성·자민당 등 모든 채널을 총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시사인.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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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위안부문제에  합의한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권의 대일 외교 투 트랙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재협상 방안을 일본에 요구하는 강경한 입장과 북의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과 협력한다는 분리정책이었다. 그 배경에는 ‘사드 배치 결정, 위안부 합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등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여론이 있었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고들(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라며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에 일본은 바로 고노 다로 외상이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사법부가 ‘국제법 위반’ 상황을 만들었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가 ‘시정’하지 않으면 양국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나왔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경직된 태도는 다시 한국 정부의 입장을 경직시켰다. 11월 21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의 해산을 공식적으로 확정했다(남기정. 2021).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조건부 유보한다고 발표하자 외신들은 한국 정부의 막판 입장 변화는 미국의 지속적인 설득과 압박에 따른 것이란 분석을 일제히 내놨다. 


III. 윤석열 정권에서 한일관계의 문제점

 

이번 한일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한일동맹에 한발 다가감으로써 한미일동맹 추진에 힘을 받게 된 미국이다. 김대중 정권이 일본의 명시적인 사과 한마디에 모든 과거사를 덮어주고 미국의 의도대로 한일동맹에 한발 다가섰다면 윤석열 정권은 "역대 내각의 입장 계승"이라는 기시다 수상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의 요구에 순응했다.


윤 대통령은 일본 측에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번복,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무조건 정상화라는 선물을 주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배출에 대해 항의조차 못했으며, 오히려 일본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규제 완화’를 요청했다. 심지어 정부는 부정하고 있지만 기시다 총리는 독도 영유권 문제도 제기했다. 일본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근혜 정부 당시 굴욕적인 해결방식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일본의 여야정치인들은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초계기 대치, 소녀상 철거, 심지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까지 거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정부의 해석과 대법원 판결이 다르다’며,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던 우리나라 대법원을 능멸했다. 윤대통령은 요미우리 인터뷰에서 강제동원 관련 구상권 청구는 없다고 공언했다. 


전경련-게이단렌이 20억 원 규모로 만든 한일미래파트너십에 일본 기업의 참여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가해자인 일본 기업이 아니라 한국 정부 산하의 재단이 한국 기업들에서 돈을 모아 배상한다는 이른바 '제3자 변제' 해법이 6일 외교부에서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일 강제징용 해법을 환영하며 "획기적 새 장을 여는 양국 노력 계속 지지한다고 밝혔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8일 미국 정부가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핵 억지력과 관련한 새로운 협의체 창설을 타진했다고 보도했다.


한일관계 회복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적 공조를 구축하고 있는 한미일 3국의 경제 협력 체계 강화를 위한 고리 역할을 할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이번 회담에서 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가 참여하는 ‘쿼드’ 협의체와의 협력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쿼드는 현재 △코로나19 백신 △기후변화 △핵심기술 등의 실무그룹을 두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당시 우리 정부는 최대 시장인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쿼드 가입과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쿼드 실무그룹 참여 및 협의체 가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도 있다(대한경제.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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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3국 정상이 2022.6. 29 스페인 마드리드 이페마(IFEMA) 국제회의장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IV.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과 이후 한일관계의 향방

 

윤석열 정권의 한일외교 정책은 박정희 - 이명박 - 박근혜로 이어지는 친미 종속 정책의 연장선으로서의 친일 정책의 확대강화라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은 북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키면서 북의 안보문제를 핑계로 동북아에서 패권을 확대 강화하려는 미국의 중러 봉쇄정책에 철저히 종속당하고 있다. 즉 미국의 의도에 충실하다. 심지어 윤 정권은 중러를 견제하는 쿼드와 협력을 강화하고 나토를 동북아에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정책에 노골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과거 정권과 달리 북을 핑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중러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행보에 동참하고 있다. 


윤석열은 군사, 정치, 외교 문제 이외에도 미국이 중러를 견제하려는 경제공동체와 경제협력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즉 윤석열은 동북아에서 한미일 군사공동체, 경제공동체, 나아가 아태 지역에서 호주와 인도까지 결합하는 친미 중러봉쇄 전선 구축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대일정책은 이런 큰 구도에서 봐야 한다. 따라서 윤석열 정권은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조기에 매듭짓고, 경제적 협력, 군사적 협력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하여 미국의 80여 년 숙원인 한미일 군사동맹을 완성하는 것이다. 


V. 결론

 

보수세력은 반미에 대해 비난하더라도 반일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동조하고 있다. 즉 한국의 반일감정은 좌우를 불문한다.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미국의 일방적인 압박과 그에 굴복한 윤석열 정권의 비굴한 사대외교는 좌우를 뛰어넘는 반윤석열 전선을 형성한다. 보수세력은 비록 반미에 나서지 못하지만 반윤석열에 동조하거나 방치할 수 있다. 반일투쟁은 미국과 친미정권을 궁지에 몰아넣고, 보수세력을 친미친일전선에서 일부 분리시키는 전 민족적인 투쟁이며, 미국의 동북아 패권에 맞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이며, 한미일 독점자본의 담합에 맞서는 반신자유주의 투쟁인 셈이다. 즉 약한 고리를 끊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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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제거 4번 검토한 美···'반일 한국'에 원조 깎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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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욱희. (2019).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와 한일 관계의 양면 안보 딜레마. 아시아리뷰, 9(1), 15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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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5월 총궐기, 7월 총파업은 위기의 대안을 만드는 기회

 양동규 (민주노총부위원장)

2023.04.21

오피니언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선거연합정당'에서 시작하자 

ㅡ 노동당과 녹색당 의석 보장, 정의당과 진보당 지지율 존중되야

김동성 (공공운수노조)

2023.04.20

한찬욱의 총반격

[기고] 미완의 4월혁명은 계속된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2023.04.19

한찬욱의 총반격

[기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제3세계의 부상

반둥회의 68주년에 부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3.04.18

오피니언

돌이킬 수 없는 미국의 영향력 약화가 의미하는 것

- 국제정세 평가

한설(예비역 육군 준장)

2023.04.18

함성논평

안현호 집행부, ‘신 노사협조주의’ 우려된다

202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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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동자 직접 권력 쟁취하는 계급의식과 조직강화

ㅡ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어떻게 할 것인가! 

 오세중(노동전선 집행위원)

2023.04.14

오피니언

윤석열식 교육개혁은 교원 구조조정의 시작 

인공지능이 수업진행, 엘리트 경쟁체제 강화로 양극화 심화 

김봉석 (전교조 대구지부 정책실장)

2023.04.13

오피니언

문제아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다

한일정상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

김장민 (정치학 박사)

2023.04.13

한찬욱의 총반격

[기고]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4·9통일열사 48주기에 부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3.04.12